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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38 년 전인 1983 년 10 월 9 일, 누군가로부터 전화를 받고 ‘전두환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박수를 치며 좋아했었다.
어제 이 시간 쯤 전두환 사망소식을 들었을 때 내 기분은 그저 담담했다.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떠 오르긴 했다. 한국은 23 일이지만 여기는 22 일이어서 마침 JFK가 죽은 날이기도 한데, 한국보수 중 또 어떤 인간들이 죽은 날이 같다고 전두환이 한국의 JFK 라고 떠 벌이고 다닐지도 모른다는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나이에 관계없이 전두환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의 공과를 운운하며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을 보면 한심하다.
당시 아이들이 부르고 다니던 노래가 있었다.
대머리가 바람에 펄쩍 뜁니다. 대머리는 쉬운 말로 개새낍니다.
주걱X이 바람에 펄쩍 뜁니다. 주걱X은 쉬운 말로 썅년입니다.
시대가 달라져 지금은 이런 식으로 노래를 부르면 안된다. 용모차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6 년 전인 2005 년,
씨엔드림 오프라인에 글을 하나 올린 게 있다.
기념으로 여기에 가져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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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나는 고등학교 2 학년이었다. 1979 년 봄부터 벌어지기 시작한, 말 그대로 드라마틱한 정치적 사건들은 26년(지금은 42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하나 하나의 장면들이 마치 지워지지 않는 화인(火印)처럼 뇌리 속에 선명하게 박혀 있다. 그것은 내가 특별히 기억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그건 아마 그 해와 그 이듬해 나와 비슷한 또래로 한국땅에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대개 공통된 경험 일 것이다. 그만큼 그 두 해 동안 한국에서 벌어졌던 일들은 호기심 많은 청소년들의 신경을 온통 집중시킬 만큼 해괴하고 기이한 것들이었고, 마치 상식을 벗어난 주인공들이 벌이는 엽기행각을 다룬 드라마 같았다.
내가 그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건 그 해 5 월 30 일부터였다.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이 이철승을 누르고 당선되던 그날 나 와 내 친구들은 왠지 모르게 통쾌했다. 그로부터 두 달 반 이 지난 어느 여름날 밤 야당 당사에서 농성 중 이던 여공(당시에는 그렇게 불렀다.)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개처럼 끌려갔을 때 이 정권이 곧 끝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 느낌은 신통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태어날 때부터 줄곧 박정희 혼자 이 나라의 국가원수였기에 다른 사람이 대통령을 할 수 있다고 쉽게 생각하기 힘든 세대였기 때문이다.
그 해 9 월, 멀쩡한 야당 총재를 밀어내고 정운갑 인가 뭔가 하는 듯도 보도 못한 이름이 총재직무대행이라는 직함으로 신문에 등장했다. 어떤 놈들이 이런 바보 같은 짓을 꾸몄을까 하는 게 나와 친구들의 관심사였을 정도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정치공작 이었다. 뉴욕 타임즈와 기자회견을 한 야당총재가 국회에서 제명되고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우리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며칠 뒤 박정희가 죽었다. 여가수 와 여대생이 시중을 드는 각하 전용 비밀요정 에서 술을 마시다가 부하의 총에 피살됐다는 것이 후에 밝혀진 사실 이었다.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나와 아무 애증관계도 없는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렇게 기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거액의 외화 밀반출과 보석밀수로 이름을 드날린 적이 있는 우리 학교의 이사장만이 전교생이 모인 채플시간에 나라가 망하기라도 한 것처럼 울먹이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1979 년 과 1980 년 은 예민한 틴에이저들의 관심을 일상에서 정치 사회적인 문제로 순식간에 바꾸어 놓았고, 이 후 이 세대를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정치감각이 뛰어나고 전투적인 동지의식을 갖는 특이한 또래집단으로 만들었다.
적어도 1979 년 봄까지 나 와 친구들의 관심사는 정치적인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토요일마다 담배연기 자욱한 아지트에서 고 스톱을 쳤고 해변가요제와 일간스포츠 연재소설 ‘제 5 열’, ‘여명의 눈동자’ 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TBC ‘고전 유모어 극장’ 과 ‘서금옥의 밤의 데이트’를 빠짐없이 보고 들었고 정윤희를 보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 몰려갔다가 경비에게 쫒겨 나기도 했다.
그러나 10.26을 기준으로 앞뒤 1 년 여 간에 걸쳐 벌어진 한국 현대사의 비극과 코미디는 우리를 전혀 다른 아이들로 바꾸어 놓았다. 이 1 년 여 동안 우리는 갑자기 10 년은 더 나이 들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놀라운 추리력과 감각으로 전개되는 ‘판’을 해석해 내기 시작했다.
전두환이 정승화를 잡아간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이것이 쿠데타 라는 걸 단박에 알아 차릴 수 있었다. 시작부터 이 드라마에 푹 빠져 있었던 우리가 이 ‘반전’ 이 의미 하는 것을 놓칠 리 없었다. 우리는 아연 긴장하기 시작했고 이 작자들이 언젠가 반드시 대가리를 내밀고 다시 나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듬해 4 월 14일(이 날 도 잊혀지지 않는 날이다)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했다. 우리의 확신이 착착 현실로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권력의 공백기에 양대 정보기관을 한 사람이 장악한다는 게 어떤 의미라는 것까지 알기엔 우리가 너무 어렸지만 저 인간이 멀지 않은 장래에 대통령에 오를 것 이라는 예상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전두환 과 신군부의 집권은 눈 앞으로 다가와 있었지만 이들의 시나리오는 만 18 세 고등학생들의 손바닥 안에서 조차 낱낱이 파악될 만큼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 이었다. 우리에게는 5월 18 일 조간신문에 난 경천동지할 내용의 비상조치 역시 올 것이 온 것에 불과했다.
단 한가지 광주에서 벌어진 대학살은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돌발사태였다. 광주항쟁의 비극은 우리의 확신을 이 어리석고 무모한 자들에 대한 증오와 결합시켰다.
1981 년 3 월 3 일에 있었던 전두환의 12 대 대통령 취임식은 확신 과 증오로 무장한 신세대와 신군부 집권세력간에 벌어질 격렬한 7 년 전쟁의 막을 올리는 신호탄 이었다.
한 마디로 우리는 그들의 흉계 와 행보를 미리부터 속속들이 알고 있었고, 그런 우리와 전두환 정권은 한 하늘 아래 공존할 수 없는 철 천지 원수나 다름 없었다.
내가 허화평 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대학 2 학년 때인 1982 년 봄 이었다. 증권가와 대학가에 집권세력 내부의 심각한 균열로 인한 쿠데타 설이 파다하게 퍼져 있을 때였다. 우리는 그들 내부 갈등의 원인이 정치자금조성을 위한 금융부정을 둘러 싼 것 이라는 정보까지 입수하고 있었다.
그런데 갈등의 두 축이 생뚱맞게도 이순자 와 허화평 이라는 것이다. 장영자 사건이 공식 발표되기 직전의 일이다. 육사(陸士) 위에 여사(女史)가 있다는 말은 2.12 총선 때 민한당 후보로 나온 정대철이 처음 한 게 아니라 그보다 3 년 앞서 허화평이 최초로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는 이 허화평 이라는 자가 우리에게 DDD (두환이 대머리 돌대가리) 라는 놀림을 받고 있던 전두환의 브레인 이며 쿠데타 정권의 사실상의 기획자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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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년 당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시절을 모르는 세대를 대상으로 12.12 쿠데타와 신군부 집권과정의 정당성을 교활하게 설파하고 다니던 허화평 (육사 17 기, 쿠데타 당시 국군보안사령관 비서실장, 대령)에게 ‘너희가 한 짓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 시퍼렇게 살아있다’ 는 의미로 쓴 글이었다.
그건 그렇고,
윤석열은 참 웃기는 인간이다.
조문을 가겠다고 마음먹었으면 그냥 가면 되지 쭈삣거리더니 안 가겠단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른 게 아니라,
도대체 죽은 자를 조문할지 말지 이런 사소한 일 조차 스스로 결정하지못하고 좌고우면 우왕좌왕하는 인간이 무슨 대통령이 되어 한 국가의 위기관리 총책임자를 하겠다는 것인지 아주 딱하기 짝이 없다.
DDD. 두환아 잘가라!
혼자 가지말고 몇 넘 잡아 같이 가라.
멀어서 조문은 못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