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늘봄님의 포스트에서 번영님의 질문에 대한 늘봄님은 이렇게 답합니다: “ 요즘 “soul”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저의 문제제기는 실종된 상태로 말이죠. 영혼에 대한 것은 제가 촉발한 것은 맞지만, 이것은 저의 글을 완전히 오도한 것입니다. 제가 제기한 문제는 “영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것입니다. 늘봄님은 예수는 무신론자였고 이원론을 부정한 일원론자였다는 주장이 본인이 참고했다는 그레고리 라일리의 책 [The River of God]는 늘봄님의 이러한 주장을 완전히 뒤엎다보니 아마도 당황하셨나 봅니다. 신학에 경도된 이들의 위험은 본인의 신학적 입장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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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라일리는 나름 진화론적 입장에서 종교가 어떻게 발전되었는지를 소박하게 설명하고자 한 성서학자죠. 그는 서론에서 종(species)은 환경이 부과하는 방향으로 변한다는 것이고, 이 환경에 적응하거나 아니면 소멸한다 (they adopt or die)는 테제를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적응의 한 개념으로 그는 “punctuated equilibrium”을 소개합니다. 한국에서는 이것을 단속 평형이론(斷續平衡理論)으로 번역하는군요. 종의 진화는 변화없는 긴기간이 지속되다가 환경의 위기가 초래한 비교적 빠른 변화의 순간의 평형상태를 의미한다 (믿거나 말거나)고 합니다. 이런 평형상태가 지엽적으로 발생했을 때 이런 틈새 (niche)에서 새로 적응한 형태가 적응하지 못한 조상의 후손과 공존하게 되는데 이러한 진보 (Progress)는 점진적이 아니라 환경의 위기에 빨리 반응하여 적응한다는 것이죠. 이러한 짧은기간에 일어난 평형 이론이 종교의 진화에 적용하는 것이 적절했느냐 성공했느냐는 이 글의 논지가 아니라 라일리가 초기 기독교 환경을 설명하는데 나름 진화론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는데 방점을 둬야 할 것입니다 (자연과학 이론이나 개념을 인문학에 적용할 때 위험은 언제든지 도사리고 있죠. 괜히 잘 못 이해하고 적용해서 쪽팔릴 확률이 높으니까요).
예수는 영/육의 이원론자: 기복신앙의 극복
라일리는 그의 책 마지막 장에서 자기의 진술을 다시 요약합니다. 라일리에 따르면, 모세 (Moses)는 예수에게 매우 중요했던 영혼과 몸의 이원론적 개념을 전혀 몰랐습니다. 예수는 적은 인간이 아니라 바로 세속적인 욕망과 악의 유혹이었다는 겁니다. (he [Moses] knew nothing of the dualistic ideas so important to Jesus. Jesus’ enemies were not human beings at all, but worldly desires and the temptations of the Devil.). 이러한 예수의 입장을 제 나름대로 패러디 한다면 이렇습니다. 예수는 당시의 사람들이 돈과 권력에 빠져 흥청망청 즐기기 보다는 삶의 궁극적 의미를 주는 영원성을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보수복음주의에 대한 비전문가들은 보수기독교인들이 현세보다는 천국만 바라보고 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현세의 복을 엄청 추구합니다 (이 부분은 다음 기회에).
삼층우주론의 극복
새로운 종교전통은 선행 종교전통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새종교 전통의 출현은 새로운 환경에 대한 반응의 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전통이 제대로 역할을 못할 때 사람들은 혼돈 (chaos)를 경험하며, 이러한 혼돈을 극복한 질서(order)를 제공하는 종교에 참여합니다. 사람들의 반응을 라일리는 They “make sense” out of what makes no sense”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예수가 경험한 우주론은 바로 “삼층우주론” (the tree-story cosmos)을 대체한 것입니다. 이것은 기존에 막연히 예수는 삼층세계관을 갖고 있었다는 단순화된 인식을 깨게 합니다. 삼층 우주론에 따르면 신들은 하늘 꼭대기에 왕좌에 앉아 있고, 그 신들은 아주 멀리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한 신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삼층우주 (the three-story universe)은 점차적으로 지상 중심적 (geocentric) 우주관으로 대체됩니다. 여기서 신은 유일신 (the one God)이고 영지주의적으로 보면 “모나드” (Monad)입니다. 이 모나드는 모든 존재의 영적이며 무한한 원천입니다. 이 새로운 우주론이 바로 예수 시대의 우주론이었습니다. 이러한 우주론적 인식의 변화는 진일보된 것 (progress)라고 볼 수 있습니다. 라일리의 이러한 주장은 그가 영지주의 연구가이고 예수의 영지주의적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의 우주론은 이제 낡은 것
하지만 예수의 우주론은 원시적 형태의 삼층 우주론을 극복한 것으로 보이지만, 즉 당시 상황으로볼 때, 최상의 과학적 철학적 인식이었다 하더라도 코페르니쿠스의 과학적 우주론에 의해 대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현대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예수보다 못한 낡은 삼층우주관을 견지한다고 라일리는 보고 있습니다. 이제는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가 제시한 태양중심의 우주관 (the heliocentric universe)으로 완전히 교체되었습니다. (초기 예수운동과 초기 불교운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예수와 붇다를 이상화하는 (idealize)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맞는 면도 있고 틀린 면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초기 운동 (movements)에서 그 운동의 멈버들은 평등주의적 (egalitarian) 경향이 있는데 이것이 시간이 지나서 제도화 (institutionalization)의 과정을 겪으면 위계질서화는 불가피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초기의 종교운동에서 이상적인 면을 찾지만, 이 종교운동이 제도화의길을 걷지 않으면 소멸됩니다.)
“신의 강”의 은유가 주는 것
라일리가 이 책을 쓴 동기는 바로 현재의 기독교 전통처럼 단일한 전통이 아니라 수많은 종교 전통들이 있었고 이런 전통이 모이고 모여 증발하거나 증발하지 않고 바다에 이르는 형태로 발전되었다는 것입니다. 제 소박한 생각에는 옛날에는 “이단”(heresy)과 “정통” (orthodoxy)의 힘겨루기가 가능했지만, 현대는 점점 민주화되어 가듯이 종교 부분에서도 “영성의 민주화” (spiritual democracy)와 민주적 영성 (democratic spirituality)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다가 현대 세계는 더 이상 기독교가 힘을 좌지우지하는 기독교세계 (Christendom)이 아닙니다. 내 이웃은 무신론자, 무슬림, 불교도, 몰몬교도 (후기성도교회), 무종교인, 힌두교도, New AGERS (뉴에이지), 신이교도 (Neo-Pagans, Wiccans) 등 다문화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나의 기독교인 자녀가 힌두교도와 결혼할 수 있고, 무신론자 자의 자녀가 기독교인과 결혼할 수도 있고, 결혼을 아예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의 영육 이원론이 현대 과학과 배치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의 영혼불멸의 의도는 인종적, 육체적, 계급적 차이를 극복한 세계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영혼관은 다문화의 바다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새로운 해석의 여지를 남겨줍니다. 그 일부는이렇습니다: 당신이 LGBTQ의 멤버이든, 전통적 신앙인이든, 무신론자든---이렇게 선언받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YOU ARE ACCEP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