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는 두 번 여행했는데 한번은 바르샤바를 중심으로 두번째는 크라쿠프를 중심으로 여행했다. 볼거리는 크라쿠프쪽이 많다. 쉰들러 리스트의 역사적 현장이 있고, 바벨 성, 소금 광산, Arbeit macht frei (노동이 그대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황당한 표어가 반겨주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이 있다. 오랜 역사를 지닌 중앙광장 옆 카페에서 비 오는 날 맥주 마시는 정취도 괜찮고, 성모 마리아 성당도 볼만한 구경거리다.
바벨성을 구경하러 갔는데 가이드가 중년 폴란드 남자였다. “폴란드는 유일하게 모스크바를 점령했던 나라다. 폴란드의 자랑스러운 역사다.” 남의 나라 쳐들어간 게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폴란드-러시아 역사를 알면 그 말이 이해가 된다.
바르샤바는 2차대전 때 폭격 당해 폐허가 되었다 전후 복구사업으로 재건된 도시다. 8월의 어느 날 시내를 나가보니 군인들이 많이 보이고 제복입은 중고등학생들도 많이 보였다. 정장 차림의 시민들이 무리를 지어 꽃을 들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오늘이 무슨 날이냐?” 물어보니 바르샤바 봉기 기념일이라고 한다.
2차대전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되었다. 독일은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 후 일주일만에 폴란드를 침공했다. 그후 소련도 폴란드를 침공해 히틀러-스탈린 두 악마는 폴란드를 사이좋게 갈라 먹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소련이 차지한 지역에서는 소비에트화가 진행되었다. 소비에트 화 과정에서 '카틴 숲의 학살'로 폴란드 군인, 지식인등 2만명이 학살되었다. 카틴 숲의 학살은 폴란드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폴란드는 영국 런던에 망명정부를 세웠다. 시인 김광균은 추일서정에서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라고 썼다. 2차 대전 때 독일의 땅 따먹기 등쌀에 못 견딘 유럽국가들은 너도 나도 런던에 망명정부를 세웠다. 네덜란드, 노르웨이, 체코슬로바키아, 프랑스 등등 10여개국이 런던으로 몰려들어 망명정부를 세웠다.
그 중에서 가장 골치 아픈 건 프랑스 망명정부인 ‘자유 프랑스’였다. 더부살이 주제에 걸핏하면 집 주인 멱살 잡고 흔들며 싸우기 일쑤였으니까.
독일과 소련의 달콤한 밀월이 끝나고 독일은 소련에 선전포고했다. 그래서 국제관계에서는 믿을 놈 하나도 없다는거다. 2차대전 초기 독일 6군은 파리를 점령했는데 그들에게 그곳이 천국이었다. 게르만 촌놈들은 유럽 최고의 문명 도시, 문화의 집산지에서 꼬냑과 포도주, 산해진미에 취해 ‘이런 게 문화라는 것이구나’ 라며 황홀한 문화의 정수를 느꼈다.
독, 소 전쟁이 시작되며 6군은 동부전선으로 이동해 소련과 전투에 투입되었는데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괴멸되어 항복했다. 그때 소련 150사단이 6군의 항복을 받았는데 이번 우크라이나 전투에서 150사단 사단장이 죽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로 독일이 망조가 들기 시작하자 폴란드 망명정부는 독립을 준비했다. 그 준비의 일환이 바르샤바 봉기다. 무장봉기로 독일군을 내몰고 독립을 찾자는 계획인데 여러 세력들을 규합했다. 그 중 주종은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결론을 말한다면 봉기는 실패했다. 바르샤바를 수비하는 독일군이 두배로 증원되었거니와 ‘썩어도 준치’ 라고 비록 망조가 들었을망정 장비, 조직, 화력면에서 봉기군은 독일군의 상대가 못 되었다. 봉기는 막대한 희생자만 남기고 두 달 만에 실패로 끝났다.
봉기군이 독일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를 때 소련군은 바르샤바 교외에까지 진군했는데 봉기군 도울 생각 없이 팔짱 끼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독일군이 물러나면 폴란드 전역을 장악해 소비에트 화 할 생각에 소련은 독립을 외치는 골치 아픈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을 소탕해 주는 독일군에게 재를 뿌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손 안 대고 코 푸는구나.”
나치가 망하고 전쟁이 끝나자 각 국 망명정부들은 귀국을 서둘렀다. “그 동안 신세 많이 졌다”는 인사말을 남기고. 그러나 폴란드 망명정부는 귀국하지 않았다. 소련의 공산당 꼭두각시 정부를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련이 망하고 폴란드에 민주화 바람이 불어 레흐 바웬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바웬사는 대통령 취임식에 전임 대통령 야루젤스키를 초청하지 않고 런던으로 특별기를 보내 망명정부의 카초로프스키 대통령을 초청했다. 카초로프스키 대통령은 국가 문장과 직인을 갖고 귀국해 정부의 법통을 바웬사 대통령에게 인계하고 망명정부는 51년만에 해체되었다.
바웬사는 소비에트 연방 폴란드 공화국의 과거를 깡그리 부정한 것이다. 과거와의 단절은 폴란드처럼, 프랑스처럼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 후 폴란드는 체코, 헝가리와 함께 나토에 가입했는데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맹렬히 반대했다.
폴란드와 러시아는 감정이 아주 나쁘다. 소비에트 연방 시절 상전 노릇하며 일방적으로 당했던 일, 바르샤바 봉기, 중세 이후 러시아와 국경분쟁과 전쟁 등 역사적으로 쌓인 감정이 많다. 러시아도 폴란드를 적국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번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서도 폴란드가 우크라이나에 가정 먼저 군사 지원을 했다. 난민행렬도 환영했다. “내집처럼 알고 편히 지내라”며 환대했다. 러시아 엿 먹이는 일에는 폴란드가 앞장서 우크라이나 나토 가입도 찬성했다. 폴란드 총리는 “러시아 옆에서 사는 것은 화산 옆에서 사는 것과 같다” 라고 말했다. 폴란드-러시아 관계를 보여주는 말이다.
키이우에서 바르샤바까지 기차를 탄 적이 있었다. 침대칸을 탔는데 젊은 우크라이나 부부와 같은 칸이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데 먹을 걸 꺼내 같이 먹자고 음식을 내밀던 순박하고 친절한 젊은 부부가 생각난다. 우크라이나에 평화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