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서 한 때 싱가포르에 있었는데 그 때 생긴 일이다.
쿠알라룸푸르에 갈 일이 생겼다. 대개 버스나 기차를 타고 가는데 버스는 보통 6-7시간 걸렸고 기차는 9시간 정도 걸렸다. 기차가 시간이 더 걸렸다. 그날은 새벽에 첫 버스 타고 쿠알라룸푸르 도착해 일 처리할 거 하고 저녁에 싱가포르 오는 기차를 탔다.
저녁에 기차 타면 다음 날 새벽 싱가포르에 도착한다. 그때 일정이 싱가포르 도착해 잠을 잠깐 자고 아침을 먹고 11시까지 공항에 가서 서울 가는 비행기를 타는 것이다.
기차를 탔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 따라 기차가 마냥 늑장을 부렸다. 타이핑 까지는그래도 천천히 달려도 움직이는 척하더니 타이핑 지나면서 스텝이 꼬였다. 그래도 별로 걱정을 안 했다. 아무리 늑장 부려도 내일 아침에는 도착하겠지. 정 늦으면 탄중파가 기차역에서 택시 타고 곧장 공항으로 가면 된다.
기차는 덜커덩 하고 움직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벌판에 서서 움직일 줄 모른다. 에어컨이 고장 났는지 실내는 찜통이다. 창문을 열면 이름 모를 벌레 소리와 함께 더운 공기가 밀려 들어온다. 덜커덩 하고 움직이다 또 선다. 움직이는 시간보다 서 있는 시간이 더 많다. 그때만 해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철도 사정이 별로 좋지 않아서 연착 연발을 식은 죽 먹듯 했지만 그날은 정도가 심했다.
밤새도록 가다 서다 하기를 반복하던 기차가 조호바루 도착했을 때 아침 8시 정도. 여기서 내려 택시 타고 공항을 갈까? 조호바루에서는 다리만 건너면 바로 싱가포르이고 30분 이내에 탄중파가 기차역에 도착한다. 다 왔는데 설마 또 늑장 부리려고?
다리를 건넌 기차가 다시 서더니 움직일 줄 모른다. 다시 섰다. 이러다 비행기 놓치겠다는 불안감. 멀지 않은 곳에 도로가 보이고 차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인다. 여기서 내려서 택시를 타자. 그렇게 생각을 하고 기차에서 내려 도로까지 걸어갔다. 별로 먼 거리가 아니었다.
마침 빈 택시가 오길래 세웠다. “창이 에어포트!” 공항에서 내려 대한항공으로 가서 보딩패스 받아서 출국심사대에 줄을 섰다. 서울 가는 데는 이상이 없구나. 내 차례가 와서 여권하고 항공권을 내밀었다. 직원이 여권을 스캔 해보더니 페이지를 넘기며 뒤지다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너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순간 쇠망치로 뒤통수 맞는 기분이었다. “앗! 그렇구나.” 깨달았을 때는 늦었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안 되는 줄 알면서 직원에게 설명했다. 여차 여차해서 역에서 내리지 않고 중간에 내려 택시 타고 공항에 왔다. 그 직원은 여권과 항공권을 내게 돌려줄 생각도 안하고 “너 저기 가서 있어.”
급하다고 허허벌판에서 기차를 내리면 안되고 탄중파가 기차역까지 와서 입국 수속 마치고 여권에 입국 도장을 찍어야 했다. 잠시 후 제복 입은 여자가 오더니 그 직원에게 여권을 받아 들고는 나보고 따라오라고 하더니 이민국 유치장에 입감시켰다. 나 말고도 몇 명 있었다. 서울 가는 비행기고 뭐고 졸지에 불법 입국자가 된 것이다.
불안한 마음을 달래며 앉아 있으려니 한 두 시간 지나서 나오라고 하더니 미주알 고주알 꼬치꼬치 캐묻더니 “너 신원보증 할 사람 있어?” “있다.” 전화기 주더니 전화 하라고 한다. 선박회사 직원 쟈니에게 전화를 했다. 나를 심문하던 직원이 전화기를 낚아채더니 쟈니에게 설명을 했다. "네가 이사람 신원보증 하겠냐?" 라고 묻는다. 쟈니가 그런다고 대답을 했는지 내게 전화기를 주었다. “이민국 직원 설명대로 내 처지가 이렇게 되었으니 네가 와서 나를 구해줘야겠다.”
쟈니는 혼자 말로 투덜대더니 “알았어, 기다려.” 두어 시간 기다리니 쟈니가 왔다. 그는 서류에 서명을 하고 신병 인수를 했다. 싱가포르 달러로 기백불의 벌금을 내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쟈니 하는 말이 “너는 해외여행 처음 해보냐? 남의 나라 들어갈 때는 허락 맡고 도장 받고 들어 가는거 알잖아?”
“현자 가라사대 어리석은 자들이 서두느니라.”
사족: 말레이시아나 태국에서 버스나 기차로 싱가포르 입국할 때 버스는 조호바루 검문소에서 입국 수속을 하고 기차는 탄중파가 기차역에서 입국수속을 하는데 싱가포르 관리들이 까다롭게 짐검사를 한다. 마약 때문이다.
한국 여권 내밀면 그 까다로운 싱가포르 입국 수속 관리들이 “한국 사람은 괜찮아” 라면서 짐 검사 쉽게 하고 도장 찍어 주었다. 80년대 초, 중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