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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마더니즘과 무신론자 |
작성자 토마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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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번호 2057 |
작성일 2009-12-13 20:15 |
조회수 16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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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엔드림의 한 칼럼을 보니까 "무신론은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를 특징짓는 종교관으로서 인식되고 있습니다" 라고 쓴글을 보았습니다. 근데, 무신론은 종교관이 아닙니다. 증거에 기초해서만 신념을 형성하는 자연주의적 세계관 (초자연주의적인것이 아닌) 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신을 믿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과학도 삐딱하게 믿기때문에 *대분분의 건전한* 무신론자들과는 친구가 될 수 없는 집단입니다. 혹시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갖는 무신론자가 포스트마더니스트들과 동격이 될까봐 한자 적어봅니다.
리차드 도킨스가 수년전에 쓴 네이쳐 서평을 링크합니다. 소칼이란 물리학자의 책 (지적사기꾼들)에 대한 서평이었지만, 아주 위트넘치는 글로서 왜 포스트마더니스트가 "건전한 무신론자"의 친구들이 절대 될 수 없는지 통쾌하게 잘 보여줍니다. - 토마올림
http://richarddawkins.net/articles/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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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마더니즘 이란 말이 무슨 말 인가요?
제가 한국에서 고딩 수준 이라...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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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09-12-14 03:43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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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nism과 post-modernism의 구분은 먼저 pre-modern과 modern society를 구분해야 되어야 합니다. 한국말로 보통 modernity를 근대성으로 번역하는데요. 근대성은 반드시 전근대성을 전제로 해서 생성된 개념입니다.
근대성: 전근대와 근대를 나누는 핵심적인 것은 바로 근대 사회는 전형적인 산업화, 자본주의 경제, 민주정치제도, 사회계급의 분화 (division) 등의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근대성은 개인을 감시하고 통제하고 훈련하는 새로운 체계를 발전시켜서 감옥도 근대화하고, 포드주의처럼 자동차조립을 체계적으로 쫙 잘하는 것이죠.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가 시사하는 것도 바로 근대성의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한 때 유행한 [모모]라는 소설을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일상 생활을 해가 뜨면 일어나고 지면 자는 전근대사회가 아니라 모든 시간을 분과 초로 나눠서 사람들을 이러한 규칙하에 두는 징후를 근대성의 부정적인 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모는 이러한 근대성의 어두운 힘과 대결하는 순진한 고아 소녀로 등장하죠. 저는 이 책을 중 1 때 봤는데, 대학가서야 대충 이 책의 가치를 깨달았는데 다시 읽어보진 못했습니다.
근대성의 틀에서, 학문도 인간의 가치가 개입되지 않은 가치 중립적인 것을 지향합니다. 그래서 근대성은 합리성 이성과 과학적 이론을 기반을 바탕으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계몽주의의 자식입니다. 18세기에 등장한 계몽주의 (Enlightenment)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 종교비판의 자유, 과학과 이성의 가치를 강조한 시대적인 흐름을 이야기하는데, 도킨스나 토마님같이 과학적 이성을 사고의 기초로 삼는 분들은 어쩌면 계몽주의의 손자뻘인 이러한 근대적 사고에 기초한다고 제 나름대로 짐작해 봅니다 (모던, 포스트모던의 구분이 가능하다면 말씀이죠).
Postmodernity는 modernity의 상대개념입니다. 이성의 합리성을 바탕으로 등장한 이성의 시대 (the age of reason)라고 불려지는 계몽주의에 반발해서 낭만주의가 인간의 감성에 호소 호소했고, 제 1, 2차 세계 대전 이후 인간의 존엄성의 황폐함을 겪고 인간의 주체나 실존을 강조해서 실존주의가 나왔는데, 이에 반발로 구조주의가 나타나듯, 포스트모더니즘은 낭만주의의 현대적 신종 바이러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조류를 여러 관점에 따라 분류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사회적 (social)인 관점
산업화와 근대적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산물인 사회 구조나 분화에 대한 반발로 사회 계급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계급조차 파편화되고 복잡해서 하나의 통일적인 체계 속에 가두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2) 문화적 (cultural)인 관점
개인의 정체성 (identity)이 전통적인 귀속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선택으로 가능하며, 문화 또한 하나의 체계로 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3)경제적인 (economic)인 관점
포드주의가 표명하듯 자동생산과 통일된 시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포스터 모던 사회의 시장은 단편적이고 틈새적인 형태로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일도 한 사람이 여러 가지를 해냅니다.
4) 정치적 (political)인 관점
근대사회는 큰 정부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는데 경쟁과 시장원리에 기초하고, 또 정부도 점점 작은 정부가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대략 몇 가지 이야기하면 이런데요.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한 곳은 철학, 문학, 문화이론 등입니다. 그래서 소칼의 [지적사기꾼]에서 지적하듯, (짐작컨대) 이런 인문학을 바탕으로 전개된 포스트모더니즘은 과학의 이름으로 이것저것 과학적 사실을 조합해서 사태를 설명하기는 하지만, 하나도 과학적이지 않고 현란한 언어 구사를 통해서 잡탕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신과학이니 뉴에이지니 하는 책들, 동양의 지혜나 서양의 과학을 합류시킨다는 등의 책들도 이런 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여성학하는 사람들은 가부장적 구조가 만들어낸 여성의 억압 기제를 비판하면서 여성의 독특한 경험을 강조하는데, 많은 여성학 하는 사람들이 여성이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근거로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찾습니다. 심지어는 경험을 강조한다는 이유로 전혀 학문적이지 않은 잡문 수준의 경험적 내용이나 이야기를 정리해서 독창성의 이름으로 지식을 팔아 먹는다는 비판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여성학 이론이 기존의 남성위주의 학문을 debunking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실제로 그런 비학문적 성향 때문에 대학가에서 제대로 학문을 비평해 낼 수 있는 기준이 없다고 불평을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쏘칼이나 도킨스가 들뢰즈, 가따리, 보드리야르, 라깡 등을 지적 사기꾼이라고 혹평을 퍼부어대는 것도 바로 이들은 독창적일 수 있지만, 제 짐작에,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개념이나 이론을 적용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읽어도 읽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이 듭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하이데거나 데리다가 유독 문학과 철학 같은데서 힘을 얻는 것도 문학은 상상력에 기초한 것이며, 철학은 바로 경험적 사실에 기초하기 보다는 합리적 추론에 기초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들은 쉽게 비학문적인 경향과 결탈하기 쉽다는 것이 저의 소박한 해석입니다. 저야 과학도 모르고 철학도 모르니까 쏘칼 정도의 비평력을 전혀 갖지 못하죠. 그런데 저는 아직도 의구심이 많은 것은 포스트모더니스트 철학자들이 하이데거를 거론하면서 많이 울궈 먹는데 거의 친나찌 전력에 대해서는 유달리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의 가족들이 하이데거의 유고 등등을 lock을 걸어 놔서 그의 자료를 보려면 하이데거의 손주나 증손주가 죽은지 30년 후에야 가능하니 우리 세대엔 불가능하죠.
그런데 여전히 논의되고 있는 것은 근대과 근대후기라는 구분이 전혀 과학적이지 않고 우리가 대충 근대라고 지칭한 시대적 사조와 그 이후의 새로운 특징을 구분할 수 있는 분명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입니다. 그래서 post가 근대와의 연속적 구분이냐는 후기라는 말로 구분해야 하느냐, 아니면 단절을 강조하는 탈근대라는 말로 해석하느냐는 논란도 있긴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도 사회적 특징을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성이라는 개념은 계몽주의나 산업화 등등의 특징으로 해서 전근대와 구분이 제법 선명하다는 점에서 저는 조심스럽게 사용하고 있긴 합니다. 저도 잘 몰라서 대충 정리해 보았습니다. 대답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더 혼란스럽죠.
저도 잘 몰라서리…
<a href=mailto:novareligio@hanmail.net>novareligio@hanmail.ne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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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09-12-14 03:46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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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은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를 특징짓는 종교관으로서 인식되고 있습니다\"라는 칼럼을 쓴 분은 김병혁 목사님이시군요. 토마님께서 문제 제기를 하셨고, 또 신문지상에 글을 올리셨기 때문에 실명을 거론해도 무방하리라고 생각합니다. target=_blank> target=_blank> target=_blank> target=_blank><a href=http://www.cndreams.com/pages/news_content.php?n_id=3694&node01=5&node02=128
target=_blank>http://www.cndreams.com/pages/news_content.php?n_id=3694&node01=5&node02=128
</a>
무신론이란 고대 그리스 철학부터 있었고, 근본불교 (Buddhism proper) 에는 신의 개념이 없으며, 유학에도 신의 개념보다는 더 광의의 하늘이라는 개념 정도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무신론이 종교부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특징짓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또 포스트모더니즘이 고대 무신론적 유행보다 높은 지수로 퍼뜨렸다는 증거도 없구요. 포스트모더니즘은 형이상학적 다양성과 문학적, 철학적, 신학적 상상력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기 때문에 어쩌면 종교인은 포스트모더니즘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김병혁 목사님께서 무신론이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를 특징짓는다는 주장은 포스트모던 신학이 전통적인 신관에 대해서 도전을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교회가 지키고 사수해 온 “전통” (tradition)과 “정통” (orthodoxy)이 종교 사회와 문화를 지배해 왔는데 포스트모던 신학은 그런 전통종교와 신관에 도전을 합니다. 특히 저 멀리 있는 대상적 신에 대한 비판적 견해는 포스트모던 신학의 특징입니다.
급진적 형태의 포스트모던 신학은 니체는 “신은 죽었다”는 개념을 차용했는데, 이 말은 전통적인 신의 개념에는 현대의 과학적 이성의 관점에서 볼 때 의미없는 텅빈 기호 (기호학적 개념을 사용하자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가 중요하다는 것은 강조하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신 또는 God라는 개념의 효용성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포스트모던 신학은 김병혁 목사님의 입장에서 볼 때, 무신론, 즉 전통적인 신 또는 신관의 거절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보다 다소 덜 급진적인 포스트모던 신학은 신의 개념적 효용성은 인정하지만, 전통적인 가부장적 신이나 전근대적 신의 이해는 거부하고 신을 보다 더 다양한 형태로 새롭게 해석해 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신의 개념을 은유 (metaphor)로 보고 이 개념에서 적극적인 영성을 찾자는 운동도 있습니다. 이들은 대상적 신에 대한 개념보다는 우리가 신에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지 고민을 많이 합니다. 그러므로 신을 믿는 것은 어쨌거나 무신론적 입장과는 다르다는 것이죠.
이런 대략적 구분에서 김병혁 목사님이 문제 삼는 것은 급진적인 신학 형태인데요, 그것도 무신론이란 신이 설 자리가 아예 없다라는 철학적 무신론이나 과학적 무신론의 맥락이 아니라 우리가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인 God의 효용성이 더 이상 사용할 가치가 없기 때문에 다른 대안적 종교성 또는 영성을 찾는다는 점에서 무신론이 아니라, 이것은 God개념의 전통적 신이해의 부정일 뿐입니다.
또 한가지 김병혁 목사님은 포스트모던 신학과 포스트 모더니즘은 구분하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포스트모던 신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일부이지 전부는 아닙니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의 조류에서 다양한 신앙 운동, 신학운동이 나올 수 있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의 맥락에서 모든 신학적 사유를 하나의 거대한 정통에 거두는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의 흑인의 경험, 아시아의 여성의 경험, 남아메리카의 혼혈인의 경험, 호주의 원주민의 신학적 경험이나 가치를 존중한다는 점에서 단선적인 신앙 또는 신학에 대해서 길을 열어 주는 혁신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개혁주의 신앙이니, 칼빈주의니, 토마스 아퀴나스주의니 하는 서구 편향적인 기독교관보다는 기독교를 세계적인 차원에서 보자는 [세계 기독교] (World Christianity)라는 과목이 기독교대학이나 일반 세속대학에서 제공된다는 점에서 우리의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소 보수적인 종교학자 Philip Jenkins는 이제 기독교의 중심은 유럽이 아니라 아프리카나 아시아로 넘어가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대표적인 책이 바로[The New Faces of Christianity: Believing the Bible in the Global South]입니다. 저한테 기독교가 알고 싶다고 메일을 보내 오신 분이 몇 분 계시는데, 바로 젠킨스의 책만 다 봐도 기독교에 대해서 제법 잘 알 수 있기에 이 번 기회에 소개해 드립니다.
그리고 김병혁 목사님의 칼럼을 몇 번 보다가 작년에도 문제 제기를 하려다가 망설였는데, 일반신문 칼럼에 이런바 개혁신앙이라는 지극히 협소한 개념으로 기독교를 정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번 칼럼도 성서에 계시된대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신앙고백적 진술로 끝나고 있다는 점에서 신학적 논증보다는 신학적 설교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물론 기독교 신론이 성서의 계시에 근거한다는 점에서는 문제 제기를 할 수 없지만, 결국 이것을 일반사회로 들어 왔을 때는 좀 더 종교철학적인 사유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우리가 종교철학에서 고전적으로 알고 있는 신존재증명 (The Arguments on the Existence of God)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느냐 하면, 적어도 이 신존재 증명은 기독교적 전통 또는 성서적 진술을 철학으로 끌어와 논증하려고 고민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Elliott Sober가 쓴 [Core Questions in Philosophy] (Englewood Cliffs, New Jersey: Prentice Hall)를 적극적으로 추천합니다. 제 5판까지 나왔는데, 저는 제 2판을 갖고 있습니다. 이 책은 철학개론의 범주 안에서 종교철학을 할애하고, 그 중에서 신존재증명문제를 심도있게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은 한국에서 비교적 열려 있는 신학교인 감리교 신학대학 교수였던 조직신학 홍정수 교수가 포스트모던 신학을 소개하고 그의 책[베짜는 하나님 : 이단자를 위한 한국신학]을 문제 삼아 감리교회에서 이 분을 출교를 시켰습니다. 그 주역은 우리가 언론을 통해서 잘 알고 있는 금란교호의 김홍도 목사였고, 그의 고발에 근거해서 홍정수 교수는 감리교종교재판에 회부되어 결국 1992년에 교단출교당하여 목사직을 잃었고, 드디어 1994년에는 감리교신학대학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학교를 떠났다는 사실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저의 더 이상의 의견은 묻지 않겠습니다.
* 이것 저것 적다보니 좀 옆으로 샜습니다. 토마님이 소개해 주신 도킨스 서평 잘 읽었습니다. 쏘칼 책을 아직 못 봤는데, 조만간 주문해서 봐야겠군요. Abebooks.com에 들어갔더니 헌책 소장자가 더 인디아에 있군요. 인도쪽 사람들과 거래를 안해 봐서 쪼까 고민되는군요.^^ 그리고 또 종교 이야기한다고 핀잔할까 봐 걱정도 되는군요. 아는게 그것밖에 없어서…그런데 저는 종교의 진리주장 (religious claims) 자체에는 관심이 없고, 문화속의 종교 또는 문화적 현상으로서의 종교, 또는 종교문화읽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것은 저의 교의를 관철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고 그러한 종교적 경험을 사는 사람들을 이해하려는 즉 인간이해에 궁극적 관심이 있습니다.
<a href=mailto:novareligio@hanmail.net>novareligio@hanmail.ne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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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
| 2009-12-14 08:13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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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개리한님의 질문 감사합니다. 사실 그 답변을 할려면 제가 여기저기 위키피디아에 가서 베껴와야 할판이었는데요...
와우 아프리카님의 너무 너무 포괄적이고 명료한글 감사합니다. 써내려가시는 필력이 저를 언제나 놀라게 하구요. 암튼 제가 썼을 포스트마더니즘보다 한 100배쯤 더 좋은 글이 되었습니다. 많이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포스트마더니스트들은 무신론자가 많지만, 무신론자가 다 포스트마더니스트들은 아니다라는것이 제 글의 요지였었습니다. Steven Pinker도 Blank Slate에서 포스트마더니스트들의 못마땅함을 길게 쓴적이 있었는데, 그글도 통쾌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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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09-12-14 13:18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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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님, 안녕하세요. 진짜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괜스리 어제밤 댓글 쓴다고 뚝딱뚝닥하다가 시간을 보내, 나중에 마쳐야 할 서평 땜에 밤을 샜습니다. 그 책은 Pham Quynh Huong가 쓴 [Hero and Deity: Tran Hung Dao and the Resurgence of Popular Religion]이라는 베트남 대중종교에 관한 ethnography인데 지루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습니다. 언급하신 Pinker는 아마존에 검색해보니 심리학자군요. 저 같는 뱁새가 따라잡기는 힘들것 고 나중에 둘러 볼 기회가 있으면 한 번 보겠습니다.
저는 요즘 대중문화나 대중종교 (popular cultre, popular religion)에 관심이 많아서 아마존과 abebooks.com에 책을 엄청 주문해서 매일 거의 한 두권씩 날아 오는군요. 오늘 도착한 책은 Clotaire Rapaille의 [The Cuture Code]와 Birgit Meyer와 Peter Pels가 편집한 [Magic and Modernity]라는 책입니다. 두번째 책은 위의 베트남 종교 책 저자가 언급해서 알게 되었는데, 살짝 요약한 것만 보면서 제 머리에 섬광처럼 스쳐지나가는 생각은 한국의 개발독재, 한국의 개신교 대형 교회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섬광은 다른 것이 아니고 합리적 이성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성이 오히려 종교 또는 주술이 활기를 찾도록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문했죠. 아직도 박정희를 잊지 못해 향수에 젖은 사람들도 생각 많이 했죠. 사람들에겐 문화적 영웅이나 종교적 영웅이 필요한가 봅니다. 이제 자러가야겠습니다. 도킨스의 서평은 다 이해는 못했지만 매우 신선했습니다. 쏘칼 책이 번역되었다는 기사는 읽은 것같은데 까마득히 잊고 있었습니다. 보드리야르, 크리스테바, 라깡을 씹었다고 하니 더욱 흥미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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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09-12-14 19:04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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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계 철학 선생님께 도킨스 서평을 보냈더니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내 왔습니다. 이 분은 도킨스에 대한 비평적 글을 써신 분입니다.
\"Splendid. When it comes to postmodernism, I rejoice in being a card-carrying Dawkins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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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
| 2009-12-14 19:39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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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꼴딱 세우셨나봐요. 그래두 그 글 잘 읽은 사람이 있으니 위안이 좀 되시겠지요? ㅋ
그 철학선생님을 생각하니 참 재밌는 세상입니다... 도킨스의 그 서평은 좋아하셨나보네요. ;-)
생각해 보면 Dawkinsian이란 말을 사용하는것도 재밌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사용하는걸 본적이 있지만요.) \"과연 도킨지안이란 무었일까?\" 이말을 쓰는 사람들에게 한번 물어보구 싶어졌습니다. 오늘은 일찍 주무셔요! - 토마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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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09-12-14 20:24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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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일어 났습니다. 이 분은 70을 훌쩍 넘은 분은데, 개인적으로 제 영어도 가르쳐 주고 또 함께 종교에 대해서 토론도 하는 사입니다. 만난지 4-5년은 된 것 같습니다. 영국의 King\'s College 나온 분이고, 철학책만 10권 이상 쓰신 분인데 불행히 학교를 은퇴하기 전에 떠난 분입니다. Royal Society of Canada 회원이고, 칼 포퍼 책을 다 보셨다는 분입니다. 도킨스 관련 논문도 썼고, 곧 이 분의 무신론에 대한 책이 나올 예정입니다. 지난 토요일엔 홉스의 레비아탄을 읽고 계시더군요. 홉스의 이 책은 대부분 성서에 대한 이야긴 줄 알고 놀랐습니다. 이분의 대표적인 책은 [Redirecting Philosophy]입니다. 도서관에 있구요. 지금도 공부만 하시는 분입니다. 그 학구열은 정말 존경합니다. Dawkinsian을 왜 쓰는지 물어 보겠습니다. 이 번주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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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
| 2009-12-14 21:00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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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이 어떤 의미로 그말을 쓰는지 여쭈어 주신다면 재밌는 토론거리가 될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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