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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노무현 경험담을 주제로 ‘정담’을 나눈 지 하루 만에 또 올린 youtube 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 분이 계시다면 우선 안심하시라고 말씀 드립니다. 그냥 잔잔한 노래와 이야기니까요.
언젠가 음주 흡연을 하면 목사 장로가 될 자격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나서 끄적거린 낙서인데, 글보다는 음악을 올려보고 싶어서 끼워 넣기 했습니다.
마냥 묵비권을 행사하시고 계신 캘거리교역자협의회 여러분의 안부도 궁금하고 해서 겸사겸사 올렸습니다.
종교가 가져온 폐해 중 심각한 것들 중 하나는 쓸데없는 기준에 의해서 사람을 차별하고 의인과 악인으로 나누는 ‘정결사상’일 것 입니다. 정결제도란 말은 들어봤어도 정결사상이란 말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이 정결사상이란 그 제도에 기생하여 자신들의 특권과 종교윤리적 우월성을 확보해 보려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십계명을 자기들 멋대로 6 백 여가지가 넘는 세분화된 율법으로 만들어 사람들을 핍박했던 옛날 유대교를 들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율법을 만든 사람들은 주로 재수 좋게 부잣집에서 태어나는 바람에 노동할 필요가 없어 시간이 아주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리 쓸데없는 개똥 같은 생각이라도 시간 무지 많고 머리는 약간 좋은데다, 할 일은 전혀 없는 작자들이 모여 앉아 쓸고 닦고 하다 보면 그럴 싸 한 철학으로 변할 수도 있는 법입니다.
그런 식으로 둔갑한 그럴 싸 한 이데올로기나 철학이 한 시대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여넘기기도 하고 옥죄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이게 인문학이 가지고 있는 어두운 면일 수도 있습니다. 유대교의 정결제도 역시 당시 인문 종교학이 낳은 어둠의 자식들 중 하나입니다.
많은 알버타 교민들이 열심히 믿는 예수는 바로 이런 사람 잡는 개똥철학의 일종인 ‘정결사상’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그것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기생하고 있던 당시 특권세력에 대하여 목숨을 걸고 저항했던 분입니다. 그 불합리한 제도가 내포하고 있는 반인간적 사상의 본질을 간파했기 때문이겠지요.
웃기는 것은 유독 한국 교회에만 팽배해 있는 음주 흡연에 대한 금기문화란 것은 별로 그럴 싸 한 철학에 바탕을 둔 문화도 아니고, 그저 속이 좁아터진 미국 근본주의 진영 선교사들이 자기 생각을 강요한 편견에 불과한 것인데, 아직까지 대부분의 교회에서 금과옥조처럼 강요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종교가 어떤 사람의 언행에 대해 굳이 옳고 그름을 나누고 싶다면 그 기준은 좀 더 종교답고 설득력이 있어야 할 것 입니다. 예를 들면, 과연 그 사람이 정직한가, 어느 정도의 용기와 정의감을 가지고 자기 나름의 기준대로 비겁하지 않게 사는가,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면 자기 시간이나 물질을 다소 희생하고서라도 도와줘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는가, 불의한 일을 보면 자기가 좀 피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바로잡아야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는가 등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게 아니고 고작, 그 사람이 담배를 피우는가 껌을 씹는가, 안식일에 외출할 때는 5 리를 가다가 앉아있을 의자를 들고 나가는가, 지치고 힘들어 하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친구가 담배 한 대 권했을 때 ‘사탄아 물러가라’며 꽥 하고 소리를 지르는가 안 지르고 받아 피우는가, 어떤 교회에서 성찬식에 사용하는 게 와인인가 포도주스인가 따위를 가지고 교인들의 품격을 평가한다면 얼마나 괴상하고 우스운 일이겠습니까?
예수가 중학교 기숙사 사감 노릇이나 하려고 이 땅에 왔다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성서 이야기는 예수가 행한 첫 번째 기적이 술을 조달했다는 것 입니다 (요한복음 2 장 7 절-11 절). 후에 사람들이 하나님보다 예수 자신의 능력에 의존할까봐 그랬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기적에 대한 보안’을 그렇게 강조했던 예수가 그 자신의 결혼식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견이 분분한 가나의 혼인잔치 때는 그렇게 신속하고도 공개적으로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을 행한 걸로 봐서 예수 역시 ‘뭔가 좀 아는 애주가’ 아니었겠느냐는 추정도 가능하겠습니다. 뭐 제가 보지 않았으니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아니지요.
술은 제가 즐기지 않는 편이라 잘 모르겠고, 담배는 지금은 안 피우지만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피우다가 끊은 적이 있어, 끊기가 매우 고통스러운 기호품이라는 걸 잘 압니다. 저 같은 경우는 전에 소개 드린 적이 있는 ‘라운드리 사건’ 때문에 화가 나서 한 번에 끊어버렸는데, 그때 겪은 고통은 참 지독하고도 끈질긴 것이었습니다. 잘은 몰라도 아마 ‘출산의 고통’이 지금의 내 고통과 비견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다 들 정도였으니까요. (출산의 고통 이야기하니까 갑자기 라이스 전 국무장관이 생각나는군요)
제가 담배를 끊은 계기인 라운드리 사건이란 이런 겁니다.
어느 날 뜯은 담뱃갑이 주머니에 들어 있는 걸 모른 채 다른 옷들과 함께 세탁기를 돌린 것 입니다. 엉망이 된 옷가지에서 담배 피스들을 일일이 제거하고 다시 라운드리를 마치는 데 세 시간 가까이 걸렸습니다. 젖은 상태에서는 담배 피스들을 제거할 수 없어 우선 dryer에 넣고 한 시간쯤 돌려 완전히 말리기부터 해야 했습니다.
열이 머리 끝까지 뻗친 나는 카튼에 남은 담배 나머지 일곱 갑을 들고 나가 길거리에 있는 어느 홈리스(노숙자) 에게 주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다시는 내 돈으로 담배를 사지 않겠다고. 그 날부터 지금까지 6 년 이상 담배를 입에 대 본 적이 없습니다. 끊은 것 맞지요?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 “반가운 친구들과 어울릴 때 가볍게 한 잔 하고 머리 아플 때 담배 한 대 피워 무는 네 놈은 김국도 목사나 이근안 목사보다도 더 나쁜 놈이니라” 하고 계시를 하시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출산의 고통을 견디며 술 담배를 끊어본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자신 있게 다른 사림의 음주 흡연 문제를 지적하세요.
자기가 겪어 본 일이 아니라면 쉽게 이래라 저래라 할 일 아니구요. 겪어 본 일이더라도 그냥 사생활의 범주에 속하는 사소한 일이라면 언급하지 않는 게 더 좋겠죠?
술과 담배가 가져오는 사회적 비용(특히 의료분야의)이 문제라면 그 문제를 주제로 음주 흡연 문제를 지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음주 흡연 문제를 기독교인의 자질문제와 연결시키는 건 어쩐지 전혀 공감이 가지 않는군요.
별이여 사랑이여’ 오랜만에 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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