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clipboard의 글을 보면서, 몇가지 책 소개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히브리성서 (또는 구약성서)에서 가장 난해한 책이 레위기인데, 이 레위기 연구에 한 획을 그은 연구서가 나왔는데, 영국의 여성 사회인류학자 메리 더글라스의 [순수와 위험] (Purity and Danger)입니다. 더글라스의 이 책은 성서 연구는 아니고 사회구조를 인류학적으로 풀어 낸 것인데, 이후 사회학자들과 성서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더글라스의 또 다른 중요한 책으로는 [자연상징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더글라스는 이 책에서 네가지 형태의 사회를 분류하면서 각각의 사회가 갖는 상징들이 어떻게 기능하고 소통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가령, 군대라는 집단과 캘리포니아와 컴퓨터의 소프트웨어 만드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사람들의 삶의 행태는 틀리다는 것이죠. 또는 한인들의 이민사회에서 교회의 기능도 이 더글라스의 책을 통해서 분석해 낼 수 있습니다.
책 값 때문에 아직 사보지는 않았지만, 더글라스의 레위기 연구서가 흥미를 끕니다. 별로 비싸지는 않지만, 그래도 다른 책 구입에 밀려서 미뤄둔 상태입니다.
이러한 더글라스의 아이디어를 정치이념이나 체제에 적용시키고 발전시킨 책은 Barrington Moore, Jr의 [Moral Purity and Persecution in History)가 있습니다. 이 책은 프랑스 혁명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은 몇 년 전 한국에 갔을 때, 교보문고에서 샀습니다.
아래 글은 저희 교회 교우들과 나눈 내용인데, 좀 깁니다. 그러니까 이번 포스팅의 목적이 책 소객하는 것이니 아래 글은 읽어 보실 필요는 없지만, 메리 더글라스의 레위기에 대한 입장을 약간은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책보고 인용한다고 짜집기니 독창성이 없느니 하는 것은 어쩌면 섭섭한 이야깁니다. 이 세상에 순수한 아이디어는 없으니까요. 우리는 항상 누군가의 빚을 지고 삽니다. 남의 글을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은 노동이기도 하지요. 아래 글을 성서해설로 보기 보다는 인간이해를 위한 한 방식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할 것입니다. 마지막 부분은 신학적인 것이니 저와 동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전에 여기서 언급했듯이 저는 진보적인 복음주의자입니다 -아프리카 올림
누가 더 깨끗한가?
-아프리카
성경의 레위기는 구약 학자들의 골치거리였습니다. 레위기는 성경 중에서 가장 매력이 없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11장-15장이 그렇습니다. 아무리 다양하게 시도를 해도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해석을 해내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여러 해석들 중에서 학자들의 관심을 끈 것이 바로 위생 (hygiene)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레위기는 중동 사람들의 식생활과 깊이 연관되기 때문에 그것을 제대로 지키는 것은 바로 사람들의 건강에 직결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중동의 더운 날씨에 돼지고기는 쉽게 상하기 때문에 안 먹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종교적 의례가 위생과 관련되어 사람들의 건강을 지켜 주는 구실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구약에 나타난 식생활 (dietary)을 문자 그대로 지금도 따르는 기독교 종파도 있습니다. 실제로 레위기를 읽어 그대로 지키면, 그렇지 않은 것보다 전염병 같은데 덜 걸릴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그러면 왜 비슷한 생활을 하던 당시의 이방인들은 돼지 고기를 먹었을까요? 꼭 위생 때문일까요? 그런데 이것을 위생을 위한 규례로만 보거나 그 반대로 보는 것은 지나친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쪽 다 일리가 있기도 하고 일리가 없기도 합니다.
이러한 극단적 해석의 다양성에 종지부를 찍은 학자가 나타났는데, 구약 학자가 아닌 Mary Douglas라는 여성 인류학자에게서 나왔습니다. 메리 더글라스는 카톨릭 신자이자 영국 출신으로서 중앙 아프리카에서 fieldwork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녀의 책 [순수와 위험] (Purity and Danger)은 바로 인간이 왜 어떤 사물을 더럽다거나 깨끗하다고 할까? 즉 왜 사물을 분류할까 (classify) 하는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깨끗하다” 또는 “더럽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더글라스는 이 책 한 권으로 구약 성서 학계에 획을 긋습니다. 그래서 이제 레위기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더글라스를 모르는 구약성서 학자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왜 총각이 사는 집에 가면 집이 온통 돼지우리처럼 지저분하고 발 냄새로 악취가 나며, 처녀가 사는 집에 가면 방이 잘 정돈되어 분위기가 깔끔합니까?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반대의 경우도 있지요. 이 것은 여자와 남자가 깨끗하다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총각은 자기 집이 좀 너저분하기는 하지만, 돼지우리와 같지는 않고 살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친구의 자취 방에 가서 참치 김치찌개를 먹었는데, 거기에서 굵은 동태 뼈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 연유를 물어 보았더니 지난 번에 동태 찌개를 끓여 먹었는데 냄비를 씻기 싫어서 그대로 거기에다 물만 더 부어 참치 찌개를 끓였다고 합니다.
제가 친한 형의 집에 가면 서재가 완전히 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방을 들어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발견하는 한가지 사실은 그 많은 책이 빈틈없이 너무나 잘 정돈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책은 내용별로 분류를 했지만, 일단 분류된 칸의 책은 크기에 따라 차례로 가지런히 그리고 빈틈없이 꽂혀 있습니다. 게다가 책을 펼치면 그냥 손으로 그은 곳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로 반듯하게 밑줄이 깔끔하게 그어져 있습니다. 저는 그 형을 좋아하지만 책 정돈하는 방법과 줄긋는 방법은 따르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왜 이런 차이가 일어날까요? 깨끗함에 대한 차이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리고 책을 분류하는 취미도 다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어질러진 것보다는 정돈이 잘되고 질서 잡힌 것을 분명히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런 질서를 하나님께서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창세기를 보시면 세상이 혼돈에서 질서가 잡혀 가는 과정으로 나타납니다. 옛날 농부들이 경작된 땅을 질서로 보고 경작되지 않은 땅을 혼돈으로 본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이러한 혼돈이니 질서니 하는 것은 상대적이고 전체 체계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신발 자체는 더럽지 않습니다. 이 신발이 식탁 위에 올려져 있으면 더러운 것입니다. 음식이 식탁이 아닌 침대에 있으면 불쾌합니다. 옷이 옷장에 걸려 있지 않고 의자에 널려 있으면 지저분합니다. 왜 우리가 이런 것을 불결하고 지저분하다고 생각합니까? 이것은 바로 우리가 사물을 분류하는 기대치와 다르게 나타날 때 일어납니다.
이런 불쾌감은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벗어날 때 일어납니다. 더 심하게는 우리가 사물을 분류하는 것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할 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과거의 경험을 가지고 현재의 모든 것을 판단해서, 그것에 맞지 않으면 그것을 불결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반응은 우리의 습성 (habitus; 프랑스 사회학자 Pierre Bourdieu)에 맞지 않으면 그것을 무시하거나 왜곡해서 우리에게 맞추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물을 판단하는 역할 (filtering mechanism, p. 37)을 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분류나 습성에 맞지 않은 것을 다 비정상적이다라고 정죄하는데 있습니다. 옛날에는 여자가 선거권이 없었는데, 그것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다가 여성운동가들이 선거권 획득 운동을 할 때, 남성들이 이 제안을 쉽게 받아 들이지 않은 예도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물을 분류하는 것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구약성서의 레위기와 신명기의 일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는 정결 의례라는 형식을 빌려서 이런 질서 또는 분류가 가장 정교하게 드러난 책입니다. 레위기를 읽어 보시면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새 이름이나 짐승 이름이 정결법에 따라 매우 정교하게 분류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1장에 보면, 하나님이 정결하다고 하는 동물은 하늘, 땅, 바다 세 형태로 나눠집니다. 그런데 이 동물들 중에서 정결하다고 한 것은 집에서 기르는 동물입니다. 야생동물은 정결한 동물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질서의 범주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레위기에 따르면 야생동물은 하나님의 축복의 계약의 관계에 없고 인간이 기르는 가축은 인간과 더불어 하나님의 축복의 계약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렇게까지 세부적으로 분류합니다. 다리가 네 개여야 하고,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을 하는 육지 동물만 먹을 수 있고, 물고기는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어야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이런 기준이 생겼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런 분류가 당시 사람들에겐 익숙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원히 불변하는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자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팽귄이 알려졌다면 팽귄의 생김새에 익숙하지 않은 그들에겐 거의 불결한 동물로 분류되었을 것입니다. 육지와 바다 양쪽에 지내면서 날개가 있는데 날지 못하고,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습니다. 너무나 이상한 동물이지요. 레위기에 따른다면 손만 대도 하루 종일 부정타는 동물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레위기나 신명기에 나오는 이런 규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두 성경에 나오는 그대로 따라야 한다면 우리 중에 정결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게 복잡하고 많은 규례는 바로 인간의 질서를 향한 소망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완벽을 향한 추구입니다. 이런 질서를 바로 하나님께서는 축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질서를 만드신 분이고, 우리는 그 질서 속에서 살 때, 복된 삶을 누립니다. 구약의 기본 성격은 바로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런 계약관계를 실천하는 방법이 바로 이런 규례를 지켜야 한다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레위기의 수많은 규례를 지금 그대로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 다시 말하자면, 완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서를 교회에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축복의 원리에서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복의 실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실현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내어 주셨습니다. 그 원리는 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죄를 지은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반드시 죄를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지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서 스스로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르틴 루터가 발견한 율법과 복음의 문제입니다. 법으로는 우리가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복음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을 통해서 우리가 죄사함을 받아 의롭게 되었습니다 (justification).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새로운 질서입니다.
교회는 분명히 완벽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 완벽함은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레위기의 계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드신 새로운 계명,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질서입니다. 새로운 율법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질서를 우리가 추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해 주십니다. 그 축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추구해야 하는 완벽함의 추구 또는 순수의 추구는 우리의 분류에 맞지 않은 타인을 더럽다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원리 하에 그들을 포용해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안식일 날 병을 고치시면서, 즉 율법을 어기시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되물어셨던 것입니다 (눅13:11-17).
그러므로 우리 교회의 원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원리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 원리는 바로 율법과 관습을 어긴 사람들, 불결하다고 정죄당한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말을 건넨 예수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이것은 더불어 사는 정신입니다. 관용의 정신입니다. 나의 것만이 최고가 아닌 남의 것도 가치가 있다는 다원주의 정신입니다. 만일 교회가 이런 정신을 잃는다면 교회는 존재가치가 없이 사라져도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병자를 고친 일을 망각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