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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문호 이문열과 시대의 ‘일그러진’ 영웅
작성자 내사랑아프리카     게시물번호 3214 작성일 2010-10-24 10:49 조회수 1462
아래 글은 몇 년 전 알버타 저널에 썼던 저의 칼럼입니다. 글을 쓴 배경도 틀리고 또 낡았지만, 저의 이문열 선생에 대한 제 나름의 평가입니다. 그의 위대한 문학적 업적을 어떻게 짧은 글에 담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문학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그냥 독자로서 감상문을 쓴 정도입니다. 불행히도 이문열의 최근 소설은 못 읽었습니다. 안 읽은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 캐나다에 산지 10년이 넘었습니다. 더 그래서 한국 문헌을 읽을 기회를 놓쳤습니다. 


한국의 문호 이문열과 시대의 ‘일그러진’ 영웅

                                    - 아프리카
1. 이문열 문학과 분열
한국 문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문열을 모르는 사람이 드물 것이며, 그의 소설 한 두 권을 읽지 않은 사람도 흔하지 않을 것이다. 청춘의 서인 [젊은 날의 초상], 종교적 탐구와 사회적 문제를 다룬 [사람의 아들], 역사와 정치를 아이러니로 풀어헤친 [황제를 위하여], 그리고 권력의 문제를 분석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에서 보여준 유려한 문장과 소설적 구성은 이문열을 국민작가의 반열에 올려 놓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그의 문학 세계는 인간 감성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치열함을 보여 주고 있지만 그의 문학적 인식의 근저에는 한국 분단과 한국 전쟁,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분열의 정신적 외상 (trauma)이 내장되어 있다. 그러니까 그가 최근에 쏟아내는 극우 이데올리기적 발언은 이러한 심적 외상과 그의 문학적 허구가 실존적 표현으로 구체화된 형태다. 문학이란 “은유” (metaphor)란 도구를 빌어 새로운 삶의 다양함과 혁신을 추구하는 인문적 글쓰기의 한 형태라고 할 때, ‘국민작가’ 이문열이 굳이 한국의 극우 또는 보수 이데올리기를 대변하는 반동적 글씨기와 발언을 하는 것은 단순한 흥미거리일 수가 없다.

2. 한국 전쟁과 ‘배반’의 역사
인간 이문열의 개인적 삶과 정신 세계는 그의 실존적 삶의 무게가 언어적 성찰을 압도하는 형태로 표상된다. 삶과 역사가 가져다 주는 가혹함은 어느 누구도 비껴갈 수 없는 정직함과 실재 (honesty and realism)이듯, 이문열의 개인사도 예외가 아니다. 판문점, 실향민, 그리고 노쇠한 영혼들의 부르짖음, 이것은 한 개인의 비극일 뿐만 아니라 한국 민족이 감내해 온 역사의 아픔들을 드러내는 것들이다. 무엇보다도 독립된 한국의 분단과 한국 전쟁은 한국인에게 가장 아픈 역사의 기억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 기억은 배반적인 삶의 현실성으로 다가오는 것이기도 하다.

김일성과 공산 혁명은, 그의 보수적 역사관에서 볼 때, 배반의 역사로 해석된다는 것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한국 전쟁은 역사의 진보를 향한 것이며, 사회의 개혁을 지향한 것이며, 의식의 혁명을 꿈꾼 것들이었다. 누구나 평등하며, 모든 인민이 인간답게 대접받는 세상, 그 꿈의 현실이 실천되는 과정이 바로 “625”라고 하는 한국 전쟁이었다. 그런데 한국 전쟁은 역사의 배반이었다. 이문열이 보기에 공산 혁명의 논리적 귀결은 현실적으로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이었다. 이것이 낳은 충격과 비극은 세대를 넘어 사람들의 집단적 기억 (collective memory)으로 전승되는데, 극우 이데올로기와 극우 집단의 형성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역사의 산물이며, 이문열은 ‘극우’라는 자기 정체성 (identity)의 일부가 된다.

3. 이문열의 극우 이념적 진상
이문열의 정신적 충격은 한민족의 역사와 가족사의 귀결점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진보 이념은 그의 가족을 보호한 것이 아니라 해체시켜 버렸다. 좌익 운동을 한 그의 부친은 월북을 했고, 이와 같은 사실은 그의 역사 인식에 대한 보수주의적 근간을 형성한다. 다시 말해, 좌익과 우익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그의 가족의 해체는 역사의 진보와 혁신에 대한 분노와 혐오로 등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진보적이거나 혁신적인 운동은 김일성과 김정일로 전승되는 특이한 사회주의 이념과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이문열에게 있어서 역사의 진보는 자기 가족사의 해체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진보 이념은 그의 성장을 도운 것이 아니라 심리적 좌절을 촉발시켰으며, 이념적 갈등은 삶과 역사의 배반 (treachery)을 낳은 근본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모든 역사의 진보와 발전을 표상하는 단어나 말은 부정될 수 밖에 없고, 이런 부정을 통한 그의 문학적 표현과 사회적 발언은 일종의 자기를 치료하는 (healing) 과정이다.

따라서 역사의 격동과 수레바퀴 밑에서, 화산처럼 폭발했던 한국의 촛불 시위조차 그에겐 디지털 파퓰리즘의 승리로 해석된다. 한국의 극우적인 보수 이념을 대변하는 논객이 된 것은 그의 삶과 가족, 그리고 사회를 향해 부르짖는 그의 생존방식이다. 이것은 이문열의 바보 같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그의 문학이 걸어온 세계관이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의식의 외화적 형태다.

4. 이문열의 발언들은 또 다른 “말”의 형태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그는 어쩌면 자신의 상처를 문학의 언어로 숨겼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원고지를 채웠고, 그 채움의 과정에서 그에게 부과된 (inflicted) 가족사의 상처를 잊고 치료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소극적인 잊음의 노력으론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숙면을 취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상처는 잊는다고 치료되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상처와 갈등은 육체적 질병이나 상처처럼 시간이 해결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단순한 시간의 흐름으론 마음의 상처는 쉽게 치료되지 않는다. 비록 이문열이 그의 글쓰기 작업을 통해서 자신에게 부과된 가족사의 아픔을 뒤로 하고 싶었지만 치료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진보 진영의 정권은 그에게 잠재된 이념이 준 상처를 다시 일깨우는 계기가 된다. 한국을 대표하는 문인이, 한 때 그를 따랐던 문학적 추종자들로부터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은 그의 언어적 감각 (sense and sensibility)이 사라졌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그는 여전히 위대하다. 어쩌면 문학의 구루 (guru)인 그로부터 도저히 믿기지 않은 사회적 발언들은, 또는 어리석을 정도로 비문학적인 언어적 외시적 의미에 집착하는 그의 모습은 연민을 느끼게 한다. 그의 일차원적 발언, 비문학적 솔직성, 그리고 언어적 외시의미에 집착하는 모습은 자신에게 부과된 갈등을 적극적 형태로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5. 이문열, 문학, 그리고 은유
이런 이문열의 자기 정체성 (self-identity)을 위한 노력은 자신의 삶을 이루는 본질 (substance)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구성된 ‘한국인’의 한 단면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은 역사의 산물이며, 문화의 산물이며, 사회의 산물이듯, 인간 이문열은 우리와 동떨어진 그런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숨결을 살아온 같은 인간 (동류 인간)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문열에게서 느끼는 아쉬움은 인간의 정체성 형성을 고정된 하나의 실체로 보는데 있다. 그는 이런 자기 고정적 관념으로 자기를 극복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의 대 사회적 발언과 이념적 편향은 복수의 칼을 휘둘렀던 “서북청년단”을 많이 닮았다.

이문열이 이문열답기 위한 제 3의 이문열은 없을까? 자신의 문학적 작업을 극우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선전 문학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한 그의 최종적 문학적 집대성은 없을 것 같다. 왜 그런가? 문학은 모든 것을 가로지르는 것이다. 문학은 자기를 극복하는 몸부림이다. 자기를 규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문학이며, 그 때 문학은 문학답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이문열이 현재의 모습대로 나아간다면 후기 이문열의 문학 세계는 지나치게 단선적일 것이다.

후기 이문열이 사는 것은 그가 자기 이념의 항아리에서 벗어나 ‘은유적 혁신’이라는 문학의 자리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 문학적 혁신은 차가움과 뜨거움, 흑과 백, 좌와 우의 이분법을 가로지를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가능하다. 문학은 엉김과 풀어헤침의 변증법을 통해서 위대해 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어쩌면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의 외상을 치료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 때 우리 시대의 문호, 이문열의 후기 문학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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