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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용서는 하겠다. 그러나 잊지는 말자"
작성자 내사랑아프리카    지역 Calgary 게시물번호 3216 작성일 2010-10-24 20:15 조회수 2662
저 아래에서 HK5672님이 댓글을 남기셨는데, 다음의 글을 보고 마음이 심히 쓰렸습니다.  박정희의 친일행각을 젊은날의 실수로, 장준하의 일본군탈출을 살기 위한 수단으로 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확 변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일관성은 있는 편입니다.  우리는 장준하의 삶에서 일관성을 보듯이 박정희의 삶에도 나름대로 일관성이 있습니다. 역사적 해석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는 아닙니다. 우리가 박정희와 장준하의 삶을 평가하거나 그들의 삶을 재구성한다고 할 때, 그들이 산 시대적 sequence를 most plausible explanation으로 해야 합니다.   밑의 인용은 HK님의 글입니다. http://www.cndreams.com/bbs/zboard.php?no=3203&id=free&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일제시대 2차 대전 당시 젊은이들이 전쟁에 총알받이로 끌려 가는게 의무였고 사지에 끌려가서 개죽음 당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보는게 인간의 본능이었겠지요 그당시 장준하씨 같이 학도병들이 전장을 이탈해서 독립군 광복군을 찾아 간 사람들이 죽음을 피해서 도주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격동하고 미래를 예측을 하기 어려웠던 그당시의 젊은이들의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수 있겠습니까 박정희가 일본군이 패망하는것을 확인한 후에 광복군을 찾아갔다고 기회주의자라는 오명을 붙여 자신의 죽음까지 불사하며 물고 늘어졌던 장준하씨가 옳은 행동이었는지는 의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가 있고 무심코 다가선 줄이 잘못되어 인생이 뒤틀려 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중도에서 잘못선 줄을 이탈했다고 그사람의 평생을 평가 해서는 안되겠지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침 프레시안에 장준하 선생의 자제의 인터뷰가 나와서 링크로 답니다. 인터뷰 내용이 길어서 퍼오기도 힘들군요. 글보고 길다고 불평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글을 쓰거나 인터뷰를 풀어서 정리하자면 시간이 엄청나게 걸립니다. 특히 녹취 풀면 더 걸리죠. 그래서 점 길지만 꼭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 분의 자제이니 일방적인 내용일 수 있으나 우리가 박정희에 대해서는 많이 아니 장준하에 대한 증언도 들을 필요가 있겠죠? 이 링크 보고 결론 내리자는 것이 아니라 자료로서 참고할 만하다는 것입니다. 링크 두개입니다. 연속글이니 다 읽어야 합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01024153243&section=01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01024153243&Section=01&page=1 고 장준하 선생은 일본군에 학도병으로 탈출했다가 광복군에 들어가 미국 CIA의 지도를 받아 식민지가 된 조선반도에 침투할 예정이었는데, 해방이 되어 그 기회는 잃었습니다. 귀국후 [사상계]를 만들어 시대의 양심의 소리를 낸 분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의문사를 당하고 맙니다. * 사족으로 정치 발언하자면, 저는 옛날에는 박근혜씨를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개인적인 퍼스넬러티는 이명박씨보다 훨씬 위라는 생각이 많이 드는군요. 심지어는 이 분의 친박연대같은 오합지졸이 아니라면 이 분이 대통령이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정치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닌 조직이니 산너머 산이죠. 언젠가 박근혜님이 장준하 선생의 미망인을 만나는 동영상을 보고 마음이 훈훈했었습니다. 역사적 진실규명도 중요하며 화해도 동반되어야 하니까요. http://www.cndreams.com/bbs/zboard.php?no=2184&id=free&page=1&sn1=&divpage=1&sn=on&ss=on&sc=on&keyword=박근혜&select_arrange=headnum&desc=a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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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  |  2010-10-24 20:49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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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 링크 감사합니다. 죽 읽고 자야겠네요.

저는 박근혜님과 정치/이념적 방식은 다르겠지만, 한나당내에서는 가장 착하고 합리적인 분이 아닌가 저두 그렇게 추측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모 잘알고 하는 소리는 아니구 신문에서 보여지는 그분의 행동으로 비추어서 보면 말이죠 (적어도 그 일관성... 거짓말도 즐겨하는거 같지 않구). 앞으로 이명박캠프에서 미는 스펙좋은 어떤 친구들보다도 훨 낳지 않을까 조심스런 추측을 저 혼자 심심할때 해본적이 있었습니다.

이명박 그리고 조지부쉬 대통령을 경험한 후, 저의 대통령 기준은 좀 많이 낮아진건 사실입니다.

내사랑아프리카  |  2010-10-24 21:03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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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당의 대통령 후보로 박근혜님이 나오길 바라고 있습니다. 한나라당이라는 생각하기도 끔찍한 당에서 이런 분이 있다는 것이 다행입니다. 나경원 의원보다 훨 나은 것같구요. 대통령 경선 끝나고 지금까지 이명박이 박근혜님께 하는 짓보고 사람같이 보이지 않더군요. 이런 치사 덩어리가 대통령되면 나라 말아 먹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예언 적중. 저야 물론 야당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 정권이 바뀌길 바라지만요. 마지막 말씀 많이 공감합니다.

clipboard  |  2010-10-24 22:49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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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댓글은 제가 다른 곳에서 sarnia 라는 이름으로 달았고 내용이 거의 같기 때문에 이 점부터 밝혀야 할 것 같습니다. 제 글이 뒤로 밀려나 있어서 그만 둘까 하다가 마침 아프리카 님이 제 글을 링크하신 걸 보고 여기다 제 정리 댓글을 답니다. 제 정리 댓글 뒤에는 역시 언급하신 hk 님과 하던 이야기 잠깐 더 하겠습니다.

박정희 논쟁은 개별적 존재에 대한 공과 평가가 아니라 대한민국 진보-보수진영간의 이념대립의 산물로 봐야 할 것 입니다. 모든 정치적 리더들에게는 공도 있고 과도 있다는 일반론으로 매듭지어 질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는 말 이지요. 보수진영은 자신들이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문화권력을 되찾기 위해 박정희 논쟁을 촉발시켰습니다. 1960 년대에 경제인프라가 구축된 것이 그의 집권시기에 맞아떨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1949 년까지도 한반도를 방위선 안에 넣느냐 마느냐로 논쟁을 벌이던 미 국방성과 국무성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동아시아의 반공방어선을 확고히 구축하기 위해 일본 외에도 방어선 최전방에 있는 남한을 공업국가로 만드는 플랜을 짜게 되는데 느닷없는 군사쿠데타로 인해 그 담당자가 바뀐 것뿐 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박정희 근사정권 아니었어도 60 년대의 빠른 공업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을 거라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에 있어서 그런 가정은 무의미할 뿐 만 아니라 오만한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보수진영이 박정희 정권을 ‘대한민국 정통성’과 연결시켜 이 정권의 윤리적 가치까지 부각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반발이 심각한 것 입니다. 헌정을 유린하고 인권을 탄압한 정권이 한 국가공동체의 윤리적 가치까지 담보할 수는 없는 것 입니다. 본문에서는 1930 년대 나치정권 예를 들었지만 세계 어느 나라도 일정한 공이 있다고 해서 민주주의와 보편적 인륜의 본질적 가치를 훼손한 정치집단을 국가 정통성 모델링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이거야 말로 넌센스라고 생각합니다. 칠레 사람들이 피노체트 정권을 자랑하지 않고 필리핀 사람들이 마르코스 정권을 자랑하지 않으며 니카라구아 사람들이 소모사 정권을 내세우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겠지요.

제가 이 본문을 쓰면서 잘못한 게 한 가지 있습니다. 엔카를 집어넣고 사생활 문제를 등장시켜 불필요한 이죽거림으로 보이게 한 것이 그 예 입니다. 그 부분에 대한 비판은 수용하겠습니다. 이게 정식으로 박정희 시대를 비판한 글이 아니고 추모사라는 일종의 문학적 장르를 빌렸기 때문에 제가 긴장이 좀 풀어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마치 1994 년 모니카 르윈스키를 이용해 클린턴을 궁지로 몰아넣으려던 깅그리치 일당 같은 짓을 제가 저지르고 말았네요.

저는 공인의 사생활은 공무에 관련된 평가와 연결시킬 수 없다는 원칙을 지지합니다.

다만 일단 올린 글이므로 노래를 빼거나 하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박근혜 씨에 대해 지금까지 별로 관심이 없어 놔서 그런지 그냥 인상이 좋다는 정도 외에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말씀을 하시니 한 번 관심 있게 지켜 보겠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아직 대한민국의 영향력 있는 정치인인 그가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를 더 많이 닯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건 hk7256 님과 하던 이야기 계속입니다.

차지철의 월권은 그를 중정견제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박정희의 묵인과 비호 하에 가능했던 것이지 그가 2 인자를 꿈꾸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5 16 때부터 박정희를 지근에서 보좌하던 그가 2 인자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처참한 결말을 맞게 됐는지 똑똑하게 기억할 것이고 분리지배공작의 귀재인 박정희 아래서 2 인자 행세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도 잘 알 것 입니다. 그는 그저 박정희의 절대적 비호아래 각하가 곧 영원한 국가라는 철학아래 그런 행동을 했던 것 입니다.

hk 님은 박정희 현대사를 잘 아시는 분 같은데 그렇다면 빅정희가 60 년대 초반부터 어떤 식으로 권력관리를 해 왔는지도 잘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조카사위 김종필을 어떻게 이용하여 김재춘 박치옥 등을 제거했는지 또 김형욱을 어떨게 이용하여 김종필과 김용태 그리고 그들의 조직인 복지회를 박살냈는지 박종규 경호실과 이후락 정보부를 어떤 식으로 이간질해서 서로 충성경쟁을 벌이게 했는지, 강창성 보안사를 어떻게 활용해서 그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윤필용과 육사 11 기 그룹을 견제했는지 박정희의 정치공작사를 아신다면 감히 ‘차지철의 농간에 박정희의 눈이 어두워졌다’는 말이 얼마나 거꾸로 된 말인지 이해할 수 있겠지요. 전두환 하나회가 차지철의 수하에 있었다고요? ㅎㅎ 전두환 하나회가 박종규의 후견을 받은 적은 있습니다. 전두환 노태우가 차지철 경호실에서 잠시 작전차장보를 한 적은 있지만 그의 조직적인 휘하는 아니었지요. 오히려 1979 년 1 월 박정희가 1 사단장으로 있던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한 진짜 이유는 군에 대한 경호실의 입김과 발호를 어느 정도 견제하기 위해 다소 파격적인 인사를 한 것 입니다. 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전두환으로부터 나중에 체포 당했던 정승화 씨가 고백한 것이고 (조갑제 저 정승화는 말한다) 대통령의 그런 의중이 담긴 인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옛날 이야기 길게 할 건 없고, 암튼 “정희는 훌륭한 분인데 주변의 나쁜 놈들 때문에 말년을 망쳤다” 이런 이야기는 그만 하자는 거지요.

실례 많았습니다.

clipboard  |  2010-10-24 23:15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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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써 놓고도 좀 이상해서 검색해 보니 르윈스키 사건이 1994 년 이 아니라 1998 년 이네요.

운영자 님, 댓글 수정기능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수정을 하려면 전부 지워야 하는데 올린 지 오래 된 글은 그럴 수도 없고요.

내사랑아프리카  |  2010-10-25 00:01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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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립보드님, 글 잘 읽었습니다. 제가 박근혜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아실 것이고, 이 분의 정치적 성향과는 상관없이 인성은 좋으신 분인 것같다는 것인데, 정치는 개인의 인성으로 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이명박 보니 그것이 절절히 느껴져서 상대적 호감이라는 것이 큽니다. 그분에게.

제가 절절히 시간내서 찾아 보기는 싫어서 그런데, 클립보드님께서 잘 지적하셨듯이 박정희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그가 착안한 것은 아니고 이미 전 정권이 입안된 것을 박정희가 이용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없겠지만 한국에 민주화가 빨리 왔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여전히 남습니다.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민주주의라는 말을 내뱉아서 이제 \"민주주의\"라는 말이 싸구려라는 말처럼 들리는 시대가 되었지만, 25년 전으로 돌아가기만 해도 민주주의의 이상 (democratic ideal)이 꿈같이 느껴지던 때였습니다. 즉 민주주의라는 말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고난과 눈물이 고여있는 것이겠죠. 거기에는 장준하 선생의 희생도 묻어납니다. 우리가 그 분들의 희생을 잊지 않을 때, 민주주의란 말이 현실적으로 가치있게 들릴 것입니다.

* 댓글 수정을 하려면 아마도 다른 게시판을 인스톨해서 만들어야 하는데 기술적으로 어려울 것같은 생각도 듭니다. 그러면 기존의 것을 새 게시판으로 옮겨 와야 하든지 지난 번처럼 완전히 새로 업데이트해야 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잘 모르지만요.

hk5672  |  2010-10-25 06:18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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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지철이 주관하던 경호실 조례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모두가 그 규모에
놀랐다고 합니다 국군의 날을 방불케하는 그 분위기에서 도대체 이나라 대통령이 누군가 의심이 갈 정도 였다는군요 그자리에서 차지철이 마치 대통령 된것같은 행세를 했다는겁니다
육여사가 돌아가신 후부터 급격하게 판단력이 흐려진 박정희를 주색에 빠트리고....,, 돌아가시기 2~3년 전 부터는 강남의 아파트촌에 숨어있던 비밀요정 근처에서도 술에 취해 흐트러진 박정희가 자주 목격되었습니다 중정 안가에서 벌린 술자리 뿐이이 아니었던 겁니다 최불암의 부인인 김민자가 운영하던 정치인들을 위한 비밀요정에는 탈랜트, 배우, 탈랜트 지망생들이 상주 했다고 합니다 제 의견은 박정희는 올바른 사람인데 차지철이 농간을했다가 아니라 박정희는 이미 한나라의 대통령직을 맡을수 없을만큼 폐인이 되어 있었다는겁니다
어떤일에든지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봐야합니다
아래글은 퍼온 글입니다 참고하시기바랍니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관계는 단순한 직책상의 상하관계 이상이었다. 이들은 어버이와 자식의 관계처럼 친밀했는데, 심지어 전두환은 박정희의 양자(養子)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1961년 5.16 직후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전두환과 하나회 장교들은 박정희에게 절대적 충성을 바쳤고, 그 대가로 박정희는 전두환과 하나회 장교들에게 진급과 보직상의 특혜를 베풀었다.

1973년 윤필용 사건으로 중간보스들이 몰락함으로써 박정희와 전두환의 정치적 거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그림 3-3>과 같이 \"박정희-윤필용-전두환\"으로 이어지던 권력 피라미드 구조는 이 사건 이후 \"박정희-차지철-전두환\"의 구조로 변화되었다. 전두환은 이전까지 자신을 보호하고 후원해 주던 윤필용이 제거되자 새로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임명된 차지철(車智澈)을 통해 보호와 후원을 받게 되었다.

1976년 전두환은 차지철의 추천으로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근무하게 되었다. 전두환과 차지철은 서로 밀고 당겨 주는 호혜적 관계로 결합되었다. 전두환은 차지철을 통해 각종 진급과 보직에서 특혜를 받을 수 있었고, 차지철은 전두환을 통해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을 장악, 통제할 수 있었다. 전두환은 차지철을 만나 인사청탁을 자주 했는데, 동생 전경환(全敬煥)이 경호처 경호관으로 발탁된 것도 전두환의 인사청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두환은 차지철에게 \"제 동생 경환이가 내근 부서인 정보처에 있는데, 충성심이 강하고 유도도 잘 하니 경호원을 시키면 잘 할 겁니다. 선처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차지철은 각종 인사청탁을 들어 주는 대가로 전두환을 통해 하나회 인맥과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을 통제하려 하였다.

\"차실장은 하나회 회장이었던 전두환 작전차장보가 동기나 군 후배들을 소개하면 이들을 격려하는 것을 즐겼어요. 주로 별을 달고 야전지휘관으로 나가는 후배들이 인사차 경호실로 전씨를 찾아오면, 전씨는 이들을 실장방으로 데리고 가 소개시켰죠. 차실장은 이들에게 금일봉과 함께 \'경호실 증정\'이라고 새겨진 지휘봉을 주곤 했는데, 군 후배들은 이를 더없는 영광으로 여겼죠.\"

1960년대-70년대 초 윤필용이 하나회 후배들을 후원해 준 것처럼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차지철이 하나회 인맥을 이끌어 주고 지원하였다. 마찬가지로 전두환은 윤필용에게 바치던 충성과 지지를 차지철에게 바쳤다.

그러나 1970년대말에 들어와 차지철과 전두환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차지철이 권력의 2인자로서 부통령 행세를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차지철을 견제하기 위해 전두환을 지지, 지원하였다. 하나회 세력이 커지자 차지철도 전두환 그룹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차지철과 전두환의 관계는 협조관계에서 경쟁관계로 변화되었다. 전두환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있을 때 내가 계속 나가겠다고 했어요. 차지철과 내가 사이가 나빴어... 차지철이가 여러 가지 일을 비뚤어지게 해. 중령으로 예편하고 국회의원을 한 사람인데, 경호실장 하면서 꼭 국회의원을 상대하고 높은 장군을 경호실에다 데려다 놓아. 차지철이가 나한테 경호실장 자리 뺏길까 봐 굉장히 신경쓰는 것 같애. 내가 내보내 달라고 했어.\"

결국 전두환은 1978년 대통령 경호실을 떠나 사단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경호실 작전차장보 자리를 떠나면서 자신의 후임으로 노태우를 추천했다.

1979년 3월 전두환은 박정희의 특별 배려로 보안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그는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 김계원(金桂元) 비서실장과 함께 박정희를 둘러싼 핵심 측근 네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전두환의 부상과 함께 그가 키워온 사조직 하나회의 세력도 커졌다. 육군본부 특명검열단에 있던 허화평(許和平) 대령이 보안사 비서실장에, 허삼수(許三守) 수도군단 보안부대장이 인사처장에 임명되는 등 많은 하나회 후배들이 보안사로 진출하여 요직을 차지하였다.

clipboard  |  2010-10-25 10:47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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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수정할 게 또 하나 있는데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에 임명된 것은 1979 년 1 월 이 아니라 그 해 3 월 이 맞습니다. 1 군 사령관이던 정승화 대장이 육군참모총장으로 보임된 게 그 해 2 월 1 일 이지만 박정희 는 국방장관 노재현을 통해 1 월 30 일 사전통보를 했지요. 그 두 사람의 보임 월을 혼동해 3 월을 1 월로 했군요.

보안사령관 임명시 전두환에 대한 박정희의 배려란 차지철을 따로 견제할 필요가 있어서였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정보라인을 통해 들어오는 치지철의 행동을 박정희 나름대로 따라 모니터링하고 있었거든요. 다른 정보라인이란 전두환 전의 진종채 보안사와 김정섭 국내담당라인 등 입니다. 당시 중정 국내담당 (제 2 ) 차장보인 김정섭은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박정희는 김재규보다도 김정섭과 이종찬 현홍주 등 뛰어난 실무책임자들을 의견을 많이 경청했는데 이 과정에서 권력의 위기를 감지했던 것 같습니다.

경호실 직제 확대는 박정희의 재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 입니다. 중장급으로 차장을 보임한 것이나 민간인인 경호실장이 수도경비사령관을 지휘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모두 대통령령을 근거로 한 것이니까요.

박정희는 사람보는 눈이 뛰어났다고 하지요. 그의 눈에 차지철은 진짜 2 인자를 꿈꾸던 김종필 류의 인간형이 아니라 박종규와 같은 똘만이 맨탈리티를 가진 인간형으로 보았을 겁니다. 그래서 안심하고 그 말도 안되는 월권행위를 묵인햇던 것이지요. 그런 박정희도 1979 년 초가 되면 말씀드렸다시피 다시 차지철의 대항마로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배치합니다.

18 년 장기집권......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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