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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유튜브는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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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에 간 제 조카’ 이야기를 하다가 나온 주제라 그 창에 댓글로 달까 했는데, 전혀 다른 사안이므로 새 창을 엽니다.
제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가장 어이없어 하는 순간이 있다면 박정희를 ‘위대한 지도자’라는 말과 등치 시키는 발언을 누군가로부터 듣는 순간일 것 입니다.
가뜩이나 중세기적 권위주의가 물씬 풍기는 ‘지도자’라는 명사에 ‘위대한’ 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면서까지 모델링으로 삼아 마땅한 인물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그렇게 흔한 것 같지 않지만, 특히 정치적 과오 이전에 그 개인의 사고와 행동 윤리평점이 낙제 수준에 가까운 정치적 인물에 이런 가당찮은 찬양 수식어를 가져다 붙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박정희 논쟁이 느닷없이 불거진 것은 참여정부 이후 대한민국 진보-보수진영간의 이념대립의 산물로 봐야 할 것 입니다. 이미 정치적 파산선고를 받은 박정희 군사독재로부터 뒤늦게 본받을 점이 새로 발견됐기 때문에 나온 논쟁이 아니라, 2002 년 겨울 두 번에 걸친 대선패배로 정신적 공황상태에 돌입한 대한민국 수구세력이 자신들이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문화권력이라도 우선 되찾기 위해 그 도구삼아 난데없이 박정희 논쟁을 촉발시켰기 때문에 이 지겨운 이야기가 시작된 것 입니다.
1960 년대에 경제인프라가 구축된 것이 그의 집권시기와 맞아떨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1949 년까지도 한반도를 방위선 안에 넣느냐 마느냐로 논쟁을 벌이던 미 국방성과 국무성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동아시아의 반공방어선을 확고히 구축하기 위해 일본 외에도 방어선 최전방에 있는 남한을 공업국가로 만드는 플랜을 짜게 되는데 1961 년 5 월 16 일 새벽 발생한 군사쿠데타로 인해 그 담당자가 바뀐 것뿐 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박정희 군사정권 아니었어도 60 년대의 빠른 공업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을 거라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에 있어서 그런 가정은 무의미할 뿐 만 아니라 오만한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보수진영이 박정희 정권을 ‘대한민국 정통성’과 연결시켜 이 정권의 윤리적 가치까지 미화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그 문제가 심각하다는 점 입니다. 박정희 이야기 나올 때마다 하는 말이지만, 헌정을 유린하고 인권을 탄압한 정권이 한 국가공동체의 윤리적 가치까지 담보할 수는 없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도 일정한 공이 있다고 해서 민주주의와 보편적 인륜의 본질적 가치를 훼손한 정치집단을 국가 정통성 모델링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이거야 말로 넌센스죠. 왜 칠레 사람들이 피노체트 정권을 자랑하지 않고 필리핀 사람들이 마르코스 정권을 자랑하지 않으며 니카라구아 사람들이 소모사 정권을 내세우지 않는 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독일에서 “히틀러는 위대한 지도자였는데, 다만 그가 유대인을 학살한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라는 발언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독일 현행법상 기소되어 재판을 받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모르죠. 홀로코스트를 부정하진 않았으니 기소되는 대신 수사관으로부터 훈계나 몇 마디 듣고 풀려날지도요. 그러나 그런 발언을 한 사람은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을 것 입니다.
오늘은 그의 정치적 과오보다는 개인적인 품격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 볼까요. 공인이니만큼 이런 평가도 중요한 것 입니다.
박정희는 대중 정치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개인적 기본윤리부터 어이가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부인 (김호남)과 딸 (박재옥)이 엄연히 있는데도 그 사실을 숨기고 여대생을 유혹해 결혼을 하자며 동거생활을 했는가 하면, 이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충북 옥천의 거부 육종관의 딸 육영수와 결혼을 하기도 했습니다. 박정희는 육군본부 정보국에 복귀해서 근무할 당시 데리고 있던 소위 송재천의 이종사촌이 예쁠 뿐만 아니라 이모부 (송재천의 이모 이경령의 남편인 육종관)이 큰 부자라는 말에 송재천을 들쑤셔 이 결혼을 성사시킨 것 입니다. 비록 나이는 많지만 그래도 총각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처자식이 있는 작자였다는 걸 알게 된 장인 육종관은 당연히 노발대발했고 사위가 대통령이 된 다음에도 1965 년 숨을 거둘 때 까지 일체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는 일화는 유명한 것 입니다.
유명한 친일파 시인 중에 박목월이라는 작자가 있는데, 군사독재에 아부를 하느라고 육영수가 피살되자마자 모든 사실들을 개발새발 미화해서 엮어낸 '육영수 여사'라는 책에서조차도 이런 사실들을 추론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1961 년 북한은 박정희가 어린 시절 따르고 존경하던 형 박상희의 친구 황태성을 특사로 내려 보낸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김종필을 보내 대화를 시도하더니 미국이 이를 눈치채고 박정희의 좌익경력과 연계해 의심하기 시작하자 엄연한 대남특사인 형 친구를 간첩으로 몰아 죽여버리고 맙니다. 그가 얼마나 치사하고도 몰인정한 인간이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지요.
1948 년과 1949 년에 걸쳐 군부내의 좌익조직원들은 물론 좌익조직원으로 의심 받던 사람들까지 모조리 체포되어 수 백 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데, 한마디로 박정희가 작성해 준 리스트에 근거해 백선엽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장과 수사책임자 김창룡이 체포해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박정희 스스로가 조직을 배신하면서 만든 이 ‘박정희 리스트’에는 정통 조직원들뿐 아니라 사감과 통밥을 동원해 죽일 인원수를 최대한 늘린 흔적이 역력합니다.
이렇게 의리도 없는데다 특이한 사생활 윤리관까지 가진 박정희 라는 인물은 대통령이 된 다음에도 말썽이 끊이지 않아 1960 년 대 말에는 정인숙이라는 20 대 초반의 여자를 사이에 두고 대통령, 국무총리, 경호실장, 위싱턴 한인회장 등이 서로 ‘말뚝동서’를 맺어오다, 아직도 그 배후가 묘연한 치정살인극을 벌이는가 하면, 1974 년 8 월 15 일 그의 와이프가 8.15 기념식장에서 의문의 비명횡사를 한 다음에는 아예 중앙정보부에 의전과라는 여자를 전문으로 수집하는 미인사냥부서를 창설하고 여대생과 모델, 유명탤런트들을 일주일에 서 너 번씩이나 불러들여 주색잡기 파티를 벌여오다 하필 바로 그 파티 현장에서 총을 맞고 죽는 바람에 세계 망신을 초래한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위대한 지도자?
아이들에게 언급하기도 창피한 사람입니다.
추신: 다만 지금 나오는 이 노래를 부른 가수가 술 마시다 말고 서부활극을 벌인 그 현장에 있었는데, 그 가수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의 마지막 순간만큼은 차분했다고 합니다. “나는 괜찮아” 라며 자네들이야말로 빨리 피하게 하는 뉘앙스가 풍기는 눈짓을 보냈다고 하는군요.
박정희를 찬양하는 사람들은 이 가수의 증언까지 끄집어 내 박정희는 역시 위대했다고 이야기하는 모양이지만,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는 그 순간만큼은 고재봉이나 김대두 같은 인물들도 경건하고 차분했을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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