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는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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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간으로 오늘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62 주년이 되는 날 입니다. 다들 그렇게 알고 있는 이유는 1950 년 6 월 25 일에 이 전쟁이 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맞는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틀린 말 이기도 합니다. 오늘 포털사이트 뉴스를 보니까 대한민국 대학생의 절반이 6. 25 발발연도를 모른다고 탄식을 연발하던데, 중요한 것은 그런 쓸데없는 탄식을 연발하는 게 아니라 이 전쟁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부터 '증오를 유발한 오해를 걷어내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전쟁은 단지 대규모 군사적 충돌이 벌어진 날로 그 기원을 삼기에는 그 배경이 넓고도 깊습니다. 따라서 이 전쟁의 본질자체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대한민국 기성세대가 발발 연도 따위를 외우지 못한다고 대학생들을 윽박지르는 것은 마치 똥묻은 개가 겨묻은 개를 나무라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짓 입니다.
이 전쟁에 대해 비교적 정확한 진상이 알려지기 전,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6 25 전쟁은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북한의 지도부가 일으킨 전쟁”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비슷한 시기에 해외의 언론과 수정주의 학자들은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장악 음모의 결과로 벌어진 산물로 한국전쟁을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스탈린-마오 문서가 공개되자 새로운 해석이 등장했습니다, 김일성 수상과 박헌영 부수상 등 당시의 북한 지도부가 어느 누구의 강요도 받지 않은 채 자주적으로 이 전쟁을 주도하고 기획했을 압도적인 가능성이 제기된 것 입니다. 이 문서들이 조작된 것이 아니라면, 당시 북한의 지도부는 스탈린의 사주를 받기는 커녕 미국의 눈치를 보는 소련 지도부를 오히려 설득했다고 보는 편이 맞겠습니다. 소련을 중심으로 한 코민테른체제에서 당시의 북한 지도부가 비교적 할 말 다 하며 도움을 요청했다는 사실이 조금 인상적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 엄청난 사건에 대한 진실을 둘러싼 공방이 백가쟁명식으로 다양한 것만 봐도,
또 그 해석의 줄기와 뿌리조차 이처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만 봐도,
고정관념과 <전해지는 상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봉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인가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건에 대해 판단을 하기 전에 우선 팩트들을 검토하고 그 의미들을 찾아내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중요한 팩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전면전 발발 2 년 전인 1948 년 5 월 10 일에는 이승만에 의해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가 실시되고, 석 달 후인 그 해 8 월 15 일에는 남한만의 분단 단독정부가 출범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당시 남북한 대다수 국민-인민들의 생각은 어땠을까요?
우리가 범하기 쉬운 오류는 ‘어떤 시기’의 역사적 사건에 대해 현재-자신의 시간과 공간적 가치를 기준으로 판단을 내리는 것 입니다. 우리는 항상 사건이 발생한 그 시대의 조류와 판단기준을 먼저 찾을 줄 아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당시 해방된 조선에서 분단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민족적 사변’이었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출범이란 반역적 폭거로 취급될만큼 황당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단독정부 출범이 그 때 상식으로는 반역적 폭거였으니, 지금의 상식으로도 여전히 잘못된 사건이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현재의 남코리아와 북코리아의 여러가지 상황은 '출발의 정통성 여부'만으로는 어느 한쪽을 무조건 비난하거나 반대로 무조건 변명할 수 없다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만 당시 이승만 정부에 대한 남북한 양쪽 주민 절대다수의 반감이 상당했다는 분명한 사실을 인정하고, 이런 정세가 전쟁을 유발한 가장 핵심적인 배경 중 하나였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함입니다.
대한민국의 나이드신 어른들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오늘은 이승만에 대해 긴 이야기를 할 마음은 없고, 다만 그의 사상과 윤리의식을 반영하는 몇 가지 중요한 사건만 언급하겠습니다.
그를 일약 유명인사로 만든 두 가지 사건 중 한가지는, 임시정부 대통령 타이틀을 달고 하와이와 미국의 워싱턴에서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당시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조선을 위임 통치해 주십사’ 하는 굴욕적인 위임통치청원서를 보내 재미교포들과 고국의 독립운동가들을 격분시킨 일이고, 또 다른 한 가지는 위임통치청원사건 때문에 임시정부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자 재미교포들로부터 걷은 독립운동 지원금 중 상당부분을 상하이로 보내지 않고 중간에 가로챈 사건 입니다.
이 사건으로 이승만은 공금을 횡령한 도둑놈으로 몰려 1925 년 3 월 의정원으로부터 탄핵을 받고 대통령직에서 쫓겨남으로써 임시정부와의 관계를 청산합니다. 따라서 그는 항일운동의 세 본류 중 한 축을 이루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 입니다. 이승만은 해방조선에 어떻게 입국했을까요? 이승만은 미군 정보기관인 OSS 첩자 자격으로 그의 직속상관인 OSS 부책임자 밀라드 굳펠로우를 따라 한국으로 들어왔읍니다. 미국의 일개 정보기관원의 신분으로 고국 땅을 밟은 것 입니다.
이런 사람이 미국의 후원을 받아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친일관료들을 긁어모아 단독정부를 수립했던 이 시기에 한반도 주변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을까요?
1949 년 9 월, 중국대륙에서는 마오 진영이 내전에서 승리하고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됐습니다. 같은 해 소련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면서 미국과의 군사적 비대칭구조가 해소됐습니다.
같은 해 미국 국무장관 에치슨이 공개적으로 일종의 한반도 포기각서를 발표했습니다.
미국과 사회주의 진영간의 파워밸런스가 변화한 이 중차대한 전환국면에서 왜 미국은 한반도를 포기한다는 선언을 했을까요?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트루만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에게는 한국에 대해 조언해 줄만한 전문가가 전혀 없었습니다. 에치슨 라인 선언은 북한의 남침유도를 하기 위한 교란작전이었다기보다는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에 대한 미국의 무지에서 비롯된 외교적 삽질이었다고 보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다른 한편 에치슨 라인 선언은 한반도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미국 국무부와 태평양 방어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할 것을 주장해 온 합동참모본부를 비롯한 미국 군부의 논쟁에서 국무부가 패배했기 때문에 나온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한반도 정책에서 미국이 실패를 거듭했던 반면, 소련의 스탈린은 북한주재 소련대사 슈티코프 같은 주도면밀한 조선전문가들로 구성된 전략팀으로부터 조선역사와 정세에 대한 상세한 보고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당시 북한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앞서 말씀드린 항일 투쟁의 세 본류 중 남한에서는 어느 한 본류도 새 정부에 참여하지 못한 채, 암살과 투옥을 당하면서 철저하게 배척받은 데 반해, 북한에서는 그 세 본류 중 두 본류인 동북항일연군과 중국의용군 출신들이 대거 들어와 온 나라가 새시대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새 시대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제 표현이 생경하게 들리는 분들도 계실 것 같아 잠깐 말을 끓고 설명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어느 누구도 이 글을 읽으면서 북한의 과거와 현재를 하나의 동일선상에서 나이브하게 혼동하는 것도 원치 않지만, 미국에게 나라를 팔아먹는 것도 불사하는 쓸개빠진 종미(從美)주의자들의 광기 가득 찬 마녀사냥은 더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 북한은 분위기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남한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희망적이었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은 사실로 받아들이는 게 올바른 자세 아닐까요?
어쨌든......
그들은 그들과 함께 대륙을 누볐던 옛 동지들이 중국 전체를 석권한 사실에 매우 고무되어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북한은 물론이고 남한의 지식인과 노동자 농민 절대다수가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이승만과 한 줌도 안되는 전직 제국일본 관료들이 나타나 나라를 반토막낸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 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남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한마디로 말도 안되는 ‘카오스’ 그 자체로 비추어 졌을 것 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남한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기 보다는 시대의 대세에 완전히 역행하는 반동적 반란세력을 ‘진압’ 한다는 개념으로서의 군사행동의 유혹을 강하게 받았을 것 같습니다.
북한 정부는 군사적 조치를 수행하기 전에 '8 월에 전국 총선거를 다시 치루자'는 마지막 제안을 하기 위해 세 명의 특사를 서울에 파견했습니다. 군사작전 14 일 전인 1950 년 6 월 11 일 이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이 세 명의 북한 특사를 불문곡직 체포했습니다. 북한은 특사체포를 선전포고로 받아들였습니다.
마침내 북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는 조선인민군 총사령부에 군사작전을 시작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이 지시에 따라 조선인민군총사령부는 전군에 이른바 ‘폭풍’ 이라는 암호의 작전명령을 하달했습니다.
D-Day H-Hour는 1950 년 6 월 25 일 오전 04 시로 정해졌습니다. 암호 폭풍 작전명령이 하달되자마자 38선에 도열해 있던 10 개 보병사단과 1 개 전차사단 1 개 전투비행사단이 일제히 남쪽으로 병력을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아마도 전쟁이 아니라 '진압작전'을 수행한다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북 코리아 군대의 군사작전이 시작되자 예상치 않게도 미국역시 신속한 군사개입을 시작했는데, 이승만은 유엔군의 모자를 쓰고 한반도에 들어 온 미군사령관에게 군사작전권과 관할권을 모조리 넘겨주었습니다. 북 코리아군이 선제공격을 시작한지 17 일 만인 7 월 12 일 임시수도 대전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날 이승만 정부와 미군사령관간에 맺은 군사작전권 이양협정을 대전협정이라고 부릅니다.
공식적으로 7 월 12 일부터 북한과 미국간의 이른바 진짜 ‘전쟁’이 시작됐고, 바로 이 날부터 거의 대등한 무력을 갖춘 쌍방간의 무자비한 대량 살육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다만 오늘 6 월 25 일은 62 년 전 북코리아 지도부가 38 선을 넘어 그들의 군대를 남쪽으로 전개시킨 날 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
개전 3 일만인 6 월 28 일
조선인민군 육군 제 1 군단 소속 T-34 85 형 전차가 창동 교두보와 미아리 저지선을 돌파한 뒤 서울시내로 진입하고 있다.
2012 년 6 월 25 일 새벽 (한국시간) 싸르니아 (clipbo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