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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예수는 왜 중요한가? |
작성자 늘봄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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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번호 6669 |
작성일 2013-03-23 08:41 |
조회수 34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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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종교란을 통해서 역사적 예수에 대해 내 사랑 아프리카 님과 에포케 님이 토론하고 있습니다. 두 분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여기에 따로 글을 올리는 것은 두 분의 생각과 차별을 두려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서일뿐입니다.
역사적 예수가 실제로 존재했느냐 아니냐 의 논쟁은 종교단체들은 물론 출판사들과 언론기관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논제거리입니다.
미국의 '예수 세미나' 학자들은 예수가 실제로 살아있던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라는 사람을 하늘에서 내려온 신으로 숭상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가 무슨 말을 했고(Jesus' Saying), 예수가 어떻게 행동했는지(Jesus' Action)를 탐구하는 것이 '예수 세미나'의 목적입니다. 복음서들의 원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는 무엇을 말했고 어떻게 살았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처음으로 예수를 직접 만나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닫고 실천하며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 기록한 복음서들은 무엇이었을까를 연구합니다. 현대인들이 읽고 있는 네 복음서는 수많은 사본들 중에 하나일뿐입니다. 이 사본들을 기본자료로 해서 2000년 전의 갈릴리 예수의 말과 행동을 찾아가는 것이 역사적 예수의 탐구입니다.
'역사적 예수'의 말과 행동을 찾는 목적과 의미는 교회가 역사적 예수 위에 이분법적 교리를 더덕더덕 덧칠하여 만든 '교리적 예수'를 해방시키려는 것입니다. 교회는 적어도 1700년 동안 교회의 권위와 권력을 보호하기 위해서 교리적 예수를 이용하여 사람들의 자율과 잠재력과 가능성을 말살하고 인간의 존엄성 즉 영혼을 무시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예수가 실제 인물이었는지 아닌지를 논쟁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천당-지옥 축복-징벌의 이분법적 예수는 교회가 인위적으로 만들었으며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 예수는 교회가 창작한 상업품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거룩한 생명이라고 확신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가장 소중하게 존중한 역사적 예수는 갈릴리 해변에서 어부들과 대화를 나누고 장터에서 평범한 사람들과 식탁에 둘어 앉아 함께 먹고 마시며 실제로 살아있었습니다. 이렇게 실제로 살았던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개인은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역사적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 또는 중개인 이라고 억지주장을 늘어놓지도 않았습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이 역사적 예수를 되찾아야 합니다. * 운영팀.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3-09-1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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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13-03-23 19:22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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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님, 안녕하세요. 글 잘 읽었습니다.
먼저 제가 역사적 예수의 문제에 대한 글을 올린 이유가 보수/근본주의자들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슈바이쩌가 역사적 예수를 탐구한 것이 예수는 실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바트 어만이 [Did Jesus Exist?]를 쓴 이유 역시 보수/근본주의자들을 위한 것임은 더욱 아닙니다. 늘봄님께서 위의 글을 쓰신 것도 분명히 밝히셨듯이 역사적 예수는 실재했다는 것을 전제하고 계시다는 것을 저는 분명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먼저, 어만으로 돌아가서 말씀드리자면, 어만 역시 역사적 예수는 실재하다는 전제를 하고 그 동안 수많은 책을 썼습니다. 그는 아예 역사적 실재를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학문성과 관련해서 논의대상조차 아니라고 판단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글과 관련해서 그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예수는 실재했는가 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어만이 명명한 “신화추종자들”(mythicists)이 예수는 실재하지 않았다는 주장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전제는 “all religions at heart are the same”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들에게는 종교 주창자나 영웅은 역사적일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지나치면 예수는 사실 태양신(sun-god)의 일종이라고 보고 심지어는 인도의 신인 Krishna가 Christ가 발음이 비슷하다는 것에서 찾는 지점까지 비약하게 됩니다. 한국에서 단군의 단과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부족인 단지파와 발음이 비슷해서 우리는 단지파 자손이라고 하는 주장과 별 다르지 않습니다. 몰 역사적인 이해가 가져온 결과입니다.
참 재밌는 사실은 영지주의와 현대판 영지주의적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예수의 역사성에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적 예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예수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이와관련해서 Philip Jenkins는 이렇게 말합니다. “…, the canonical gospels enjoy one immense advantage over the Gnostic texts in that orthodox Christians at least believed that Jesus had lived and died in a real historical setting, and that it was possible to describe these events in objective terms, For Gnostics, by contrast, Christ not so much a historical personage as a reality within the believer.” (Jenkins, Hidden Gospels, 2001, p. 103). 영지주의자들에겐 예수가 역사적 인물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는 마음속의 실재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현대 영지주의자들은 사복음서 추종자들을 문자주의라고 비판하는데, 그 근거로 사복음서 추종자들이 예수는 유대인이었으며, 팔레스틴에서 태어난 역사적 예수의 uniquness를 믿기 때문이라는 웃지못할 발언까지 하는 상황입니다. 심지어 이러한 경향성은 신화학자들(mythologists)인 멀치아 엘리아데, 조셉 캠벨, 칼 융 등에게도 나타납니다. 이들의 경우는 몰 역사적이라기보다는 비역사적(ahistorical)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끔 이들에게는 반역사적(antihistorical) 한 면도 많이 보여줍니다. 역설적이게도 이들은 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또는 보수반동적인 인물들이었습니다. 저의 속견이지만, 저는 이들이 공히 historicity에 관심이 없어서 그럴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 이 세사람에 대한 좋은 책은 Robert Ellwood의 [The Politics of Myth: A Study of C. G. Jung, Mircea Eliade, and Joseph Campbell] 를 강추합니다. 종교학자 엘우드는 보수반동적인 이 세사람의 신화학 거장들을 내리까고 있습니다. Nazi Symphasizer로서의 융에 대해서는 Richard Noll의 [The Jung Cult: Origins of a Charismatic Movement]가 엄청 좋습니다. 파시스트적인 엘리아데에 대해서는 Nancy Harrowitz가 편집한 [Tainted Greatness: Antisemitism and Cultural Heros]에 수록된 Adrianna Berger의 "Mircea Eliade: Romanian Fascism and the History of Religions in the United States," pp. 51-74 참조)
제가 잘 몰라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영지주의 문헌인 나그 함마디는 이른바 사복음서에 비교해서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 새로운 정보를 거의 제공해 주지 않습니다. 물론 the Gospel of Philip은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의 관계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고 나그 함마디 문헌에 포함되지 않았던 막달라 마리아의 복음서(이 복음서의 파편이 최초로 발견된 것은 1945년의 나그 함마디가 아니라 1894년 카이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는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의 친밀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영지주의 문헌의 중요한 공헌이라고 보지만, 그 많은 영지주의 문헌도 사복음서만큼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은 없습니다. 도마 복음서의 Sayings도 당연히 중요하죠. 어쨌든 영지주의자들은 예수의 역사성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지주의적인 신화추종자들도 마찬가집니다. 이것은 아주 독특한 현상이라 저의 개인적인 공부 관심사이기도 합니다.
저는 늘봄님께서 “예수가 실제 인물이었는지 아닌지를 논쟁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천당-지옥 축복-징벌의 이분법적 예수는 교회가 인위적으로 만들었으며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로 말씀하신 것은 잘 이해를 하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역사적 예수에 대한 글을 올린 것은 Tom Harpur나 Timothy Freke & Peter Gandy같은 사람들의 주장 때문입니다. " In Christianity, however, the myth was eventually literalized. Jesus was historicized." (Harpur, The Pagan Christ, 2004, p. 39). “We have become convinced that the story of Jesus is not the biography of an historical Messiah, but a myth based on perennial pagan stories. Christianity was not a new and unique revelation but actually a Jewish adaptation of the ancient pagan Mystery religion.” (Freke and Gandy, The Jesus Mysteries, 2000, p. 3). 저는 역사적 예수가 실재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은 역사학적으로도 중요하며 신앙으로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역사성을 말했을 때는 그것이 unique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독특성은 단순한 허구에 기반한 신화와 매우 다른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팔레스탄인의 기후, 지형, 역사적 상황에서 나타난 예수는 허구에 기반한 그리스 로마 신화나 힌두교의 수많은 신의 이야기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역사적으로 유일하게 존재한 Historical Buddha와 수많은 비역사적 붇다와 보살은 분명히 다릅니다. 천당 지옥의 문제는 지난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서서히 진화해 온것이며, 제가 문제 삼는 것은 사복음서에서의 예수의 역사성에 대한 것입니다. 늘봄님께서 역사적 예수를 항상 강조하시면서 이런 말씀하시니까 당혹스럽군요. 역설적이게도 늘봄님의 마지막 단락의 말씀은 역사적 예수를 말씀하시지만 신앙의 그리스도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은 것은 저의 속견때문인가요? 모든 신학적 진술은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의 변증법 속에서 탄생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역사적 예수가 없는 신앙의 그리스도로 가면 현대판 영주주의로 빠지고 맙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탐 하퍼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신화와 역사에 대한 것를 쓰다가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프리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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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13-03-23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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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더 덧붙입니다. 늘봄님은 “…역사적 예수는 갈릴리 해변에서 어부들과 대화를 나누고 장터에서 평범한 사람들과 식탁에 둘어 앉아 함께 먹고 마시며 실제로 살아있었습니다.”라고 예수 세미나 학자들과 같은 말씀을 하시지만, 탐 하퍼는 늘봄님께서 참여하신 예수 세미나에 대해서 이렇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The chief flaw in the entire Jesus Seminar approach, however, is that like the fundamentalists, the scholars of the Jesus Seminar seem struck with the mistaken view that they are ultimately dealing with history.” (Harpur, 1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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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13-03-23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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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님, 답글 감사드립니다.
제가 지적하고자 한 것은 바로 신화추종자들의 경향성에 대한 것입니다. 어만은 이들을 mythicists라고 하지만 저는 이런 말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나름대로 신조어를 만들자면 신화추종론자들은 “myth universalists”(신화보편론자들)라고 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이 그들의 신화론 기획안에 포섭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통 신화의 형성을 세가지 형태로 나눕니다. 역사의 신화화, 허구의 신화화, 허구와 역사가 섞인 것의 신화화입니다. 그런데 신화보편론자들은 기독교 성서처럼 역사의 신화화조차도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신화보편론자들에 따르면, 성서문자론자들은 전혀 역사성이 없는 성서신화를 역사화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복음서는 바로 그들에 의하면 역사문자론자들이 선택한 것이고 나머지는 이단으로 다 몰렸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적 예수와 상관없이 어떤 종교 자료든지 역사적인 것인지(historical), 허구적인 것인지(fictitious) 또는 역사와 허구가 섞인 것인지(semi-fictitious)에 대한 논의는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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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포케
| 2013-03-25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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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의 토론 잘 보고 있습니다.
늘봄님께서 그러신건 아니시겠지만, 아마도 아프리카님의 지적은 종교에 대한 혐오로 인해서 발생한 극단적인 종교 무용론이나 무의미론을 배격하시자 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종교간의 차이를 부정하고, 핵심이 같다는 의미로의 신화보편론이나 극단적으로 말해서 '종교 회통론'에 이르게 되면 종교의 역사적, 실존적 의미를 부정하게 되는 오류에 빠지게 될 것도 같습니다.
(이 부분은 저의 개인적인 견해입니다만)
저도 한때는 그런 종교 회의론에 많이 빠졌습니다. 물론 현상적인 종교로 보면 누구나 그럴 수 있다고 보구요, 이런 측면에서 종교인과 비종교인으로 나뉘는 양상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종교인과 비종교인간의 불신으로 끝나는것이 아니라 종교인 사이의 갈등이 더 큰 문제입니다.
이전에 아프리카님께서 지적해 주셨듯이 현재의 논의 관점은 '종교학적'인 관점이라고 봅니다.
즉, 종교 자체의 기능이나 의미를 종교 내부에서 보기 보다는 사회(학)적으로, 역사(학)적으로 끌어내어서 객관화해서 살펴 보자는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종교의 문제를 가치론적인 측면을 가능하면 최소하하여 그러한 종교간의 우열 문제에서 자유로와짐으로써 좀 더 덜 불편하고, 개방된 논의를 가능하게 해 줄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과연 종교에서 신학적 가치를 가능한 배제한 순수한 객관적 사회적, 역사적 측면에서의 연구가 가능한지가 사실은 좀 의문입니다.
역사라는 것도 결국은 승자의 신화라고 저는 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그래서 사실 보다 이상적인 사회학적, 역사적 연구를 위해서는 그 전에 그 종교를 해체분석 (파괴를 위한 해체가 아닌, 건전한 분석을 위한 해체) 하는 것도 어떠할지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어떤 것이 허구이고 어떤 것이 참인지를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이 종교를 가진 종교학자들의 사명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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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13-03-25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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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포케님, 안녕하세요. 님께서 지적하신 전자는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어서 말씀드립니다. 늘봄님의 입장은 종교혐오와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신화보편론자들 중에 무신론자도 있지만, 탐 하퍼는 캐나다의 성공회 교역자/신학자입니다.
종교에 대한 현상학적 이해가 종교 회의론에 빠지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라는 현상은 인간의 문화의 일부이고,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이해는 당연히 인문/사회과학의 일부입니다. 궁극적으로 종교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는 신을 아는 것이 아니라(흑, 불가능)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죠. 신화학(mythology)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므로 종교학은 다른 인문학의 목적과 다른 것이 아니라 인문학의 일부입니다. 종교학의 일세대들은 신학과 종교학의 거리두기를 애써 노력했는데 요즘은 신학적 통찰력을 많이 배우려고 합니다. 하지만 신학 역시 종교학의 대상이지 신학=종교학이 될 수는 없습니다.
종교학자 Ninian Smart는 종교가 여섯가지 차원(six dimensions of religion), 즉 experiential, mythic, doctrinal, ethical, ritual, and social 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Smart, Worldviews: Crosscultrual Explorations of Human Beliefs 나 The Religious Experience of Mankind). 여기에서 신화적 차원은 종교의 한 단면에 불과한 것입니다. 종교의 교리적 차원은 신학이 아니고 모든 종교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현상입니다. 사회적 현상도 마찬가지구요. 학자들마다 어디에 중심을 두느냐에 따라 관심사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Robert Doran같은 종교학자는 초기 기독교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자기의 연구 입장은 스마트의 제안중에 교리적인 면에만 촛점을 맞춘다고 이야기 합니다 (this book belongs most easily to the doctrinal dimension) (Doran, Birth of a Worldview, p. 2). 종교에 대한 교리적 차원을 간과하면 종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는 것입니다. 종교의 교리적 차원을 간과하는 것은 교리를 혐오하는 급진적 신학자들의 오해죠. 이 부분은 나중에 시간되면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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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포케
| 2013-03-25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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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프라카님 지적 감사드립니다.
제가 역사적 예수의 논의의 Context와는 좀 벗어난 방향으로 이해를 한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제가 아마도 지나치게 종교 회의론에 빠져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제가 말씀드린 종교현상은 현상학적인 고찰은 아니구요, 그냥 상식 차원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이라는 측면으로 쓰인 것입니다.)
최근의 종교학에서는 신학적인 통찰력도 배운다고 하니 반갑기도 하고, 또한 그 경계가 다시 저에겐 좀 모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에겐 아직도 엄밀한 종교학을 위해서는 사회학적인 분석과 해체가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는데요, 제가 너무 극단에 빠진게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앞으로도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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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13-03-25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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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진 표현인지 모르오나 에포케님의 생각이 점점 정치해지시는 것같군요. 사실 종교학 내에서도 신학적인 접근은 매우 중요합니다. 요즘 신학자들은 옛날처럼 교리타령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학적 객관성을 많이 수용하는 편입니다. 사실 예일, 하바드, 매길, 서강대 등등의 좋은 학교에는 신학과 종교학 프로그램이 동시에 굴러갑니다. 이들 학교는 주로 신학교에서 출발해서 종교학을 수용하는 경우입니다. 이에 반해 UC Santa Barbara나 캘거리 대학, 서울대 등에서는 순수하게 종교학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신학적인 접근에 대해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던 것은 사실이지만 요즘은 거리가 많이 좁혀졌습니다. 목사들도 종교학을 한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고 실제로 종교학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Charles Kimball인데 그는 침례교 목사입니다. 그의 [When Religion Becoming Evil: Five Warning Sings]는 참 잘 읽힙니다.
Peter Connolly가 편집한 책 [Approaches to the Study of Religion]은 신학적 접근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모두 7장으로 되어 있는데요. 종교에 대한 접근 방법으로 Anthropological, Feminist, Phenomenological, Philosophical, Psychological, Sociological, Theological Approaches 등입니다. 하지만 종교에 대한 대표적인 접근법은 인류학적, 현상학적, 사회학적, 심리학적 접근들입니다. 그래서 종교학의 영어 표기가 복수로 Religious Studies 되는 것이죠. study of religion로 자주 쓰이지만요.
사회학적인 분석과 해석이 종교의 해체를 지향하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의 사회학적 접근은 주로 종교와 사회적 관계를 많이 논합니다. 종교의 사회학적 접근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려면 Sociological Approach to Religion이나 Sociology of Religion 등의 단어를 아마존에 치면 수많은 책을 검색하실 수 있습니다. 종교의 사회학적 사고를 기초를 다지려면 Peter Berger가 쓴 Invitation to Sociology가 좋습니다. 한글로는 통일원 장관했던 한완상 교수가 [사회학에로의 초대]라는 제목으로 번역했습니다. 한글로 된 종교학 개론은 서강대의 김승혜교수가 쓴 [종교학의 이해]라는 훌륭한 책이 있습니다. 이분은 수녀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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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13-03-25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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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 제가 시건방졌던 것같습니다. 제 뜻은 "정치적"(政治的)이다는 뜻이 아니라 종교에 대한 이해가 점점 "정치(精緻)해지는 것같다는 뜻이었습니다. 저도 종교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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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포케
| 2013-03-25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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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아프리카님, 저의 짧은 국어 실력을 이해해 주십시오.
하지만, 아직 '종교학'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저와 다른 이들에게 많은 가르침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울러 앞으로 저의 딴지에도 많은 답변 부탁드리구요.
에포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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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13-03-25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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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어의 동음이의어의 문제이니 별 신경쓰지 마세요. 저는 국어 실력이 더 형편없습니다. 종교학이든 신학이든 공부할 필요는 없고 아무것이나 본인 관심분야를 열심히 파면 되는 일입니다.
저는 신화와 이야기론은 나름대로 관심을 마니마니 갖고 있으니 앞으로 이야기 나누면 될 것같습니다. 실은 제가 공부할 때 가장 행복한 분야입니다. 신화는 종교개론 첫시간에 듣는 말입니다. 보통 종교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를 신화와 의례 (myth and ritual)로 보기 때문이죠. 제가 위에서 비판하기는 했지만 엘리아데, 캠벨, 융은 신화론의 삼인방입니다. 중요한 인물들이라는 뜻입니다. 캠벨은 종교학 내보다는 밖에서 인기 있는 사람이고, 엘리아데는 종교학에서 신화론으로 보면, 핵심적인 사람입니다. 캐나다가 낳은 유명한 신화학자는 Northrop Frye가 유명합니다. 그는 토론토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쳤습니다. 프라이의 책들은 한글로 상당히 많이 번역이 되었죠. 그의 [Anatomy of Criticism](비평의 해부)가 가장 유명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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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포케
| 2013-03-26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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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감사합니다.
제가 글을 쓰고 있지만 주로 상상력에 의거하여 사실을 근거로 구성하는 방식을 쓰고 있습니다. 신화학적인 측면을 논하기에는 너무나도 미약합니다. 그러나 공부를 하여야 할 것이 많음을 계속 느끼고 있습니다.
현재의 작업은 제가 신화를 재구성하거나 해석하는 차원은 아닙니다만, 결국 많은 신화들을 공부하고자 합니다.
최근에 특히 기독교에 관련된 소설(역사적 예수의 발견과 비슷한)을 쓰고 있어서 언젠가는 꼭 조언을 여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실 더 관심이 많은 다양한 신화적 근거들(순수허구와 종교적 신화들을 망라하는)을 가지고 좀 더 긴 장편 소설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감히 저의 장르를 'Pan-mythical fiction'이라고 부르 싶습니다. 혹시 그런 장르에 대해서 들어 보셨는지도 궁금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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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13-03-26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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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mythical fiction은 어떤 맥락에서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신화론은 좀 통속적이긴 하지만 조셉 캠벨의 책들부터 시작하시면 좋겠군요. 가장 쉬운 책은 빌 모이어스와 대화한 [신화의 힘](The Power of Myth)입니다. 한글로 번역되었습니다. 비디오테잎으론 공공도서관에서 빌려 볼 수 있었는데 디비디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근데, 저는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이 괜찮았다고 생각합니다. 20여년 전이니까 옛날엔 멋모르고 읽었었는데 좀 알고 보면 느낌이 어떨지 다시 읽어 보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소설은 초판과 증보판을 다 읽고 또 갖고 있었는데 초판이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이것 역시 한국에 맡겨 두고와서 가봐야 확인이 가능할 것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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