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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신학(종교)의 사대주의를 벗어나야
작성자 에포케    지역 Calgary 게시물번호 6674 작성일 2013-03-08 10:22 조회수 3908

'종교사대주의'라는 키워드로 접근하다가 그래도 개념있는 글을 보고 올립니다. 물론 논의가 막연한바가 크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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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종교)의 사대주의를 벗어나야

사대주의는 정치적 경제적 사대주의만이 아니라 종교적 혹은 신학의 사대주의도 있다고 본다. 자기 것이 아닌 남의 사상이나 남의 신학을 무비판적으로 무조건 따라가는 것도 사대주의의 일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21세기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지구촌 시대란 온 세계인이 함께 생각하고 함께 느끼고 함께 즐기고 함께 아파하는 시대를 말한다. 지구의 한 곳에서 일어난 사건이 전 세계인의 사건이 되고 관심의 대상이 되며 평가와 논의의 대상이 된다. 한반도의 한 시골 교회에서 행한 설교의 내용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터넷이나 이 메일을 통해 이사람 저 사람에게 전달되고 심지어 아프리카의 오지에 있는 사람(선교사)에게 까지 전달되고 영향을 주며 또 평가되기도 한다. 

최근 영국에서 벌어진 올림픽 경기가 지구촌 사람들의 큰 관심사가 되고 있다. 세계 사람들은 분단된 나라 한국이 많은 금메달을 따내자 비교적 신체조건이 유리한 유럽이나 서방의 여러 큰 나라들을 능가하고 있는 사실에 놀라워하고 있다. 또한 세계 사람들은 한국 양궁이 여러 해 동안 금메달을 줄곧 독차지 하자 그 원인을 그들대로 연구한 결과 담글 때 손가락을 많이 사용하는 김치와 쇠 젓가락의 사용에서 찾고 있다. 이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온 세상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며 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제 한국의 기독교는 2백 오십년(신 구교 합해서)의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1천 5백여만 명의 신도수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아직까지 이렇다 할 뚜렷한 자기 신학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자기 신학이 없이 19세기에 미국에서 일어난 그리고 그 배경에서 파송된 미국의 선교사들이 심어준 문자주의적 근본주의 신학에 머물러 있다, 문자주의적 근본주의의 원조는 유대교 바리세파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바리세파 사람들의 문자주의적 율법주의(모세 5경 해석)에 정면으로 싸웠다. 그 결과로 십자가의 주검에까지 이르렀다. 바라세파 사람들은 예수의 영성적 성경해석을 거부하고 문자주의를 고집했다. 그런데 오늘의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바리세파 사람들의 성경해석(문자주의)을 여전히 따르고 있는 실정이다. 

단적으로 문자주의적 율법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주의적 복음주의를 정면으로 거역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반 예수적 반 그리스도적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결과적으로 신약의 예수의 복음을 거부하고 구약의 유대교 종교로 환원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적 복음의 빗으로 해석되어야만 기독교적 신앙의 지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유대교나 유대민족의 역사적 시실을 공부하는 이스라엘 역사 공부에 불과하게 된다. 

우리 한국민족은 이스라엘 민족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훨씬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부터 하느님과 인간과 우주만물의 신비한 관계에 대한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 한국 민족에게는 유불선(儒彿仙)이 들어오기 전부터 독특한 영성을 지닌 종교사상이 있었다. 그것을 신라인들은 국선도(國仙道) 또는 풍류도(風流道)라고 불렀으며, 이것을 신라시대의 문필가며 유학자인 최치원은 유불선을 다 포함하면서도 그것들과 구별되는 지극히 심오한 영성을 지닌 종교사상이라 하여 "현묘지도"(玄妙之道)라고 명명했다. 그것은 신과 인간과 우주만물을 대립적 관계로 보지 않고 상호 관계적으로 이해하는 우주관인 천지인삼재(天地人三才) 사상이다. 

오늘날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발산하는 독특한 예술성인 한류(韓流)는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바로 한국인의 고유한 종교성 혹은 철학성과 심미성의 결합체인 풍류도(현묘지도)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그런 점에서 요즈음 세계인이 주목하는 한류란 바로 한국인의 피 속에 흐르는 풍류도의 영성과 거기에 동양 문화의 모체인 유불선(儒彿仙) 세 종교와 또한 이 땅에 가장 늦게 들어온 종교 즉 서구문화의 중심축인 기독교적 영성이 조화롭게 결합되어 꽃피운 심오한 종교성과 철학성과 심미성의 표출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한류(韓流/Korean Trend)란 21세기에 어느날 감자기 생긴 현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서구 기독교의 급격한 쇠퇴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세계가 주목하는 건강한 교회들을 상당수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교세는 아직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탄탄한 상태에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현상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특히 개신교회에 대한 불안감은 증폭되어가고 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앞으로 나아가야할 지표가 뚜렷하게 설정되어 있지 않으며 그것을 뒤 바침 할 만한 신학적 토대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한국교회는 지금 자기신학이 없다는 점이다. 특히 한국의 개신교회를 리드하고 있는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자기신학이 없이, 16세기의 프랑스의 신학자 존 칼빈과 18세기의 영국의 목사며 신학자인 존 웨슬리의 신학의 극히 일부에 그것도 많이 변질된 (기복신앙과 문자주의적 근본주의 신앙으로 기우러진) 상태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종교개혁운동을 전개할 당시 가톨릭교회의 어거스틴계 수도원 수도사 겸 신학 교수였으며, 존 칼빈은 종교개혁 운동에 참가하기 전엔 프랑스의 가톨릭교회 신자로 법학도며 인문주의 사상가였고, 존 웨슬리는 옥스포드 대학의 고전어 강사며 영국 성공회 목사였다. 그리고 그들이 살던 시대와 시대정신이나 사회(세계) 환경은 오늘의 우리의 시대정신이나 환경과는 너무도 다른 처지였다, 그리고 특히 오늘의 우리 한국의 사회 환경과 시대정신은 그들이 살던 시대정신이나 사회 환경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가 있다. 한 예로서 루터나 칼빈이나 웨슬리가 살던 시대환경은 오늘의 한국과 같이 유불선과 같은 심오한 영성을 지닌 동양의 큰 종교들이 실존하는 환경이 아니었다. 

실제로 오늘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선조 2대나 3대 혹은 3대나 4대로 올라가면, 대부분 유교인들이였거나 불교인들이었으며, 또한 현재에도 그들의 친인척의 많은 사람들이 불교도들이거나 유교나 도교 아니면 한국의 민족종교들인 천도교나 증산교 혹은 원불교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다. 필자는 얼마 전 한 유능한 목회자가 자신이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불교의 스님이 될까 많은 고민 끝에 신학교에 들어와 목사가 되었다는 간증을 들은 적이 있다. 한국에서는 목사가 되는 일과 스님이 되는 일은 일종의 자신의 종교적 수행의 선택의 일에 속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과정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오늘날 서구 기독교의 쇠퇴와 함께 무신론의 등장과 확산은 전적으로 유대-기독교의 신관의 오류에서 비롯되었음을 말했다. 특히 서구 유럽의 기독교의 쇠퇴의 큰 원인은 바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전능의 심판자로서의 지나친 인격신의 강조 즉 이 세상 우주만물과는 전혀 상관없는 초월적인 만능의 신관과 인격 신관의 강조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고, 따라서 앞으로의 기독교 신학은 초인격 혹은 비인격 신관의 요소를 다분히 지닌 동양종교들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할 점이 있음을 말했다. 

이제 우리 한국교회는 21세기를 맞이하며 우리 한국문화와 한국인의 심성에 감명과 감동을 줄 수 있는 설득력과 호소력이 있는 신학이 요구되고 있다. 우리의 문화 풍토와 동떨어진 시대와 환경에서 생성된 과거(서구)의 신학을 맹목적으로 따라하는 상태에서 벗어나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본다. 왜냐하면 과거의 신학을 우리 풍토에 맞게 재해석함이 없이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그러한 태도는 사상의 사대주의, 신학의 사대주의, 종교의 사대주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의 문화 풍토는 루터나 칼빈이나 웨슬리가 활동하던 풍토와는 너무도 다른 풍토 즉 오늘날 많은 서구인들이 큰 관심을 보이며 또한 매혹을 느끼는 동양의 큰 종교들인 유불선(유교 불교 도교)이 깊이 영향을 주어왔고 또한 생활화된 풍토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 한국교회를 위한 신학은 어떻게 구축해야 할 것인가? 

필자는 바로 우리 한국인의 얼로 철학과 신학(종교)을 한 다석 류영모의 사교회통(四敎會通)의 방법론을 제시하고 싶다. 다석은 자신의 가슴에 특히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가 알려준 영적 실재로서의 하느님과 성령(진리의 영)을 항상 가습에 품고서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동시에 동양의 고전들과 경전들을 깊이 연구한 종교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기독교 신앙인이면서도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우리 한국 민족에게 오랜 세월동안 깊이 영향을 끼친 유불선의 경전들을 두루 연구하고 상호대조 조명하여 웅대한 유불선기(儒彿仙基) 네 종교의 회통적 혹은 통섭적 영성의 신학(會通的/統攝的 靈性神學)의 길을 제시해 주었다. 이것은 세계의 어느 영성가도 신학자도 시도해보지 못 했던 일이었다. 

이것은 어떤 의미애서는 한국기독교의 최대 과업인 기독교의 한국적 이해와 해석 작업인 본격적인 토착화 신학의 방법을 제시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석의 신학 방법의 특징은 성경을 서양의 신자들이나 신학자들이 풀이해준 대로 앵무새처럼 따라하지 않고 순 우리 한국인의 슬기(지혜)와 얼(영성)로 해석해냈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 한국교회는 바로 우리의 고유한 신학을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시점에 와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이제 우리 한국교회는 남의 신학 곧 서구 신학자들이 만들어준 교의/교리 신학을 무조건 앵무새처럼 따라가기 보다는 우리의 영적 슬기와 능력으로 신학을 수립하여 전 세계인들에게 알려줄 단계에 와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종교와 신학의 사대주의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니겠는가? 

류기종
평화영성신학 연구원 원장
클레아몬트대 과정사상연구소 코리아 프로젝트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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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전히 드는 의문은 과연 이러한 '유불선' 통합 혹은 흡수를 이룬 그러한 한국적인 종교관 혹은 신학관이 한국의 기독교 교회내에서 가능할까 하는 점입니다.

똑같은 내용이라도 한국에서 발생한 것 혹은 토착적인 것은 모두 이단이고, 유럽이나 북미 전통을 가진 것이라면 환영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 이 분의 지적이겠지만, 실제로 그러한 유불선의 전통에 바탕을 둔 새로운 우리만의 신학이 과연 한국에서 혹은 교민사회에서 가능할까 하는 점이 의문입니다.

꼭 외래 전통을 갖다 써야지만 그럴듯해 보이고, 모든 사람이 만족할만한 풍토가 이제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종교만이 자신들의 그런 입장을 개혁하지 못한다면, 우리나라 종교의 미래는 과연 무엇일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종교는 자신의 길이 옳다고 목에 칼이 들어오더라도 주장할 수 있어야 겠지만, 남의 종교를, 또한 전통을 하나의 문화로 받아들일 줄 알고 논의할 줄 아는 자세들을 캐나디언 기독교인들에게 발견하면서 저는 개인적으로 많이 놀라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그들은 타종교의 관점을, 'It's a fresh approach~'라고 말할 줄 안다는 것이지요.

왜 한국 종교인들은 그것이 안될까요?


* 운영팀.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3-09-1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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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by  |  2013-03-08 18:23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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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종교인들에게는 그게 안되는 이유가 여러가지 있겟지요. 그 중에 한가지가 21세기를 살면서 머리속에서는 2-3세기 사고를 한다는거지요. 아리우스파 와 아타나시우스 파가 싸울 때 그 적개심을 그대로 갖고 있으니 열린 마음이고 뭐고 꿈 같은 이야기 입니다.

내사랑아프리카  |  2013-03-08 19:04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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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선 1960년대 감리교신학교를 중심으로 토착화 신학이 나왔었습니다. 대표적인 분이 윤성범교수였죠. 이 분의 사상을 구체적으로 보려면 제가 갖고 있는 책을 점검해봐야겠지만 한국문화적 토양과 성서의 메시지의 씨앗의 조화였습니다. 그는 단군신화속에서 삼위일체 흔적을 찾으려고 했었습니다. 좀 황당하지만요. 윤성범 교수의 한계는 한국에서 60년대 당시 유행한 Karl Barth의 신학의 child였기 때문입니다. 바르트는 문화신학에 대해서는 나찌의 경험으로 알레르기 반응을 했기 때문에 새로운 해석학적 틀을 제시해 주시는 못했습니다.

유불선의 역사적 발전 과정과 기독교의 새로운 수용은 감리교 배경을 가졌던 연세대 교수였던 유동식 교수의 [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라는 기념비적인 책으로 나왔었습니다. 유교수의 이 책은 유불선에 대한 문헌사적 서술로 독보적인 분이었습니다. 나중에 유동식 교수는 풍류신학을 제창하시기도 하였습니다. 한신대의 경우는 김경재 선생께서 폴 틸리히를 기초로해서 한국문화신학을 전개했습니다.

토착화신학과 좀 다른 맥락이지만 토착화라는 "용어"는 군사독재 시절 박종흥을 중심으로 한 토착민주주의라는 영향을 받지 않았는가 하는 개인적 짐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민주주의의 보편성 대신에 독재문화를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요상한 말로 채색했었습니다. 현재의 한국문화와 사상은 냉전의 산물이고 남북통일이 되지 않으면 한국적 사상이나 종교적 융합이 나오기 힘들 것 같네요. 좋은 사상은 사상적 자유라는 토양속에서 나오겠죠.

위의 글을 쓴 류기종님은 과정사상을 한국에 소개한 분들 중의 한분입니다. 초창기 땐, 김상일, 류기종, 김경재 선생 등이 과정철학 및 신학을 활발히 했었습니다. 과정철학자 화이트헤드는 김용옥 선생도 좋아해서 한국에 널리 알려졌지만 아직까지 대중화는 그렇게 되지 않은 것같습니다. 과정신학자의 주창자 John Cobb이 캘거리에 오신적이 있습니다.

저는 사상적 사대주의는 일리있는 비판이지만 이런 글을 쓴 류기종 선생도 결국은 과정철학과 과정신학을 수입해서 사용하고 계신 분입니다. 류영모 선생이 새로운 한국적 사상의 틀을 제시해 주었는지는 후학들의 몫이겠죠. 어쨌거나 수입도 열심히 잘해야 나중에 한국적 사상이 나올 수 있겠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한국적임은 보편성을 획득해야 합니다.

이러나 저러나 빨리 통일이 되야 필비님 등 캐나다 관광단을 조직해서 서울에서 출발하여 서안을 거쳐 둔황 등을 다녀와야 되는데...

내사랑아프리카  |  2013-03-10 22:31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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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포케님, 안녕하세요. 이것 저것 관심이 많으시네요. 저는 한국에서 과정철학과 신학에 관심이 많아서 화이트헤드 책도 사고 복사하고 열심히 읽기도 했었습니다. 철학과 신학하는 사람들도 석사논문에 과정사상에 대해서 논문을 쓰곤 했죠. 그런데 저의 경우는 화이트헤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수학도 함께 해야할 것같아서 관심을 접었습니다. 한국에 책을 좀 두고왔는데 가면 화이트헤트 꺼는 가져 올생각입니다. 가끔 향수 같은 게 느껴져서요. 그의 [과정과 실재]를 제대로 분석하고 이해하는 이는 별로 없다고 합니다. “God” 부분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한 장을 할애했는데 이것 가지고는 그의 체계를 이해하기는 힘들 것같구요. Religion in the Making은 작은 책이지만 제법 흥미있게 읽었고 Science and the Modern World도 그다지 어렵지 않아 읽어볼 만합니다. 화이트헤드는 종교사상가라기보다는 수학자나 철학자에 가깝고 종교적으로 접목시킨 사람은 Charles Hartshorne입니다. 하트숀의 과정사상을 대중화킨 사람은 아래에서 제가 언급한 John B. Cobb이고 Cobb의 동료이자 제자라고 할 수 있는 David Ray Griffin도 주류 과정신학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캅과 공저한 과정신학 입문책은 [Process Theology: An Introductory Exposition]이 좋습니다. 오래 전에 읽다만 기억이 나는군요. 그리핀은 동양인 학생들을 별로 안좋아한다고 해서 제가 편견을 갖고 있었는데, 제가 아는 서양인 가톨릭 철학자가 윤리관이 마음에 든다고 해서 다시 그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동영상에서 911에 대한 음모이론을 주장하고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리판은 상당히 정력적으로 사회운동과 사상에 참여하고 있는 것같습니다. 다음의 링크를 보면 아실 수 있습니다. http://www.amazon.com/David-Ray-Griffin/e/B000APTCK4/ref=la_B000APTCK4_pg_1?rh=n%3A283155%2Cp_82%3AB000APTCK4&ie=UTF8&qid=1362975357

과정사상의 중요한 신관은 범재신론(panentheism)에 대한 개괄적인 내용은 Marcus Borg의 [The God We Never Knew]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book sale에서 샀는데, 제 친한 서양인 친구가 도네이션 한 책이더군요. 나중에 이것을 확인하고 웃었죠. 이 책은 새로운 신론의 초보자에겐 괜찮은 책이지만 저는 읽다가 별로 도전적이지 않아 중도에 그만 뒀습니다.

둔황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에 Richard Foltz의 [Spirituality in the Land of the Noble: How Iran Shaped the World's Religions]을 읽은 후였습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서 페르시아 제국이 어떻게 인도에까지 영향력을 미쳤으며 심지어는 실크로드와도 상관이 깊은 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폴츠의 다른 책 [Religions of the Silk Road: Premodern Patterns of Globalization]도 사서 읽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폴츠는 이 책에서 실크로드를 통해서 세계의 종교들, 즉 불교, 기독교(네스토리어스 또는 경교), 이슬람 등이 상호교류하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1980년대 NHK에서 만들어 KBS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실크르드]를 구해서 꼼꼼히 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신실크로드가 10부작으로 나온 것도 구해서 보게 되었고, 그 쪽에 대한 다큐먼터리리 여행기는 최대한 많이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필비님도 이 쪽 책을 보시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냥 한 번 순례객으로 가면 좋겠다는 바람을 표현한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이 쪽에 좀 빨리 관심을 가졌다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내사랑아프리카  |  2013-03-11 02:36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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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와는 상관이 없지만, 그리핀의 911에 대한 견해입니다. 저는 아직 그리핀의 음모이론을 지지하지는 않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geQ4WRqly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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