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주의는 정치적 경제적 사대주의만이 아니라 종교적 혹은 신학의 사대주의도 있다고 본다. 자기 것이 아닌 남의 사상이나 남의 신학을 무비판적으로 무조건 따라가는 것도 사대주의의 일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21세기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지구촌 시대란 온 세계인이 함께 생각하고 함께 느끼고 함께 즐기고 함께 아파하는 시대를 말한다. 지구의 한 곳에서 일어난 사건이 전 세계인의 사건이 되고 관심의 대상이 되며 평가와 논의의 대상이 된다. 한반도의 한 시골 교회에서 행한 설교의 내용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터넷이나 이 메일을 통해 이사람 저 사람에게 전달되고 심지어 아프리카의 오지에 있는 사람(선교사)에게 까지 전달되고 영향을 주며 또 평가되기도 한다.
최근 영국에서 벌어진 올림픽 경기가 지구촌 사람들의 큰 관심사가 되고 있다. 세계 사람들은 분단된 나라 한국이 많은 금메달을 따내자 비교적 신체조건이 유리한 유럽이나 서방의 여러 큰 나라들을 능가하고 있는 사실에 놀라워하고 있다. 또한 세계 사람들은 한국 양궁이 여러 해 동안 금메달을 줄곧 독차지 하자 그 원인을 그들대로 연구한 결과 담글 때 손가락을 많이 사용하는 김치와 쇠 젓가락의 사용에서 찾고 있다. 이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온 세상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며 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제 한국의 기독교는 2백 오십년(신 구교 합해서)의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1천 5백여만 명의 신도수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아직까지 이렇다 할 뚜렷한 자기 신학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자기 신학이 없이 19세기에 미국에서 일어난 그리고 그 배경에서 파송된 미국의 선교사들이 심어준 문자주의적 근본주의 신학에 머물러 있다, 문자주의적 근본주의의 원조는 유대교 바리세파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바리세파 사람들의 문자주의적 율법주의(모세 5경 해석)에 정면으로 싸웠다. 그 결과로 십자가의 주검에까지 이르렀다. 바라세파 사람들은 예수의 영성적 성경해석을 거부하고 문자주의를 고집했다. 그런데 오늘의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바리세파 사람들의 성경해석(문자주의)을 여전히 따르고 있는 실정이다.
단적으로 문자주의적 율법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주의적 복음주의를 정면으로 거역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반 예수적 반 그리스도적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결과적으로 신약의 예수의 복음을 거부하고 구약의 유대교 종교로 환원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적 복음의 빗으로 해석되어야만 기독교적 신앙의 지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유대교나 유대민족의 역사적 시실을 공부하는 이스라엘 역사 공부에 불과하게 된다.
우리 한국민족은 이스라엘 민족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훨씬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부터 하느님과 인간과 우주만물의 신비한 관계에 대한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 한국 민족에게는 유불선(儒彿仙)이 들어오기 전부터 독특한 영성을 지닌 종교사상이 있었다. 그것을 신라인들은 국선도(國仙道) 또는 풍류도(風流道)라고 불렀으며, 이것을 신라시대의 문필가며 유학자인 최치원은 유불선을 다 포함하면서도 그것들과 구별되는 지극히 심오한 영성을 지닌 종교사상이라 하여 "현묘지도"(玄妙之道)라고 명명했다. 그것은 신과 인간과 우주만물을 대립적 관계로 보지 않고 상호 관계적으로 이해하는 우주관인 천지인삼재(天地人三才) 사상이다.
오늘날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발산하는 독특한 예술성인 한류(韓流)는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바로 한국인의 고유한 종교성 혹은 철학성과 심미성의 결합체인 풍류도(현묘지도)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그런 점에서 요즈음 세계인이 주목하는 한류란 바로 한국인의 피 속에 흐르는 풍류도의 영성과 거기에 동양 문화의 모체인 유불선(儒彿仙) 세 종교와 또한 이 땅에 가장 늦게 들어온 종교 즉 서구문화의 중심축인 기독교적 영성이 조화롭게 결합되어 꽃피운 심오한 종교성과 철학성과 심미성의 표출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한류(韓流/Korean Trend)란 21세기에 어느날 감자기 생긴 현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종교개혁운동을 전개할 당시 가톨릭교회의 어거스틴계 수도원 수도사 겸 신학 교수였으며, 존 칼빈은 종교개혁 운동에 참가하기 전엔 프랑스의 가톨릭교회 신자로 법학도며 인문주의 사상가였고, 존 웨슬리는 옥스포드 대학의 고전어 강사며 영국 성공회 목사였다. 그리고 그들이 살던 시대와 시대정신이나 사회(세계) 환경은 오늘의 우리의 시대정신이나 환경과는 너무도 다른 처지였다, 그리고 특히 오늘의 우리 한국의 사회 환경과 시대정신은 그들이 살던 시대정신이나 사회 환경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가 있다. 한 예로서 루터나 칼빈이나 웨슬리가 살던 시대환경은 오늘의 한국과 같이 유불선과 같은 심오한 영성을 지닌 동양의 큰 종교들이 실존하는 환경이 아니었다.
실제로 오늘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선조 2대나 3대 혹은 3대나 4대로 올라가면, 대부분 유교인들이였거나 불교인들이었으며, 또한 현재에도 그들의 친인척의 많은 사람들이 불교도들이거나 유교나 도교 아니면 한국의 민족종교들인 천도교나 증산교 혹은 원불교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다. 필자는 얼마 전 한 유능한 목회자가 자신이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불교의 스님이 될까 많은 고민 끝에 신학교에 들어와 목사가 되었다는 간증을 들은 적이 있다. 한국에서는 목사가 되는 일과 스님이 되는 일은 일종의 자신의 종교적 수행의 선택의 일에 속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과정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오늘날 서구 기독교의 쇠퇴와 함께 무신론의 등장과 확산은 전적으로 유대-기독교의 신관의 오류에서 비롯되었음을 말했다. 특히 서구 유럽의 기독교의 쇠퇴의 큰 원인은 바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전능의 심판자로서의 지나친 인격신의 강조 즉 이 세상 우주만물과는 전혀 상관없는 초월적인 만능의 신관과 인격 신관의 강조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고, 따라서 앞으로의 기독교 신학은 초인격 혹은 비인격 신관의 요소를 다분히 지닌 동양종교들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할 점이 있음을 말했다.
이제 우리 한국교회는 21세기를 맞이하며 우리 한국문화와 한국인의 심성에 감명과 감동을 줄 수 있는 설득력과 호소력이 있는 신학이 요구되고 있다. 우리의 문화 풍토와 동떨어진 시대와 환경에서 생성된 과거(서구)의 신학을 맹목적으로 따라하는 상태에서 벗어나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본다. 왜냐하면 과거의 신학을 우리 풍토에 맞게 재해석함이 없이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그러한 태도는 사상의 사대주의, 신학의 사대주의, 종교의 사대주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의 문화 풍토는 루터나 칼빈이나 웨슬리가 활동하던 풍토와는 너무도 다른 풍토 즉 오늘날 많은 서구인들이 큰 관심을 보이며 또한 매혹을 느끼는 동양의 큰 종교들인 유불선(유교 불교 도교)이 깊이 영향을 주어왔고 또한 생활화된 풍토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 한국교회를 위한 신학은 어떻게 구축해야 할 것인가?
필자는 바로 우리 한국인의 얼로 철학과 신학(종교)을 한 다석 류영모의 사교회통(四敎會通)의 방법론을 제시하고 싶다. 다석은 자신의 가슴에 특히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가 알려준 영적 실재로서의 하느님과 성령(진리의 영)을 항상 가습에 품고서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동시에 동양의 고전들과 경전들을 깊이 연구한 종교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기독교 신앙인이면서도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우리 한국 민족에게 오랜 세월동안 깊이 영향을 끼친 유불선의 경전들을 두루 연구하고 상호대조 조명하여 웅대한 유불선기(儒彿仙基) 네 종교의 회통적 혹은 통섭적 영성의 신학(會通的/統攝的 靈性神學)의 길을 제시해 주었다. 이것은 세계의 어느 영성가도 신학자도 시도해보지 못 했던 일이었다.
이것은 어떤 의미애서는 한국기독교의 최대 과업인 기독교의 한국적 이해와 해석 작업인 본격적인 토착화 신학의 방법을 제시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석의 신학 방법의 특징은 성경을 서양의 신자들이나 신학자들이 풀이해준 대로 앵무새처럼 따라하지 않고 순 우리 한국인의 슬기(지혜)와 얼(영성)로 해석해냈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 한국교회는 바로 우리의 고유한 신학을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시점에 와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이제 우리 한국교회는 남의 신학 곧 서구 신학자들이 만들어준 교의/교리 신학을 무조건 앵무새처럼 따라가기 보다는 우리의 영적 슬기와 능력으로 신학을 수립하여 전 세계인들에게 알려줄 단계에 와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종교와 신학의 사대주의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니겠는가?
클레아몬트대 과정사상연구소 코리아 프로젝트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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