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한국에서는 물론 캐나다의 한인사회에서 박근혜 정부의 부정직과 불의에 반대하는 양심있는 기독교인들의 외침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옵니다.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은 다수의 국민들이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왔던 정부의 불의한 일들을 폭로하고 정의를 회복하려고 합니다. 이들은 하늘에서 받을 큰 보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실을 밝히려고 담대하게 양심 선언을 합니다.
마태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달란트(talent) 비유’ (마태 25:14-30)는 현대 기독교인들의 현실 참여에 대해 도전하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2000년전 로마제국의 탄압적인 통치에 항거하는 대단히 위협적이고 위력적인 도전이었습니다. 또한 이 이야기는 기독교인들의 언어와 문화에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불행하게도 이 이야기 속에 숨겨진 ‘양심 선언’에 대한 메시지는 잘 몰랐던지 또는 대수롭지 않게 무시해 버렸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떠오릅니다. 2000년전의 예수의 비유가 어떻게 21세기의 기독교인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가? 마태의 공동체가 처한 사회적 그리고 종교적 상황이 현대의 상황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현대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목숨을 바쳐 항거했던 로마제국의 시대보다 더 포용적이고 공정한 분배의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를 이룩할 수 있는가?
마태의 유대인 기독교 공동체는 생존의 두려움 때문에 제국의 황금만능의 가치관과 세계관의 노예생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좋은 소식을 유대인 사회를 넘어서서 이방인들의 세계에 널리 전파하는데에 선별적이고 편협적이었습니다. 예수의 정신을 따라서 우주적으로 이방인들에게 자신들의 문을 활짝 열지 못했습니다. 그림을 전체적으로 크게 보기 보다는 바로 눈 앞에 보이는 위기를 극복하는 것에만 몰두했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서서 시야를 넓게 하여 멀리 바라보면서 새로운 기독교, 새로운 교회,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인간, 새로운 신앙을 위한 새로운 모험을 두려워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유대인 기독교인만을 사랑하기를 원했습니다.
달란트 비유의 인습적이고 문자적인 해석에 따르면 처음 두 하인을 영웅으로 추켜 세웁니다. 그리고 이 두 하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인에게 더 많은 돈을 벌게해 준 것에 대해서 충성된 종으로 보상을 내린 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합니다. 더욱 잘못된 것은 이 비유를 ‘여러분의 달란트(재주)를 땅 속에 묻어두지 말고 개발하십시오’ 라는 단순한 예화로 해석합니다. 설상가상으로 ‘하느님이 당신의 달란트를 개발시키고 당신을 사용할 것입니다’ 라고 해석하는 것은 비유의 날카로운 날을 무디게 만들 뿐 입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비유는 현세를 버리고 내세를 꿈꾸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가 영원함이고 지금 여기에 공정한 분배의 정의가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자는 위험하고 불편한 도전이었습니다.
비유는 비유로 해석해야 하고, 비유가 아닌 것을 비유라고 하는 것은 예수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달란트의 비유는 사람들이 인습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기존 제도와 가치관을 180도로 뒤집어 엎으려고 합니다. 따라서 이 비유에서의 영웅은 처음 두 하인이 아니라, 세 번째 하인입니다.
예수의 달란트 비유를 신중하게 다시 새롭게 읽어보면, 이 이야기에서 세 번째 하인은 다른 두 하인보다 더많은 시선을 집중시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세 번째 하인이 진정한 영웅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기존의 제도와 가치관을 수용하기 보다는 이것에 항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욕심을 가지고 부를 축척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주인과 다른 하인들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많은 이익을 챙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에 우리가 이 비유를 뉴욕의 금융가 월스트리트에서 현대의 황금만능주의와 성공주의와 자본주의에 물들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읽는다면 엉뚱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세상에서는 쉬지 않고 일하고, 부동산과 금융에 투자하고, 이자를 더 많이 늘려서 부자가 되는 것을 극히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일로 생각합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사람이 더 많이 가지면 다른 사람들은 덜 가져야 하는 자본주의 경제원리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고대 사회의 사회적 경제적 구조와 제도에는 현대인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빈부의 차가 있었습니다. 2%의 귀족층이 정치 경제 종교를 통제하며 98%의 물자를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98%의 민중들은 침묵을 지키고 2%의 물자를 나누어 가져야 했습니다. 따라서 다수의 민중들은 극히 제한적인 물자를 공유해야 합니다. 누가 조금이라도 더 가지면 나머지 사람들은 그만큼 덜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상황이 2000년 전이나 오늘이나 크게 다를바가 없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예수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은 탐욕적이고 무자비한 주인입니다. 세 번째 하인은 주인과 처음 두 하인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세상 현실에 부적격하고 무능력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 하인은 주인의 탐욕과 사악함을 고발하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했습니다.
달란트 비유는 소수의 부자들이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것을 중단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자들의 탐욕을 웃음거리로 만들라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얼마전에 뉴욕의 금융가 월 스트리트와 전 세계의 주요 도시들에서 수많은 ‘세 번째 하인들’이 부자 주인들에게 항거하는 시위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소수의 부유층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으려는 것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퍼져있는 극심한 빈부의 차이에 항거하면서 공정한 분배의 정의를 선포했습니다. 최근에 로마 가톨릭의 교황과 미국 대통령 오바마도 모든 인간의 평등함과 경제분배의 공평함에 대한 양심선언을 했습니다. 물론 하루 세끼를 걱정할 필요없이 넉넉하게 사는 사람들은 이 세 번째 하인들을 비아냥 할지는 모르겠지만, 예수는 이들의 편에 서 있습니다.
CE 325년에 니케아 신경이 만들어진 이래 지난 1700년 동안 기독교 교회는 교인들의 양심을 흐리게 만들었습니다. 세상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죄를 지으며 살던 사람들이 교회에만 들어오면 성직자들은 하느님의 대리자와 중개인으로서 하느님의 징벌을 면하도록 단번에 모든 죄를 용서해주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의 양심은 죽어갔고, 양심과 신앙은 분리되었습니다. 일요일에 교회에 나오는 목적은 세상에서 지은 죄를 용서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징벌을 면하고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양심은 신앙생활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죄의 용서를 받는 곳이니 교회 건물 안에만 들어오면 깨끗해지고, 양심에 대해서 묻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정부의 불의에 항거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촛불 시위를 하는 사람들과 달란트의 비유의 세 번째 하인과 월 스트리트의 시위자들은 신앙생활과 세상생활, 그리고 양심과 신앙을 분리 할 수 없습니다.
이 땅 위의 하느님 나라 기독교로 전환해야 하는 교회 기독교는 용감하게 양심을 선언하는 곳이 되어야 하는데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해서 양심을 은폐하고 외형적인 부흥과 성공을 부추기는 가식으로 가득한 곳으로 전락했습니다. 정직과 양심의 상징인 교회가 부정직과 양심불량의 상징이 되어 세상의 신뢰마저 잃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세 번째 하인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정죄한 주인은 거칠고 무례하고 돈 밖에 모르는 탐욕스러운 기업인입니다. 그는 더많은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과 실직자들과 땅을 잃은 사람들의 고통과 절망 따위에는 추호도 관심이 없고, 더많은 부를 축적하고 세상의 명예를 얻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처음 두 하인은 이러한 주인의 철학과 삶의 방식을 추종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하인은 주인의 방식은 공정하지 못한 착취라고 단정하고 이러한 삶의 방식에 동참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탐욕과 부패와 권력남용에 항거하기 위하여 자신의 양심을 선언했습니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이러한 양심 선언자는 언제 어디에서 피해를 당할지 모르며, 비난을 면치 못하고, 손가락질을 받으며 모욕을 당하기 쉽습니다. 주류에 편승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잘난체 한다고 왕따 당하기 쉽습니다.
역사적 예수는 자신의 명성과 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통치하는 세상을 새롭게 그리기 위하여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은폐되고 숨겨진 불편한 진리를 폭로했습니다. 사람들이 생존의 두려움으로 양심의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을 때에 예수는 ‘여러분들이 진리를 밝히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를 지를 것’이라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양심의 진리를 선언하면 부와 힘을 가진 사람들은 분노하고 자신을 방어하겠지만, 힘없는 사람들은 희망과 용기를 얻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어느 쪽에 서 있습니까? 나의 가진 것들을 잃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의 이익과 명예와 성공을 희생시키더라도 다른 사람이 힘을 얻도록 나의 양심을 선언하고 있습니까? 또한 내가 지금까지 지켜왔던 믿음이 나를 보호해 줄 것이라고 확신했는데 양심 선언으로 인해서 그 보장을 잃을까 두렵습니까? 예수는 어느 쪽에 섰습니까?
예수의 비유는 죽은 후에 하늘 위로 올라가는 교리가 아니라, 이 세상을 뒤집어 엎는 이야기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다음의 질문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비유가 뒤집어 엎으려는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예수는 우리가 어떻게 살면 불공정한 세상이 뒤집어지고 새로운 세상으로 변화된다고 도전하고 있습니까? 세상과 교회는 서로 상호관계 즉 상호협력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기독교인들은 교회생활과 세상생활을 따로 분리해서 두 개의 얼굴로 살아갑니까? 만일에 교회생활과 세상생활이 두 얼굴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면 모든 인류의 현재와 미래는 훨씬 달라질 것입니다. 또한 새로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어디에 속박당하지 않고 자유하게 살 것입니다. 캐나다에서 가장 빈부차가 높은 앨버타에서 높은 빈곤율도 사라질 것입니다. 지구촌에서 몇 몇 나라들만이 부유하게 살고, 나머지 수많은 나라들은 빈곤 속에서 살지 않을 것입니다. 전 세계의 나라들이 하나의 상호의존의 망을 이루어 살면서 자원과 기술을 공유하면서 공평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잘 사는 나라들이 빈곤한 나라들의 부채를 완전히 탕감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지연(地緣), 학연(學緣), 종교, 인종을 넘어서야 합니다. 우리 모두 스스로 온 인류가 공평하게 잘 살아갈 수 있는 공정하고 공평한 세상이 되는 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면서 오늘의 비유의 세 번째 하인처럼 용감한 ‘양심 선언자’로 살아 갑시다. 이것이 예수가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는 진리입니다.*
참고 문헌 소개:
존 도미닉 크로산, ‘비유의 위력’, 한국기독교연구소, 2012;
버나드 브랜든 스캇, ‘예수의 비유 새로 듣기’, 한국기독교연구소, 2006;
존 도미닉 크로산, ‘어두운 간격’, 한국기독교연구소, 2009;
Robert W. Funk, ‘Funk on Parables’, Polebridge Press, 2006;
John Dominic Crossan, ‘In Parables: The Challenges of the Historical Jesus’, Polebridge Press, 1993;
Barbara E. Reid, ‘Parables for Preachers’, The Liturgical Press,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