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에는 내가 근무하던 미국세관에서 캐나다의 밴쿠버로 파견되어 4년이란 기간을 밴쿠버국제공항에서 보내게 되었다. 사실 어느 지역을 그저 잠시 방문해 보는 것과 얼마간의 기간이라도 살아보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래서 나는 “보는 것이 믿는 것”도 맞는 말이지만 “사는 것은 믿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밴쿠버가 얼마나 아름다운 도시인가 또는 캐나다는 얼마나 광활하고 아름다운 땅을 가진 나라인가라는 따위의 얘기는 많이 들어온 터라 이젠 전혀 새롭지도 흥미가 있지도 않다. 그리고 미국이나, 캐나다, 러시아, 중국과 같이 엄청난 땅을 가진 나라에 관한 얘기는 늘 코끼리의 어느 부분을 보고 느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경우 그저 자기가 살던 지역에 대한 관찰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나와 같이 비교적 많은 여행을 한 사람이라고 해도, 실제로 긴 시간을 머문 곳은 별로 없어서 어느 지역에 관한 얘기를 할 때는 조심스럽다.
그래도 캐나다의 밴쿠버라는 지역에서는 4년이란 세월을 보냈고, 또 내 천성이 싸돌아다니는 것이라서 그래도 나름대로 많은 곳을 보고 경험했다. 더군다나 나는 캐나다에 이민자로 간 것이 아니고, 나의 미국직장에서의 파견근무지로 가게된 것이라 비교적 시간도 많고 여유도 있었다. 더군다나 밴쿠버는 세상에서 아름답고 살기 좋은 도시로 해마다 그 이름이 국제적으로 오르는 도시라서, 사실 내가 있던 직장에서도 이 곳에 오려는 사람이 많아 늘 경쟁이 심한 곳이기도 하다. 나에게 밴쿠버가 더욱 친근한 것은, 내가 미국에서 육군에 복무할 당시의 근무지가 시애틀이라는 도시 부근이라서 이 밴쿠버를 여러 번 방문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이곳에서 2004년에서 2008년까지의 4년간을 살게 되었다.
나는 일반적으로 숫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숫자에 대한 맹신은 활자에 대한 맹신보다 더 무섭다. 숫자는 늘 조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글에는 통계를 인용하는 경우도 드물다. 그러나 세상에 살아보면 모두 수치를 원한다. 모두가 수치를 요구하므로 세상에서 통용되는 수치는 늘 자기들에게 좋게 조정되고 변형된다. 그러니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숫자는 그야말로 숫자놀음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편향된 시각이 내게 있기 때문이다. 캐나다는 미국의 속국이나 다름이 없다는 얘기를 나의 미국동료들이 할 때마다 그들은 숫자를 제시한다. 반대로, 캐나다는 미국이란 나라가 없어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내 캐나다 친구들의 반박의견에도 그 숫자는 동원된다. 사실 지금에 와서 이런 토론은 의미가 없다. 21세기의 세상은 그저 서로 얽히고설킨 실타래와 같은 것이니까 말이다.
밴쿠버가 위치한 “브리티쉬 콜롬비아(BC로 불림)주는 캐나다의 태평양에 연한 곳이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이 가장 확실하게 잘 보존되고 있는 그런 곳임에 틀림없다. 밴쿠버는 이 아름다운 주의 가장 큰 도시이고, 위대한 자연과 인간이 얼마나 잘 공존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체험 장이기도 하다. 누가 내게 말했다. ”이 곳은 놀 곳은 너무 많은데, 놀아 줄 사람이 모자라는 곳이다“라고 말이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자연에 사람은 드문드문 보인다. 여름에 이 곳을 방문해 보면 천국과 같은 곳이 이 지구상에 있으면 바로 이 곳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신은 그렇게 모든 것을 그리 쉽게 인간에게 다 내주지 않는다. 그 황홀한 여름 3, 4개월이 지나면 세상은 온통 회색빛이다. 간간히 해가 얼굴을 디밀기도 하지만 쓸쓸하고 어두운 잿빛의 하늘과 길고 어두운 밤, 그리고 뼛속을 차게 하는 찬비가 연이어 이 땅을 지배한다. 게다가 먹고사는 문제가 상당히 중요한 이민자들에게는 생업을 찾기도 쉽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이 어느 지역에 살려면 얼마간을 살아봐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이 을씨년스런 겨울을 지내보지 않고 밴쿠버의 아름다움만을 찬양한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겨울비를 사랑하고 즐길 수 있고 적당한 일거리를 찾을 수 있는 이들에겐 밴쿠버는 지상의 낙원, 말 그대로다. 그러니 신은 아주 불공평하게도 생각되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공평하기도 하다. 아무튼 밴쿠버는 참으로 좋은 도시였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아름다운 자연 속의 도시, 환경과의 조화를 이루려는 시민들의 의식, 질서와 배려를 존중하는 시민정신 등이 이 도시를 세계에서 가장 선호하는 도시로 만들었다.
많은 곳을 여행했고 여러 곳엘 살았다. 살았던 도시는 주로 바다와 산을 낀 도시였다. 순서대로 서울, 로스앤젤레스, 시애틀, 밴쿠버, 부산, 요코하마 그리고는 지금 이 곳 제주의 서귀포다. 사람이 사는 곳은 다 살만한 곳이다. 그런데 어느 곳이 더 좋다 아니다는 아주 주관적인 것이다. 지금은 제주의 서귀포에 한 일 년여를 살았다. 여기서 만나는 여러 사람들 중에 밴쿠버에 7개월 제주에 5개월을 사는 한 부부를 안다. 남편은 네덜란드 사람이고 부인은 한국인인데, 남편은 제주를 선호하고 아내는 밴쿠버를 선호한다. 두 사람의 기호에는 서로 양보가 없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그 곳과 이 곳을 나누어 사는 것이다. 그래도 그런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서 이렇게라도 할 수 있는 것은 축복이다. 많은 경우에는 다른 선택이 없어서 그냥 산다.아니면 용기가 없어서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위에서 이미 말했지만, 사람이 정상적으로 살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살만한 곳이다. 이제부터는 생각과 태도의 문제다. 사람이 사는 일에는 행복과 불행은 늘 함께한다. 다른 한 가지는 불행은 많은 경우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게 주어지지만, 행복은 내가 내 주위에서 줍는 것이다. 불행이 아무리 많이 닥쳐와도 평소에 늘 행복을 거두는 일에 소홀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내가 내 주위에서 거둔 행복이 내게 닥치는 불행을 상쇄하고도 남게 된다는 믿음을 가지기만 하면 세상 살기가 훨씬 편해질 것이라는 것을 꼭 말하고 싶다. 천국은 이 세상에 분명히 없지만 천국 같은 마음은 가질 수 있다. 그러면 내가 사는 세상은 천국과 같은 곳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