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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기너머 고개밑에 그들은 살아있을까 2/5_김덕선(캘거리 교민)
1989년 4월, 39년만에 첫번째 이북 방문시 당시 유선이와 천 내역에서 포옹 
최근 김덕선 장로가 펴낸 본 책의 머릿말을 약 5회에 걸쳐 연재함을 알려드립니다. _편집부


(지난호에 이어)
나는 아버지의 일기 속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었다. 아버지는 자존심과 절조가 강하시고 박식하신 분이었다. 우리나라 유교정신에 의한 도덕관을 인생의 주추로 삼으셨던 분이었다.
원래 우리 집안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가정으로 이름이 나 있었고 부모에게 복종했던 여러 가지 일화가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비록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는 않는다. "는 옛날 군신과 선비의 모습으로 사시려고 애쓰셨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러한 신념과 도덕관은 무엇이라도 해야 살아 남을 수 밖에 없었던 전쟁 속에서는 적응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사람들은 구걸해야 하고 속이고 심지어 훔치기까지 하면서 생존하여야 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아버지의 자존심과 도덕관념은 변하지 않았다. 적당히 남과 타협하지도 못한 채 허덕거리며 사셨던 아버지의 안타까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버지는 자연을 사랑하는 분이었다. 늘 "땅은 정직하다. 심고 가꾸면 노력의 결실을 맺게 해 준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채소밭과 화단을 가꾸실 때 가장 행복해 하셨다.
1962년 1월 3일 나는 명선과 결혼을 하였다. 내 일생 최대의 행운의 날이었다. 우리의 결혼은 중매결혼이었다. 만주에서 병원을 운영하시던 큰아버지가 명선이네 가족의 주치의였던 것이 인연이 되어 두 가족이 만나게 되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부부의 연으로 맺어지게 된 것이다. 지난 세월이 고행의 연속이었던 나에게 처음으로 평화와 안정적인 삶이 찾아왔다. 생존투쟁으로 거칠고 험하게만 된 나에게 아내인 명선은 온유하고 순진한 인간으로 나의 황폐한 마음에 온화한 무엇인지를 느끼게 해 주었다.
그 후 가족과 함께 일본에서 2년, 월남에서 4년 동안 엔지니어로 근무한 후 1969년 캐나다로 이민을 왔다. 캐나다에 이민을 온 그날부터 헤어진 가족을 만나야 하겠다는 생각이 나의 머릿속에서 한시도 떠나 본적이 없었다. 언젠가는 만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그 때 세계는 두 진영으로 갈라져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간의 냉전이 심각하였고 특히 남북 간의 긴장 상태는 북한이 계속해서 야기하는 도전적 사건에 의하여 극단에 이르고 있었다.
1968년 1월에는 북한공작대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청와대를 침입하려 했던 사건이 있었고, 1974년 8월에는 박정희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여사가 암살되었고, 1976년 8월에는 판문점에서 북한 군인들이 미국장교 2명을 도끼로 살인하는 등 전세계를 놀라게 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또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버마를 방문하던 한국의 고위사절단 환영 연회장을 폭파시켜 남한 정부의 장관들을 포함한 여러 유능한 정치인, 지식인들이 사망한 사건은 북한 공작원 소행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1987년 11월 대한항공 비행기가 중동 상공에서 폭파되어 115명의 죄 없는 승객 전원이 공중분해 된 사건도 북한의 조작이었던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렇게 폭풍전야 같은 불안한 당시의 정세 속에서 가족들을 다시 만나려는 나의 꿈은 점점 희미해져 가는 듯하였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북한과 접촉하는 것을 말렸고 아버지는 특히 절대 반대를 하셨다. 공산당을 미워하고 의심하는 당신의 마음은 마지막 날까지 북한과의 그 어떠한 접근도 반대하였다. 또한 당시 남한 정부도 북쪽과 접촉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어서 우리가 만약 북쪽과 접촉하게 되면 남한의 가족들이 감시를 받게 되고 또 우리가 외국 여행을 하는데도 지장이 있으리라 해서 모두가 말렸다.
특히 아버지는 북한 가족이 우리의 연락을 받게 되면 남한에 간 반동분자들의 가족이라 다시 낙인이 찍혀 최악의 경우에는 강제수용소에 끌려갈지 모른다고 극구 말렸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벌써 칠순이 다 되셨는데 만일 살아계신다 해도 얼마나 더 사시겠는가, 나는 1985년부터 옛날 집주소로 무작정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들은 되돌아오지도 않았고 물론 받았다는 답도 없었다.
1986년. 나는 토론토에 있는 좌익계통 신문사인 '뉴코리아 타임스 (The New Korea Times)의 전충림 장로가 이북과 연락이 된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통해서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 드디어 1987년 5월 기적적으로 동생 문선에게서 답장을 받을 수 있는 역사적인 일이 일어났다.
내 일생 최고의 감격적인 날이었다. 37년 전 그 숙명의 겨울 아침에 헤어졌던 가족을 다시 찾은 것이다. 그러나 그 감격적인 편지에서 어머니와 바로 아래의 동생 영선이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그 후 2년 간의 편지 교환 끝에 아버지와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1989년 4월, 결국 나는 아내 명선과 함께 북한을 방문하는 길에 오르게 되었다. 불안과 흥분이 교차되는 잊을 수 없는 여행이었다.
북경을 거쳐 평양 공항에 도착하니 공항이란 곳이 너무나 한산하고 초라하였고 낡은 비행기 몇 대와 격납고가 하나 둘 뿐이고 주위는 허허벌판이었다. 입국수속을 하는 관리들은 전부 군복을 입었고 주위의 분위기는 삼엄하고 살벌하였다. 세관에서는 짐을 거의 조사하지 않았고 안내원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체류하는 동안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인사가 끝나고 여권을 보관해 주겠다고 할 때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대로 감금되고, 다시는 영영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몸이 떨렸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없었고, 안내원은 늘 예의 바르고 친절하게 우리를 안내하고 도와주었다.
동생 문선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39년 만에! 길고 길었던 39년! 우리는 서로 껴안고 울었다. 너무도 골 깊은 원한의 39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과거가 되었다. 내 생애 최고 절정의 순간이었다.
유선이가 사는 천내역에서 수자(진선)와 유선이와도 감격적인 포옹을 하였다.
천내 가까이에 있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묘를 찾아서 오열 속에 인사를 드렸다. 그 후 동생들과 조카들과 함께 둘러 앉아 39년간의 기나긴 추억들을 나누며 밤을 새웠다. 후에 안 일이지만 우리가 방문하게 되니까 국가에서 처음으로 우리 가족들에게 독채 아파트를 분양해 주었다고 했다.
내 가슴속의 큰 짐이 벗어졌고 내 생애의 가장 큰 사명을 다한 듯 한 기분이었다.
1989년 북한의 첫 방문 후에 우리는 네 번 더 북한을 방문하였다. 마지막 방문은 2007년이었고 금년 가을 북한 방문은 희선이 부부와 수경이와 정화(Alex)를 데리고 갈 생각이다. 우리 두 내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북한의 가족들과 끈을 놓지 않고 지내게 해 주고 싶었다. 그들이 비록 철의 장막 속에서 살지만 정신적으로라도 고립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
나는 다섯 번을 방북하였는데 그때마다 아내는 같이 동행하였다. 갈 때마다 내가 말리는 데도 불구하고 북쪽의 식구들에게 필요한 약, 의류, 일상용품 등을 트렁크와 등에 메는 가방에 잔뜩 집어넣어 무거운 짐을 마다않고 힘든 여행을 하였다.
북한의 안내원들은 북미대륙에서 우리처럼 부부가 여러 번 같이 가족방문을 하는 일은 없었다고 하였다. 아내 명선은 이북동생들에게 진정한 누나와 언니가 되어 주었다.
매번 방문할 때마다 우리는 북한의 경제사정이 악화되는 것을 보았다. 첫 번과 두 번의 방문 시에는 동생들 집에 방문이 허락되어 별다른 오락 시설은 없더라도 그곳에서 카세트 테이프(cassette tape)를 틀고 노래를 하며 즐겼고 음식도 나라에서 특별배급이 나와 식사도 불편 없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 번째 방문(1992년)때는 이미 교통(기차)이 정기적으로 운행이 되지 않고 식량이 모자라고 국민의 생활이 힘들게 되어서 가정에 방문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동생들만 평양에 올라와서 호텔에서 하루 이틀 만나든가 혹은 인근 시 근처에서 만나게 하였다.
1992년 우리의 세 번째 방문 직후부터 북한정부는 갑자기 문을 닫았다. 북미에서의 방문객은 물론 서신교환도 차단되었다.
1995년부터 1998년까지는 이북에서 말하던 소위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몇 년 동안 계속된 가뭄에다 홍수가 겹쳐 원래 부족했던 농산물의 생산량이 급격히 감소하면서 배급이 중단되고 수백만의 국민이 굶게 되고 수십만이 아사하는 참사가 생겼다.
나의 동생들도 예외 없이 절망적인 처지에 놓여서 배급이 끊겨지자 우리가 방문 시에 사주었던 텔레비전, 냉장고, 카메라, 시계 등을 팔아서 식량을 구했고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했음을 후에 알게 되었다.
당시 편지가 왕래되던 일본의 조총련계를 통해서 몇 번 애원의 편지를 보냈으나 회답이 없어 여러 방법을 강구하다 마지막으로 중국에 사는 이웃 사람의 형을 통해 문선이가 쓴 편지를 받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곧 단동에 사는 문선의 이웃사람의 형에게 송금을 했고 이것이 전달되었던 것이다.
그 단동에 사는 사람에게는 40%나 되는 커미션을 지불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 돈이 전달 된 때는 문선이 가족이 아사 직전으로, 온 가족이 퉁퉁 부은 배로 누워서 죽을 날만 기다렸을 때였다.
1999년 북한 정부가 다시 문을 개방했을 때 우리는 북한을 네 번째로 방문했다. 동생들의 뼈만 남은 앙상한 모습은 그들이 얼마나 고생 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하였다. 그 불쌍한 처지에 눈물이 절로 났다. 우리는 방문할 때마다 또 허락이 될 때마다 돈을 보내 그들을 도와주었다. 북한에서는 미국을 제국주의자라 항상 욕하고 비난하면서도 미국 달러를 가장 환영하는 그 모순된 모습을 우리는 북한사회에서 보았다. 북한에서는 외화를 마음대로 쓸 수 있어 외화를 가진 사람은 특수층의 생활을 할 수 있다.

(다음 호에 계속)
본 책 구입을 희망하는 분은 CN드림 편집부로 연락 바랍니다. 권당 $12불.
☎ 403-875-7911


기사 등록일: 2013-11-08
운영팀 | 2022-06-01 10: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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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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