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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기너머 고개밑에 그들은 살아있을까 총 5회중 마지막회_김덕선(캘거리 교민)
 
최근 김덕선 장로가 펴낸 본 책의 머릿말을 5회에 걸쳐 연재함을 알려드립니다. _편집부

(지난 호에이어 계속)
그 어려운 살림 속에서 적지 않은 시간과 그들에게는 너무도 큰 재정적 희생을 하면서 보인 형제의 우애와 정은 우리의 눈을 또 한 번 적시게 하였다. 그들을 보면서 남한이나 서방국가의 생활수준이 더욱 높아지고 물질 만능주의가 휩쓸고 있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고귀한 인간성(Humanity)을 잃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다음날 아침(10월 5일)에 동생들이 와서 오늘은 송도원에 나가자 했다. 우리는 반은 차를 타고 나머지는 백사장 옆을 걸었다. 아름다운 소나무들을 배경으로 한 백사장에 닿으니 조카들이 플라스틱을 깔고 점심식사를 차렸다. 전날에 먹던 떡들, 순대, 과일이 가득했고 성련이가 아침 4시에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부두에 나가 아침에 잡은 큰 꽃게와 킹크랩을 삶아 내온 것이 진미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술잔이 돌아가고 웃음들이 고달픈 그들의 생활을 한시나마 잊게 하였다.
점심이 끝나고 우리 부부는 처음으로 백사장에서 동생들과 앉아 그들의 생활상을 대략 들을 수 있었다. 2007년에 왔을 때 그들에게 주고 그 후에 송금한 돈은 제수의 병간호(암으로 2008년에 사망), 계속되는 인플레이션, 부업을 하려고 한 투자, 또 자식들의 집 사는 것을 도와준 것(이북에서는 개인재산을 허락되지 않으나 집이나 아파트의 주거권리가 매매되는데 장소와 크기에 따라 1000달라에서 근 4000달라까지 거래된다 한다) 등으로 쓰여졌다 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필사적으로 일을 해도 적자생활이 되니 형님과 오빠가 주신 돈을 매달 빼먹게 된다고 늘 죄송하게 생각한다 했다. 나는 그들이 내가 없었으면 지금 살아남았다 해도 어떻게 비참한 생활을 할까 하고 내가 이남으로 내려가고 또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을 주신 하나님께 다시 감사했다. 허나 나는 동생들에게도 조카들에게도 나의 철칙인 자기 힘으로 살아야 하고 남에게 의지하려는 생각은 절대 버려야 한다고 거듭 훈시했다.
우리가 동생들과 두세 시간 정도 얘기하는 동안 수경이는 조카들과 손자손녀들을 동원해 같이 모래사장에서 뛰어 놀며 달음박질 등을 조직해 재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모두 대사 부인이라니 위엄과 형식을 갖추는 접근하기 어려운 언니, 누나(수경이가 나이가 제일 많음)라 생각했으나 생각보다는 너무 다르고 명랑하고 외향적이어서 모두들 그를 따르고, 어른들, 안내원, 원로처 간부까지 그를 칭찬해 다른 어디서나 그렇듯이 인기가 대단했다.
마지막 날 저녁 조카들과 안내윈들이 희선이를 통해 불고기로 저녁식사를 했으면 하는데 돈이 700~800달라 정도 들것 같은데 그렇게 '조직'해도 되겠느냐 했다. 큰아버지가 몇 년 만에 와서 고기 한번 먹여 줄 수 없겠는가 하고 쾌히 승낙했다. 같은 식당에 가서 우리가 모두 31명 안내, 운전수, 원호청 직원까지 모두 34명이 불고기, 삼겹살, 오리고기를 마음껏 먹었다. 물론 소주가 나왔다. 총 금액이 515달라 나왔다.
얼마 전의 인플레이션과 음성경제를 없애려고 실행한 화폐개혁은 완전실패로 돌아갔다 한다. 이를 계획한 사람은 사형으로 처형되었고 100대 1로 추렸던 화폐가치는 실제적으로는 그 전으로 돌아가 버렸다.
2007년 우리가 왔을 때 1달라에 약 3300윈 이었는데 100대 1로 개혁했으니 1달라에 33윈이 되지만 실제는 다시 1달라에 3000원 정도가 되어 화폐가치가 근 1/100로 떨어졌다는 얘기가 된다.
더구나 2007년 보다 인플레이션이 심해져 1kg의 쌀이 700원 하던 것이 900원이 됐고 1000원이 넘어간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지금 1kg에 2600원 정도라 한다. 달라를 기준으로 계산을 해도 물가가 과거 4년간에 3배정도가 올랐다는 얘기다.
고급기술자의 월급이 3300원이고 많은 직장에서는 배급이 없고, 배급이 있어도 양이 형편없이 모자라니 그들의 생활이 얼마나 힘들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짐작 할 수 있었다. 한 정부 간부로부터 수백만이 굶어 죽었다는 말을 직접 들었을 때는 그의 솔직함에 깜짝 놀랐다. 이북사회가 그만큼 비참했다는 것과 당국에서도 공인하는 정도까지 됐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 말하는 가운데 얻은 결론은 한 가정이 최소 100달라에서 150달라 정도의(지방과 배급에 따라) 생활비가 한 달에 필요하다는 것이다.
2007년에 한 달 생활비가 35달라 정도라는 말을 들었으니 300%의 인플레이션이라는 말이 다시 한 번 입증이 되었다. 한 달에 1달라 밖에 안되는 남편들의 월급으로 생존하려고 부녀자들은 필사적인 가내부업을 해서 생계를 보충한다. 옷장사, 아이스케키 장사, 뜨개질, 건축용 쿠록코 생산, 시장에서 비닐백 장사, 외화(외화가 이곳에서는 생명이다)를 버는 기관에 취직하기 위해 의사직을 포기 등등 피눈물 나는 생존의 결투가 계속된다.
원산에 도착하는 날부터 나는 우리가 살던 동네인 명석동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89년에 왔을 때 우리는 그곳을 돌아보았으나 희선이와 수경이에게 내가 자란 동네를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즉각 거절이다. 이 문제를 몇 번 제기하고 원산시의 간부에게도 부탁했지만 안 된다는 것이다. 궁리 끝에 선물을 했다 그랬더니 떠나오기 하루 전에 약간의 희망적인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최종결재가 떨어지진 않았지만 지금 '토론'중이며 약 80(4정도의 기회가 있다는 것이었다.
밤늦게 소식이 왔다. 가봐도 좋다는 허가가 나왔다는 것이다. 단, 사진은 찍지 못한다 했다. 아침 10시 출발을 당겨 9시 반으로 하고 가는 길에 들리기로 했다. 아침에 준비하고 나오니 30명 되는 온 식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 사람씩 부둥켜안고 이별인사와 격려의 말을 해주었다. 눈물이 계속 흘렀다. 집 없이 벽촌에서 밭을 개척하며 토굴 같은 데서 사는 성혜에게 특히 위로를 하고 집을 장만할 수 있도록 알선해서 알려주었다.
성철이에게는 이제 어머니 3년상이 지났으니 아버지가 새어머니를 맞아 앞으로 여생을 좀 편안하게 사시도록 알선하라는 부탁을 했다. 악처가 효자보다 몇 배 낫다는 우리나라 옛말을 상기시키며‥
어쩔 수 없는 이별의 시간이 되었다. 넓은 마당에서 총총히 서서 눈물을 흘리고 손을 흔드는 그들의 모습을 뒤로 하며 그들을 다시 갈 수 없는 딴 세상에 두고 오는 듯한 기분이 들어 말할 수 없는 비애감에 잠겼다.
옛날에 그렇게 멀다고 생각되던 명석동을 송도원에서 불과 몇 분 만에 도착했다. 허나 1989년 때보다도 또 너무 많이 변해 알아볼 수 없었다. 명석소학교로 올라가는 넓은 길이 꼬불꼬불해지고 험하고 큰 돌 덩어리로 깔려져 차 밑 보데가 덜컹거릴 때마다 땅에 부딪치는가 하면 차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아슬아슬한 고비가 있었다.
왼쪽 옛날 우리 집 아래에 있던 밭이 1989년에는 오막사들이 잔뜩 있었는데 이제는 콘크리트아파트와 집들이 총총 들어서 있었다. 다만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전쟁 중에 폭격을 면한(원산은 폭격과 함포 사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어 남았던 큰 건물은 손꼽을 정도였는데 명석소학교 건물은 산 밑에 놓여있어 남아있게 되었다) 학교 건물과 길 왼쪽에 있었던 도랑이었다.
언덕 위에서 겨우 차를 돌려 내려오며 안내원들이 우리에게 보여주기를 꺼려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네 시간 동안 콘크리트로 포장돼 매우 울퉁불퉁한 길을 오다 보니 아내의 지병인 좌골통이 심해 고생을 했다. 오후 2시경 평양에 도착하자 원래 계획했던 관광을 취소하고 침대에 누우니 몸과 마음이 천근같이 무거워 꿈 없는 깊은 잠이 들었다. 얼마 만에 깨어보니 새벽 2시15분이었다. 무려 12시간 동안 의식을 잃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지난4일 68시간 동안 동생들과 지냈던 꿈같은 시간에서 깨어난 것이었다.
원산에 있는 동안 유선이가 계속 이것이 꿈같다고 말하며 꿈이라면 깨어나지 않았으면 하던 말이 생각났다. 허나 꿈은 가고 피할 수 없는 비정한 현실이 다시 찾아온 것이었다.
우리들의 몸과 마음의 피로, 수경의 알레르기, 승연의 차멀미 등으로 다음날 묘향선 관광여행을 하려던 것을 취소하고 만수대 창작사, 만수대 종합미술관, 두 매장에 들려 풍경을 그린 손수 3개와 그림 한 장, 마른 더덕과 고사리 등을 사고 한둘 기념 건물 등을 구경하고 하루를 보냈다.
평양에서 우리가 제일 먹고 싶었던 것은 평양냉면이었다. 냉면은 세계 어디서 먹어봐도 본고장인 평양이 제일인 것 같다. 불행히 옥류관이 공사지구 안에 있게 되어 이번에도 옥류관 냉면을 못 먹게 됐다. 허나 고려호텔의 냉면도 옥류관에 못지않아 기회 있는 데로 거의 매일 냉면을 먹었다. 냉면 가격은 물냉면 100g에 3.10달라, 물냉면 200g에 5.10달라, 쟁반냉면이 250g에 7.10달라, 낙지볶음은 3.20달라, 김치가 200g에 0.70달라, 소주(사이다병만한) 1병에 3.20달라 였다. 진달래 식당에서 두 번 식사를 했는데 음식이 제일 좋았다. 시래깃국은 3.10달라, 꼬리곰탕이 12달라, 보쌈김치는 12달라, 밥 한 그릇에 1달라.(곰탕에는 밥이 안따라나왔음) 밥 한 그릇 값이 고급기술자의 한 달 월급과 같으니 일반 국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풀 수 없는 수수께끼 였다.
10월 8일 아침 9시 비행기를 타기 위해 6시에 일어나 평양의 마지막 아침을 먹고 올 때 보다 훨씬 가벼운 짐이었으나 소중한 기념품들 손수 가지고 오다 보니 모두 양손에 짐을 들게 되었다.
세관에서는 수경 이가 보관했던 MP3 플레이어를 쉽게 돌려받았다.
비행기는 만원이었으나 지연 없이 제시간에 이륙했다. 소리 없는 긴 한숨이 나왔다. 모든 긴장이 풀리고 지난 9박 10일의 희비극이 꿈속의 주마등처럼 내 머릿속에 스쳐갔다. 이렇게 우리들의 제6차 이북 방문은막을 내렸다.
2011년 10월 10일
중국 베이징 에서 김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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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책 구입을 희망하는 분은 CN드림 편집부로 연락 바랍니다. 권당 $12불.
☎ 403-875-7911

기사 등록일: 2013-11-29
운영팀 | 2022-06-01 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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