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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수필(유작) - 종착역
 
글 : 이종학
(이종학님은 지난 7월 20일 소천하셨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932년 임신 생, 참으로 오래 살았다. 나는 6남 6녀의 넷째로 태어났다. 지금은 다섯 동생만 생존했으니 장수인생의 반열에 끼어도 충분하다.
인간의 삶을 생로병사로 흔히 말한다. 그러면서 그 가운데 그나마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고작 늙는 일뿐이라고 한다. 생명의 법칙에 순종함이다. 늙음이란 몸의 상태가 자신에 맞게 알아서 길들여진다는 뜻이다. 황우 장사도 나이 앞에는 속수무책이다. 그렇다. 나는 충분히 늙었고 지금은 병까지 들었다. 종착역에 바싹 다가서고 있다.

종착역은 끝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새로운 길을 찾거나 다시 돌아간다는 개념은 갖지 않는다. 종착역에 도착한 기차는, 언제든 바다로 나가기 위해 항구에 돌아오는 배와는 다르다.
종착역사 벽에 붙은 기차 운행 시간표를 볼 수 없다. 종착역에서 하차하는 승객은 바로 불귀의 객이다. 그래서 누구나 빈손이다.
그동안 빌려 쓰고 얻어 썼던 모든 것을 고스란히 돌려주거나 놓아두고 떠나온다. 공수래공수거는 바로 인생의 근원적인 존재를 깨닫게 하는 하늘의 냉혹하고 가차 없는 질서다. 해가 지는 자연 현상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람들은 죽음의 엄연한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나만은 예외이기를 바란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종착역을 향해 살아가는 셈이다. "죽음을 잊지 말라. 인간은 스스로 어쩔 수 없는 단 한가지 필연의 법칙에 의해 생을 강제 받는 존재이다. 그것은 바로 한 번 태어난 사람은 여지없이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는. 어찌 보면 매우 비극적인 필연이다. 따라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언젠가는 죽는다. " 톨스토이가 한 말이다.
이 숙명적인 종착역은 누구에나 기피와 공포의 대상이다. 100년, 그 이상 살것 같은 삶의 의욕을 잃지 않는다. 오래 살려는 욕심을 오욕의 하나라 하고 장수를 오복에 포함했다. 인간을 평생토록 지배하는 유혹이다.
그렇다고 죽음이라는 영원한 이별을 거역할 수 없다. 우주의 절대적 힘 앞에서 언제이든 무로의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잘 죽는 게 잘 사는 것보다 소중하다는 말들을 많이 들으며 살아왔다.

이제 나는 삶의 끝자락인 종착역에 바싹 다가서고 있다. 병원은 암 판정을 내렸다. 간과 폐에 심각한 이상이 생겼음을 진단했다. 병마는 도둑고양이처럼 소리소문 없이 온다더니 맞는 말이다. 갑자기 배에 진통이 와서 병원 응급실에 들어갔다가 생명의 시한이 멀지 알았음을 알게 되었다.
남은 시간 주사위를 던지는 심정으로 죽음을 곱씹어 음미하며 살아야 한다. 나는 천수를 누린 셈이다. 생명 연장의 요행을 접고 순순히 하늘의 질서를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살아온 날들을 다시 되돌아본다.
글을 통해서 회고의 기회는 여러 번 있었지만, 지금과는 아주 달랐다. 죽음을 맞이한 참회와 살아 있음을 전제로 한 회고는 차이가 있다. 여러 사람의 회고록을 읽으면 그런 면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나는 85년간 한결같은 시간 위에서 삶의 행로를 걸어왔다. 절대로 짧지 않은 생애였다. 그런 중에서도 많은 사람과의 관계는 바로 희로애락 그 자체였다. 우여곡절과 좌충우돌로 점철된 삶의 연속이었다.
나는 우연이든 필연이든, 부정이든, 긍정이든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교류하면서 생을 영위했다. 인간이 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제 이렇게 살아온 내 흔적을 고백할 때가 왔다. 생의 마감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생애의 고백은 간명하고 솔직해야 한다. 그렇다. 순수하고 진솔한 자신의 살아온 백서이어야 한다. 그래서 이렇게 참회록을 적는다. 한 마디로 '폐를 끼친 자'이다.

한 마디로 인생이 다녀간 몫을 못했다. 첫째로 부모에게 저지른 불효는 막급함이 태산과 같다. 그리고 그 다음이 55년 동안 나와 살아준 아내이다. 형제자매와 가깝고 먼 인척들, 각종 인연으로 무람없이 지냈던 친구 친지들을 누구 한 사람도 빼놓을 수 없다. 그 밖에 이런저런 기회와 이유로 만나 교류했고 또한 어쩌다 헤어진 많은 사람 모두에게 여러 모의 혜택을 입었고 막중한 폐를 끼쳤다. 주기보다는 얻은 편이 절대적이다. 물론 나의 사랑하는 1남 3녀를 눈을 감는 순간, 아니 그 이후까지도 어찌 잊으랴.

이런 차고 넘치는 고마움을 모르는 척 지나치기도 했고 심지어 내가 오히려 바라는 것 없이 베풀었노라 자부하기도 했다. 어불성설이다. 인간 말종에게 보이는 최악의 치기이며 적반하장이다.
이제야 정중히 고개를 숙여 사죄한다. 반성하고 참회할 내일이 없는 자에게는 그나마 이 길이 유일하고 최선이다. 뻔뻔한 민낯의 메아리가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회자되리라. 마지막으로 감사하고 죄송함을 다시 한번 정중히 자백하고 싶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에 태어난 연유를 모른다. 누가 그랬던가?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되기 위해서 산다고 했는데, 한평생을 무모하게 살았음을 토로하는 심정은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잊지 않으려 한다. 나의 모든 이에게 회오와 회개의 탄원을 담아 사죄의 기도를 드린다.

신문발행일: 2018-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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