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불야성, 캘거리는 조용한 밤” 워홀러들의 문화 충돌 - 영업시간·소비문화·워라밸 격차 뚜렷
한국 연 1874시간 노동 '서울 불야성' , 캐나다 워라밸 세계 5위 '도심 셧다운'
캘거리 도심 전경 (사진 : CN드림)
(이정화 기자) 밤 8시. 캘거리 도심. 장을 보러 나온 한국인 워홀 청년의 발걸음이 멈췄다. 눈앞엔 불 꺼진 가게들뿐이다. 대형마트도 문을 닫았다. 골목 가게들도 ‘CLOSED’ 팻말을 걸었다. 24시간 편의점과 야간 쇼핑에 익숙한 이들에겐 낯선 풍경이다. 예상보다 조용한 밤거리. 많은 워홀러들이 이른 폐점 문화에 당황한다. 한국의 불야성과는 다른 일상이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영업시간부터 소비 문화, 근로시간, 워라밸(워크 라이프 밸런스) 인식까지 한국과 캘거리의 도시 생활을 비교해본다.
■ 일과 후 귀가 문화, 토론토·밴쿠버도 '노 펀 시티'
한국 도시민들의 활발한 심야 소비문화와 대비되는 캐나다 도시의 저녁 이후 정적 뒤엔 서로 다른 근로환경과 정책, 문화적 가치관이 자리잡고 있다.
캘거리의 주요 쇼핑몰들은 평일에도 오후 8시면 대부분 문을 닫는다. 예컨대 남부 지역의 대표 쇼핑센터인 Southcentre 몰의 영업시간은 월~수요일 오전 10시부터 저녁 8시, 주말인 일요일은 단축돼 오후 6시면 불이 꺼진다.
대형 마트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평일 늦은 저녁이나 일요일 밤에는 영업하는 곳을 찾기 어렵다. 캐나다 다른 대도시들도 예외는 아니다. 토론토나 밴쿠버 역시 밤 9시 이후엔 대형 상점은커녕 동네 슈퍼도 문을 닫는 곳이 많다.
주민 대부분이 일과 시간 후 곧바로 귀가해 가정과 개인 생활에 집중하는 문화가 자리잡은 탓이다. 이런 이른 셧다운 현상은 처음 겪는 이들에게 적잖은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실제로 밴쿠버는 밤늦은 유흥이나 야간 영업이 드물어 ‘노 펀 시티(No Fun City)’란 별명을 얻었다. 벤쿠버 시는 야간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술집 영업시간 연장 등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도심 상권은 앞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재택근무 증가로 더욱 한산해졌다. 글로벌뉴스 보도에 따르면 팬데믹 전인 2019년 이미 캐나다 주요 쇼핑몰들의 방문객 수가 감소 추세였다. 이후 온라인 쇼핑 급증으로 전통적인 야간 상권의 쇠퇴가 가속화됐다는 분석이다.
■ 심야까지 불 밝히는 한국 “밤이 더 활기찬 도시”
반면 한국 대도시들의 야간 풍경은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길거리 음식 판매대와 인파로 언제나 북적이는 모습이다.
특히 서울은 자정이 가까워도 불이 꺼지지 않는 가게들과 인파로 ‘불야성'을 이룬다. 번화가마다 24시간 편의점 불빛이 골목을 밝히고 심야까지 영업하는 음식점과 노래방, PC방이 손님을 맞이한다.
특히 편의점 업계는 ‘24시간 영업’이 사실상 표준으로 지난 2023년에도 약 79%의 편의점이 밤새 문을 열었다.
심야 영업은 편의점만의 얘기가 아니다. 서울 동대문 패션타운은 자정 이후 오히려 장사가 본격화된다. 이곳의 대형 의류상가는 밤 10시~11시에 문을 열어 이튿날 새벽 4~5시까지 영업한다.
서울시 공식 관광가이드에 따르면 동대문의 일부 쇼핑몰은 월요일 밤 7시에 시작해 화요일 새벽 5시에 문을 닫는 식으로 밤샘 영업을 이어간다.
명동과 홍대, 강남 등 번화가 거리에는 한밤중에도 네온사인이 꺼지지 않고 포장마차나 노점상의 음식 판매도 늦게까지 계속된다. 해외 관광객들 사이에서는 “자정이 가까워도 서울은 낮과 같은 활력”이라는 감탄이 나온다.
지방 대도시들도 규모는 작아도 각자의 심야문화를 갖고 있다. 부산 서면은 주말이면 새벽까지 젊은이들로 북적인다. 대구 동성로나 광주 충장로 등지도 늦은 시간까지 음식점과 유흥가의 불이 꺼지지 않는다.
이처럼 야간 소비문화가 발달한 배경에는 한때 세계 최장 수준이던 장시간 노동 속에도 시민들이 늦은 시간 여가를 즐겨온 한국 특유의 생활상이 있다.
늦게까지 일한 직장인들이 2차나 3차 회식으로 밤 시간을 보내고, 학생들도 야간 자율학습이나 학원 수업으로 밤늦게 귀가하는 일이 흔했다. 이런 까닭에 심야 영업 수요가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 근로시간이 만든 차이 “워라밸은 한국보다 캐나다”
야간 상권의 활력 차이는 근로 문화의 차이와도 맞닿아 있다. 장시간 노동이 일상화된 한국과 워라밸을 중시하는 캘거리가 이를 잘 설명해준다.
OECD 통계에 따르면 2023년 한국의 연간 평균 노동시간은 노동자 1인당 1872시간이다. 미국(1810시간)이나 일본(1607시간)보다 높은 수치다.
한국 정부도 주 52시간제 도입 등으로 노동시간 단축을 추진해 지난 10년간 연 200시간 이상 줄이는 성과를 냈다. 하지만 여전히 OECD 평균 대비 연간 155시간을 더 일하고 있다.
반대로 캐나다는 선진국 중에서도 비교적 노동시간이 짧은 편에 속한다. 현지 근로자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약 1600시간대로 한국보다 연간 200~300시간 가량 적다. 세계적 HR기업 Remote의 2024년 조사에서 ‘워라밸 지수’ 세계 5위에 오르기도 했다.
상점 조기 폐점도 근로자의 워라밸 존중 차원에서 사회적으로 용인된다. 예컨대 캐나다 일부 지역에는 법적으로 대형 상점의 일요일 영업을 제한하는 규정이 있다.
이런 통계들은 캐나다인들이 왜 저녁 시간을 철저히 가족과 개인을 위해 비워두는지와 한국 사회가 왜 늦은 밤까지도 돌아가는지 그 이면을 보여준다.
■ 워홀러들 "한국은 일밖에 몰라...24시간 시스템은 만족"
이처럼 두 나라의 밤 풍경은 몹시 다르다. 해가 지면 도시 전체가 휴식에 들어가는 캘거리와 해가 져도 잠들지 않는 한국. 워홀을 통해 두 나라의 문화를 모두 겪은 청년들은 각자 장단점을 몸소 느꼈다고 입을 모은다.
“캐나다에선 삶이 느려지고 사람답게 사는 법을 배웠다”는 이도 있고 “재미 없는 캘거리보다 한국의 활발한 저녁 도시가 그립기만 하다”는 이도 있다. 캘거리 워홀러였던 한 청년은 “한국은 여전히 일이 삶을 지배하는 느낌”이라면서도 "한국의 편리한 24시간 시스템만큼은 반갑다"고 말했다.
저녁 시간의 가치를 중시한 워라밸 선진국과 경제 발전을 이룩하며 밤낮없이 달려온 나라가 만들어낸 대조적인 풍경. 워홀러들의 눈에 비친 이 두 세계는 서로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남긴 채 오늘도 각각의 밤 8시를 맞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