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충근의 기자수첩) 광복절을 맞이하며
1945년 8월16일 서울역 앞
기쁨보다 걱정이 앞선 광복
1945년 8월15일 오전 12시 왜왕(倭王) 히로히토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무조건 항복한다고 발표했다. 항복이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았으나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는 것이 바로 항복이었다.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중국의 장개석 명의로 발표된 포츠담 선언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거부하면 즉각적이고 완전한 파멸이 있다고 경고했다. 포츠담 선언은 카이로 선언을 이행한다고 명시되어 있는데 이 선언에서 우리의 독립이 보장되었다.
카이로 선언은 수많은 식민지 중에서 한국만 딱 집어서 “앞으로3대강국(미국, 영국, 중화민국)은 한국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절한 절차를 거쳐 한국을 자유롭고 독립된 상태로 만들 것을 결의한다.”고 명시했다.
“한국을 적절한 절차를 거쳐 독립시킨다.”라는 구절이 나중에 신탁통치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으나 한국인들의 독립의지를 국제사회가 인정했고 임시정부가 중국을 상대로 외교적 교섭을 벌인 결과다.
35년2주만에 일본의 압제를 벗어났으나 광복이 마냥 기쁜 일은 아니었다. 해방되던 날 김구선생은 “아, 왜적의 항복, 이것은 기쁜 소식이 아니라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다. 천신만고 애써 참전 준비한 것 다 허사다” 라고 탄식했다.
임시정부는 중국의 도움을 받아 광복군 특공대를 조직해 연합군 일원으로 국내 진공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일본이 항복해 그동안 준비가 물거품이 되었다.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할 기회를 놓쳤으니 전후에 국제 발언권이 약해 질것을 걱정하며 탄식한 것이다. 선생의 탄식과 걱정은 광복 후 현실이 되었다. 광복 후 조국의 분단과 좌우 갈등, 625 동난 은 한국 현대사에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겨 주었으니.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한국 독립운동사에 김구가 있다면 프랑스에는 드골이 있다. 두 사람 모두 보수 우파로 불타는 애국심과 조국에 대한 충성심, 독립의지로 뭉쳐 있었다. 드골은 패탱이 나치에 항복해 독일의 속국이 되자 영국으로 건너가 망명정부 자유 프랑스를 세웠다.
상해 임시정부가 일본 상대로 무장투쟁 벌였듯이 자유 프랑스도 레지스탕스가 무장투쟁을 벌였다. 한국과 프랑스의 결정적 차이는 전쟁 말기에 생겼다. 자유 프랑스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고작 177명이 참전했다. 연합군 총 병력 15만-16만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되지만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도 단 한 명의 광복군이라도 연합군과 함께 서울에 진주해 광화문이나 종로 보신각 앞에서 김구 선생 모시고 열광하는 동포들과 함께 사진이라도 한 장 찍었으면 역사를 달라졌는데 두고두고 안타깝고 원통한 일이다.
광복과 분단, 동서 냉전, 이승만과 김일성
광복과 함께 분단이 왔다. 분단의 책임은 어디에 있을까?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얹은 소련은 만주 관동군 무장해제 시키며 물밀 듯 한반도로 밀려왔다. 미국은 당황했다. 소련군이 부산까지 내려오는 게 아닐까? 미 국방부의 젊은 장교 러스크 중령과 본스틸 중령은 다급한 중에도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복잡하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한반도를 대충 절반으로 나눠 “북위 38도선 이남으로 내려오지 말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남하하는 소련도 미국과 무력충돌을 우려해 바로 미국 제안을 받아들였다. 즉, 38선은 일본군 무장해제 시키는 임시 군사 분계선이었지 이게 영구 분단선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렇게 남북으로 갈라져 소련군과 미군의 군사통치를 받았고 미, 소의 대리인 이승만과 김일성은 반쪽짜리 권력을 잡아 영구분단으로 나아갔다.
우리와 경우가 비슷한 오스트리아를 보자. 오스트리아는 2차대전이 나자 국민 절대다수가 나치 독일과 합병에 찬성했다. 전쟁이 끝나고 연합국은 오스트리아에 책임을 물어 미, 영, 불, 소 4개국의신탁통치를 받게 되었다.
나라가 4동강 났으나 오스트리아 정치지도자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분단은 안된다.”라며 연합정부를 구성해 분단을 피했다. 그들은 그렇게 10년을 버티다 스탈린이 죽고 동서 화해 바람이 불자 마침내 점령군 내보내고 온전하게 독립해 중립국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분단과 한반도 분단을 동일선상에서 평면적으로 놓고 평가할 수는 없지만 이승만과 김일성이 반쪽짜리 권력이라도 잡으려고 분단이나 민족의 장래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국제정세가 동서냉전이 첨예와 되던 시기였다. 공산주의 남하를 막아야 할 미국은 남한에서 민족주의, 분단, 친일파 제거에는 관심도 없었다. 소련도 한반도에서 친소정권 수립이 절대적이라 한반도 분단은 관심에도 없었다. 그런 국제정세 속에서 이승만, 김일성이 미국 소련을 설득해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된 국가를 세우는 계획이 어렵기는 했으나 두 사람은 그런 노력조차 하지도 않았다.
김일성이 스탈린을 설득한 것은 통일된 정부가 아니라 소련의 지원을 얻어 무력 적화 통일하는 것이었다. 이승만도 타협에 의한 통일 정부 수립이 아니라 미국의 지원으로 정부를 세워 북진 통일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강대국 지원 얻어 상대를 제압하고 권력을 누리는 것으로 김구, 김규식, 여운형의 통일정부에 대한 포부도 열망도 의지도 찾아볼 수 없었다.
민족주의자와 미국 소련.
2차대전 후 동서 냉전이 고착화되는 과정에서 미국은 동맹국들의 실용주의적 안정을 우선으로 삼았다. 이런 현실에서 미국의 전략적, 경제적 구상에 비협조적이고 자주독립을 주장하는 민족주의자들이나 좌파 성향의 인물들은 경원 당했고 관료나 공무원으로 행정경험이 있는 친일파들이 우대 받았다. 미국은 필리핀에서도 항일운동을 벌인 민족주의자들이 토지개혁과 사회주의적 개혁을 요구하자 무력진압하고 친일파 지주 관료를 대거 기용해 반공의 방패로 삼았다. 미국의 민족주의자 제거 사례는 그리스, 베트남, 이란 등 지구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소련은 무자비하고 폭력적 방법으로 동유럽 국가들의 민족주의자들을 제거했다. 카틴 숲 대학살로 알려진 집단 학살에 폴란드 군인 경찰 민간인 22,436명이 숨졌다. 그들은 민족주의자, 반 혁명주의자로서 소비에트 연방에 비협조적이라 제거되었다. 발트3국에서도 20만명이 강제 이주 당하고 수만명이 집단 수용소에서 숨졌다.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에서도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소련의 집단학살이 이어졌다.
방법의 차이는 있지만 미국 소련(러시아) 모두 동맹국이나 위성국의 자주적 결정을 무시하고 민족주의적 열망을 억압해 민족주의자들이 설 땅을 잃은 것은 국제사회 질서로 생긴 비극이다. 광복과 함께 찾아온 분단도 당시 동서 냉전이라는 국제사회 질서에 더해 이승만 김일성의 권력욕이 낳은 비극으로 현재 진행형이다.
*소련은 유럽전선에서는 1941년부터 연합국 일원으로 참전하였으나 대 일본 전쟁은 일본의 패망이 확실시되는 1945년 8월8일 일본에 선전포고해 나중에 밥 숟갈을 얹고 껍데기만 남은 관동군 무장해제하며 한반도 북부를 슬그머니 점령했다.
소련과 미국은 2차대전이 일어나자 전략적 동맹이었을 뿐이고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적성 국가로 2차대전 후 다시 본래 관계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