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오는 겨울 _ 주정희 (캘거리 문협)
2026년 새해의 아침이 밝았다. 여느 해의 1월이라면 온 세상이 꽁꽁 얼어붙어 마치 영화 ‘겨울왕국’의 한 장면과 같은 풍경이겠지만, 요즘의 겨울은 그 위엄이 예전만 못하다. 캐나다의 겨울, 새해 첫날의 공기가 이제는 조금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우리 가족에게, 캐나다의 눈은 신기한 존재였다. 부산은 워낙 눈이 내리지 않는 도시여서 "부산에 몇십 년 만에 폭설이 내렸다"는 뉴스가 나올 때를 제외하고는 눈 없는 겨울은 우리에게 아주 평범한 일이었다. 결혼하던 그 해 겨울, 하룻밤 사이에 엄청난 눈이 내린 적이 있었다. 일요일 아침에 눈을 뜨니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신혼집 앞 초등학교 언덕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아이들이 쌀포대를 깔고 눈썰매를 타고 있었다. 눈이 거의 오지 않는 도시였으니 눈썰매가 있을 리 만무했다. 누군가 시작한 쌀포대 썰매로 동네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아침부터 하얀 눈을 만끽하고 있었다. 우리도 이웃에서 빌린 투박한 쌀포대 하나를 들고 언덕에서 한참을 미끄러지고 소리 지르며 오랜만에 아이가 된 것처럼 놀던 기억이 난다.
그랬던 우리였으니, 11년 전 캐나다에 이민 와서 만났던 눈은 행복 그 자체였다. 처음으로 영하 40도를 찍던 날, 우리는 일부러 중무장으로 하고 밖으로 나가 아이들과 "냉동체험"에 도전해보기도 했다. 1분도 안되어 눈썹이 하얗게 변한 모습이 재미있어 사진으로 남기며, 마치 관광객이 된 듯한 기분으로 살았던, 캐나다의 모든 것이 신기하고 새로웠던 때다.
하지만, 그 낭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민 초반에 살던 타운하우스에 차고가 없어 차를 밖에 주차해야 했는데, 겨울이 되면 아침마다 밤새 얼어붙은 유리에 낀 서리를 녹이기 위해 출근 30분 전엔 미리 시동을 걸어 차를 데워야 했다. 집 앞에 쌓인 눈을 치워 길을 내고, 차 위에 소복이 쌓여있는 눈을 매번 치우는 것도 큰 일이었으며, 유리 위의 얼음을 스크레이퍼로 깎아내는 것도 요령이 필요했다. 이렇게 눈을 다 치우고 나면 한 겨울에도 이마에 땀이 날 정도였다. 겨울이면 이렇듯 매일 아침 눈과의 전쟁을 벌였다. 한 번은 아이들을 스쿨버스 정류장에 데려다주다 ‘꽈당’하고 미끄러진 일도 있었다. 캐나다의 빙판길을 겪어보지 못한 내가 바닥이 매끈한 부츠를 신고 달리다, 순간 하늘로 날아올랐다가 엉덩방아를 찧은 것이다. 너무 아파서 눈앞이 노래졌다. 그 후론 신발을 살 때 첫 번째 조건이 ‘미끄럽지 않은 아웃솔’이 되었다.
겨울의 눈길 운전 또한 여전히 두렵다. 도로의 눈이 차곡차곡 다져져 스키장 바닥처럼 미끄러워지면, 브레이크를 밟아도 차가 서지 않는 공포를 경험하게 된다. 그럴 땐, 내 심장도 따라 미끄러지고, 운전이 너무나 떨리고 두려운 존재가 된다. 특히, 바람이 많이 부는 밤, 바닥의 건조한 눈이 하얀 돌풍을 일으키며 유령처럼 흩날릴 때면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으스스하다. 이제는 눈길 운전 10년이 넘어 어느 정도 베테랑이 되었지만, 매년 겨울이 시작되면 다시금 숨어있던 두려움이 올라와 초보처럼 운전대를 꽉 쥐게 된다.
처음 이민 왔을 때는 겨울이 거의 6개월 동안 지속되었던 것 같다. 10월부터 눈이 내리고 3월까지도 추위가 이어지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다 보면 겨울 내내 입고 다니던 패딩이 슬슬 지겨워지며 "언제나 겨울이 끝날까?" 하는 생각과 함께 이 겨울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특히, 3월 즈음 눈이 녹기 시작할 때면 길은 진흙과 얼음이 뒤섞인 슬러시가 되어 버리곤 했다. 깨끗한 신발을 신고 다니는 것은 아예 포기해야 했고, 차 바닥에 고무 매트를 깔아 두는 것은 필수였다. 야외 주차장마다 제설 작업으로 쌓인 눈더미가 곳곳에 거대한 산을 이루는 풍경은 캐나다에서만 볼 수 있는 기이한 장관일 것이다.
그랬던 캐나다의 겨울이 지금은 10년 전과 많이 달라졌다. 지구 온난화를 실감할 정도로 정말 많이 따뜻해졌다. 영하 35도 이하에만 꺼내 입는 제일 두꺼운 파카는 안 입고 건너뛰는 해도 많아졌다. 11월에도 눈을 보기 힘들고, 12월 조차 눈이 내렸다가 녹았다를 반복한다. 오히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올해는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를 기다리게 된다. 눈이 오지 않는 겨울은 왠지 아쉽다. 예전에는 눈을 치우느라 고생했는데, 이제는 오히려 눈 없는 겨울이 밋밋하고 아쉽게 느껴지다니 아이러니하다.
눈이 오면 여러가지 불편한 일도 많긴 하지만, 집 안에서 바라보는 눈 오는 날의 풍경은 여전히 아름답다. 따뜻한 코코아 한 잔을 마시며 창밖을 내다보면, 집집마다 전등에 불빛을 밝히고, 나무들이 하얀색 코트를 입고 고요한 분위기를 더한다. 좋아하는 음악까지 틀어놓으면 괜스레 설레는 마음이 들고 기분이 좋아진다. 눈 없는 겨울은 얼마나 심심할까. 마치 코코아에 마시멜로가 빠진 것처럼. 그래... 역시 겨울은 눈이 있어야 제맛이다.
세상에서 눈이 없어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면, 후세에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차갑지만 따뜻하고, 가볍지만 무겁고, 손으로 만질 수 있지만 금세 사라져 버리는 것?"
겨울이면 따뜻한 겨울부츠를 꺼내고, 비니를 푹 눌러쓰고 뽀드득 소리 내며 눈길을 걷는 낭만이 분명히 있다. 밴프에 가서 청량한 하늘과 대비되는 설산을 바라보고, 한겨울 뜨거운 야외 스파에 몸을 담그고 있을 때도 차가운 눈이 없다면 그 매력이 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예전처럼 매일이 겨울왕국은 아닐지라도, 2026년의 겨울엔 딱 그만큼의 낭만을 즐길 수 있을 정도의 눈이 와준다면 참 고마울 것 같다.
뽀드득거리는 그 소리만큼이나 선명하고 기분 좋은 소식들이 가득한 새해이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