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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여행 중인 딸에게 _ 오충근의 기자수첩
 
 
5월이 주는 희망과 절망

지금쯤 너는 아이슬란드 네덜란드를 거쳐 베를린에 있겠지. 파리는 5월 말에 간다고 했던가? 5월 말의 파리, 따사한 햇빛 아래 푸릇푸릇 돋아나는 새싹과 꽃봉오리에서 사람들은 삶을 돌아보며 희망을 노래하지만 5월의 파리는 희망과 기대가 절망과 핏빛 비극으로 끝난 달이기도 해.
시계바늘을 돌려 1871년 봄으로 가보자. 보불전쟁(Franco-Prussian war)에서 프랑스가 패하고 황제 나폴레옹 3세는 포로가 되었단다. 삼촌 나폴레옹과 달리 군사적 재능이 없었던 모양이라. 프랑스는 무능한 제정을 무너뜨리고 공화국을 세웠다. 그러나 제정 못지않게 무능한 임시정부는 계속 프러시아에 굴욕적 태도를 보였다. 정부수반 아돌프 디에르(Adolph Thiers)는 반항적이고 진보적이고 좌파적인 파리를 떠나 베르사유로 정부를 옮겼다.
정부군의 몽마르뜨 대포 탈취 실패로 파리 시민들은 그 해 3월 자치정부인 코뮌(commune)을 선포했지. 몽마르뜨는 예술가들의 혼이 서린 낭만과 예술의 장소뿐만 아니라 파리코뮌때 많은 코뮌나르(Communards)가 숨진 피의 현장이란 사실도 기억해야 한단다.


파리코뮌, 프롤레타리아 독재

파리 코뮌은 인류 최초로 세워진 노동자 정권으로 직접선거를 통해 의회를 구성했다. 공장은 노동조합이 접수 운영해 노동자의 경영참여가 이루어지고 노동시간은 하루 최대 10시간을 초과할 수 없었어. 최저임금제가 실시되고 야간노동이 금지되었다. 미성년자와 여성의 노동에 대해 특별법이 실시되었다. 공창을 폐지하고 도박을 금지했는데 잘한 일이지?
초등교육 의무제가 실시되고 교육에서 종교를 분리해 학교에서는 종교교육을 시키지 않고 세속적인 교육만 시켰다. 자치정부는 여성과 외국인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하고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 결혼의 자유를 선포하고 연금제도를 실시했다. 연금 혜택은 법률혼뿐 아니라 사실혼(동거관계)에도 적용했으니 코뮌정부가 얼마나 앞선 정부인지 알 수 있겠지.
칼 마르크스의 평생 친구이자 동지인 프레드릭 엥겔스는 파리 코뮌에 대해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해 알고 싶으면 파리 코뮌을 보라. 파리 코뮌이 곧 프롤리타리아 독재다.”라고 말했어. 엥겔스가 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 150년전 파리코뮌이 실시한 정책은 지금 캐나다를 비롯해 세계 많은 나라들이 행하고 있는 사회복지정책의 전범이란 말이다.
문화적 욕구도 활짝 꽃이 피어 공연장, 박물관, 미술관, 야외공연이 시민들에게 개방되어 매일 매일을 축제 같은 분위기에서 시민들은 삶의 환희를 느꼈단다.
봄과 함께 찾아온 희망이 비극적 절망으로 바뀌는 데는 70일이면 충분했어. 평화롭고 아름다운 노동자 정부를 권력자들은 오래 두고 볼 생각이 없었거든. 디에르 정부는 비스마르크와 교섭해 포로로 잡힌 프랑스군 40만명을 귀환 시켜 파리 진압을 계획했다. 파리와 베르사유 사이에 협상이 진행되었으나 협상은 실패로 끝났고 베르사유 정부는 무력진압을 시작했어.
초기에는 코뮌군이 전세를 우세하게 이끌었으나 갈등과 분열 비효율에 덜미가 잡혀 정부군에 밀리기 시작했다. 코뮌은 국회에 해당하는 평의회가 있었다. 평의회 의원들은 자코뱅, 공화주의자, 아니키스트, 블랑키파, 프루동파등 다양했다. 다양한 정파간의 의견대립, 갈등, 불신으로 서로를 물어뜯어 효율적인 작전을 벌이지 못한 채 구조적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 채 정부군 공격 앞에 괴멸 되고 말았지.
5월21일 튀일리 궁에서는 대규모 음악회가 열렸다. 정부군은 스파이 안내를 받으며 파리 시내에 진입했다. 5월28일까지 일주일간 소탕전을 벌였다. 피의 주간(La Semaine sanglante)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유럽 최대의 문명도시에서 시작되었다. 코뮌군의 저항이 치열하면 할수록 정부군의 진압도 잔인해졌다. 몽마르뜨 바리케이드를 지키던 부녀자 100명이 전멸되었다.


코뮌 전사들의 벽

덫에 걸린 코뮈나르들은 정부군 공격을 피해 동쪽으로 후퇴했으나 그곳에는 정부군의 요청을 받은 프러시아군이 지키고 있어 코뮈나르들은 독 안에 든 쥐가 되었다. 퇴로가 막힌 코뮈나르 147명은 페르 라세(Pere Lachaise)공동묘지로 후퇴해 묘석을 엄폐물로 삼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공동묘지에서 최후의 항전을 하다 탄약이 떨어져 항복했다. 정부군은 147명을 벽에 두줄로 세워놓고 총살했다. 5월29일 고립되었던 뱅센느 요새가 항복함으로 코뮌의 숨통이 끊어지고.


희망과 절망이 교차한 서울의 봄과 5.18 광주의 비극

지금도 그때 일이 어제 일처럼 기억이 생생하다. 박정희가 죽고 최규하 권한대행이 대통령이 되었다. 최 대통령은 취임 직후 긴급조치를 해제하고 민주헌법 하에서 빠를 시일 내에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고 약속했거든.
1980년 나라 전체가 희망에 부풀어 장미 빛 꿈을 꾸고 있었다. 18년 유신독재가 끝이 나고 민주화가 이루어진다는 꿈과 희망을 안고 사람들은 누가 볼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을 수 있을까?”라는 설렘을 주체할 수 없었다. 시민들은 시민들대로 정치인들은 정치인대로 노동자들은 노동자대로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제각기 민주화의 꿈을 안고 미래를 설계했다.
그러나 12월12일 일어난 반란 수괴 전두환을 비롯한 신 군부의 12월12일 군사반란은 불길한 징조였다. 군사반란으로 군권을 장악한 반란군들은 종당에는 국권까지 독식했다.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군화발로 짓밟으며.
생명이 소생하는 봄 기운을 받으며 민주주의가 소생할 것을 바라는 시민들의 열화 같은 기대와는 달리 실권을 장악한 군부는 집권음모를 하나씩 하나씩 실행에 옮겼다. 평화시위를 자극해 폭력시위로 유도하고 민주인사들을 부정부패자, 사회선동세력으로 몰고, 민주화 요구 시위는 사회혼란을 야기하고 북한을 오판으로 유도해 남침 위협이 된다는 허무맹랑한 헛소문을 퍼뜨렸는데 이 모든 게 전국 비상계엄 확대를 위해 밑밥을 깔아 놓는 일이란 말이야.


광주 코뮌

5.17 비상계엄과 공수부대와 20사단 광주 출동으로 군인이 자국민을 적군처럼 살상하는 동족상잔 비극이 시작되었다. 무지비한 무력진압으로 광주 시민을 살상하던 군 부대는 21일 광주에서 철수했다. 21일부터 도청이 점령당하는 28일까지 광주는 시민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질서가 유지되었어
5.18 광주항쟁이 민주화 과정에 미친 영향도 지대하지만 자발적 질서유지는 역사상 보기 드문 일이었다. 광주가 무정부 상태의 아비규환이라는 당시 언론보도와 실상은 달랐다. 무기고를 통해 총기가 수천 정이 광주시내에 풀렸는데도 공권력이 마비된 지역에서 일어나는 약탈, 강도 사건 한 건 없이 평온하게 일상의 질서가 유지되었다. 비상 상황에서 물자가 부족했으나 매점매석 행위도 없었어.
광주시민의 자발적 평화적 질서유지, 이웃과 서로 나누며 살아가기는 비록 짧은 기간이었으나 “광주 코뮌’이라는 말을 듣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민들의 자발적 질서유지는 오래 갈 수가 없었어.
반란군이 장악한 정부에서 대통령 국무총리 해당 각료로 내려가는 정당한 공권력 행사는 불가능했다. 정부가 광주 시민들과 타협에 의한 평화적인 방법으로 상황을 끝내려 해도 국권탈취가 목적인 반란군들은 광주를 정치적으로 이용해야 했다. 광주를 이용한 국권탈취에는 전라도 출신인 김대중 전 대통령 제거도 포함되었던 건 물론이고.
5월18일부터 28일까지 무고한 광주 시민들은 폭도라는 누명을 쓴 채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 작전에 쓸어졌지. 5.18 민주화 운동이 되었건 5.18 혁명이 되었건 5.18 광주 항쟁이 되었건 39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실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대형 학살을 지휘한 살인마는 건재하고 있다. 전 재산 29만원으로.


아직도 안 풀린 문제들

5.18 광주항쟁은 아직 정확한 사망자조차 밝혀지지 않았다. 그 외 정신적 육체적 피해를 입은 수 많은 광주시민들이 있다. 그 당시 진압부대에 당한 살인적 고통도 고통이거니와 광주 항쟁이 역사적으로 정당한 평가를 받은 지금도 일부에서 광주가 비하 조롱의 대상이 되고 희화 된다는 사실이 더욱 고통으로 다가 올 것이다.
만약 독일의 극우 정치인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을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광주 비하하고 조롱하듯 한다면 사회가 용서를 하지 않아 정치생명 끝나는 건 물론이고 교도소에서 오랜 기간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파리 코뮌이나 5.18 광주나 당시에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당시뿐 아니라 동족상잔의 두 사건 모두 지금까지 정당한 평가를 못 받고 있다. 파리코뮌에 대해 제대로 기념물 하나 없다. 공동묘지 벽에 있는 석판, 그 부근에 있는 조형물 하나가 전부다. 파리시내에 파리코뮌 광장이 있다. 10미터도 안될 좁은 공간에 달랑 안내판 하나. 프랑스가 파리코뮌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5.18 광주항쟁은 파리코뮌에 비해 좋은 대우를 받고 있으나 ‘임을 위한 행진곡’조차 정권 입맛에 따라 제창과 합창 사이를 오갔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는 합창을 했는데 “기념식에서 노래는 불러라. 우리는 따라 부르지 않겠다.”는 뜻으로 다시 말해 광주 정신에 동의하지 않겠다라는 거다. 앞으로는 정권이 어떻게 바뀌던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은 제창 해야 하며 광주 정신을 기려야 한다.
5.18 때 북한군 대대가 침투 했다는 건 정신병자들 주장이니 괘념할 바가 아니지만 보수를 가장한 극우 정치인들과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5.18 유공자 명단 공개하라고 시비 거는 것도 5.18 광주 항쟁을 정당하게 평가 하지 못 하겠다는 증거다. 얼마나 시간이 더 흘러야 정당한 평가를 받고 피해 규모가 밝혀질지 우리 그날을 기다려보자꾸나.

기사 등록일: 2019-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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