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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비 가역적 과정_ 오충근의 기자수첩
 
바둑을 통해 보는 세상
바둑은 중국에서 시작되어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다. 선비들, 유한계급의 놀이에 불과했던 바둑은 일본에서 체계적으로 발전했다. 바둑이 갖고 있는 전략적, 병법적 사고가 무사계급 사이에서 인정받아 전국시대를 거치며 바둑이 꽃을 피웠다. 오다 노무나가(織田 信長) 도쿠카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바둑의 고수로 바둑에 대한 이해가 높았다.
오다 노부나가는 부하의 배신으로 살해되는데 이를 ‘혼노지의 변’이라고 한다. 오다는 효노사(本能寺)에서 혼인보 산샤(本因坊 算砂)의 바둑을 구경했는데 3패가 나와 무승부가 되었다. 그날 밤 오다가 살해되는데 그래서 3패는 불길하다는 말이 생겼다.
오다의 시신은 접근금지령이 내렸는데 산샤가 목숨을 걸고 수습했다. 도요도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산샤를 참모로 기용했다.
막부에서는 바둑을 장려해 쟁기(爭棋)를 거쳐 최고 실력자에게 명인 칭호를 주었다. 명인은 바둑 두는 사람에게 최고의 명예이자 권위였다. 막부에서는 기소라는 직책을 만들어 녹봉을 주고 전국 바둑을 총괄하는 책임과 권위를 부여했다. 기소에 취임하려면 명인급의 실력이 있어야 했다.

혼인보 죠와 와 아카보시 인데쓰의 쟁기
일본에는 4대 바둑 명가가 있었다. 혼인보(本因坊), 이노우에(井上), 야스이(安井), 하야시(林) 4대 가문이 명인기소를 차지하기 위해 300년을 치열하게 싸웠다.
1835년 이노우에 가문의 당주 겐낭 인세키(幻庵因碩)와 혼인보 가문의 당주 혼인보 죠와(本因坊 丈和)가 명인기소를 놓고 바둑을 두게 되었다. 두 가문에는 숙연한 긴장감이 돌았다. 겐앙 인세키에게는 아카보시 인데쓰(赤星因徹)라는 제자가 있었다. 실력은 7단이었으나 스승과 시험 대국에서 5전 5승을 거둔 실력자다. 스승은 제자에게 “나를 대신해 혼인보 죠와와 대국을 하라”고 지시했다.
송구스럽고 스승에게 죄 짓은 기분이었으나 아카보시 인데쓰는 스승을 대신해 죠와와 바둑을 두었다. 스승을 대신한 대국에서 최선을 다했으나 인데쓰가 졌다. 나 때문에 명인기소를 찾아오지 못하고 스승의 명예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25세 청년은 바둑 둔지 3개월만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 바둑 한판에 목숨 걸고 처절하게 승부를 겨루던 시절이었다.
4대 가문에서는 세습으로 가업을 이어갔는데 조상이 바둑 잘 둔다고 해서 후손까지 바둑을 잘 두지는 않는다. 그래서 제자를 키우며 그 중에 가장 우수한 제자를 양자로 삼아 가문을 세습했다.
4대 가문 중에서 혼인보 가문에서 우수한 인재들이 많이 나와 명인 기소를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혼인보 슈사이는 마지막 명인이다. 근대문물이 들어오며 개화된 일본사회는 봉건제도 잔재인 세습에 의한 바둑이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었다. 명치 정부는 명인기소를 폐지했다. 혼인보 슈사이는 명인 칭호를 요미우리 신문(讀賣新聞)에, 혼인보 칭호를 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에 양도했다.
바둑계에서 은퇴하는 슈사이는 1938년 은퇴바둑을 두었다. 역사상 최초의 은퇴바둑으로 상대는 떠오르는 별 기다니 미노루(木谷 實)로 정해졌다. 하루에 혹은 몇 시간만에 뚝딱 두는 바둑이 아니라 제한시간 40시간의 대국으로 장장 6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6개월 대국 끝에 기다니 미노루가 5집을 이겼다. 명인으로서는 최초이자 최후의 패배였다.
명인과 대국 그 자체가 평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영광인데 승리로 장식했으니 기다니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기다니 미노루의 수석제자 조남철 국수는 자서전에서 “명인을 이긴 스승이 신처럼 높이 보였다.”고 술회했다.
바둑 한판을 6개월을 둔다는 게 이해가 잘 안되지만 두다 그만둔다. 그 결정은 상수에게 있다. 즉 명인은 언제나 “그만두자”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을 봉수(封手)라고 한다. 그랬다 다음에 만나 전에 그만둔 수 다음부터 시작한다.
바둑이 중단되면 제자들이 모두 모여 그때까지 진행된 바둑 수순을 놓아보며 토론을 벌이고 앞으로 어떻게 두면 좋을지를 토론한다. 즉 명인은 제자들의 토론을 보며 작전 구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제자라고는 조선에서 건너온 15세 소년 달랑 한 명 뿐인 기다니는 혼자 골머리를 썩이며 작전 구상을 했으니 기울어진 축구장에서 경기를 이긴 격이라 조남철 국수가 보기에 스승이 신보다 높아 보였다는 표현이 지나친 말이 아니다.

역사의 비가역적 과정
혼인보 슈사이의 은퇴바둑으로 봉건시대 바둑은 끝났다. 바둑 가문도 시나브로 없어지고 명인기소도 사라졌다. 가문의 후광이 아니라 실력 있는 자가 명인이 되는 시대가 왔다. 봉건 잔재를 말끔하게 청소한 일본바둑은 일본기원을 중심으로 현대바둑을 이끌어 나가 다시는 봉건시대 바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역사의 비가역적 과정이 바둑에서 진행된 것이다.
네이트(N.A.I.T)에서 파워 엔지니어링 공부할 때 열역학 제1법칙, 제2법칙을 배웠다. 열역학에 가역과정 비가역적 과정 용어가 나온다. 복잡한 이론은 그만두고 원래 상태로 되돌아 갈 수 있냐 없냐 따라 가역 비가역이 결정지어진다. 열 에너지 뿐 아니라 역사의 흐름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과거로 되돌아 갈 수 없는 순간이 생긴다. 역사의 비가역적 과정이다.

비 가역적 개혁의 상징 금융실명제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8월13일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했다. 금융실명제는 한국 경제에 큰 획을 그었다. 내 돈 내 이름으로 저금하는 게 당연한데 그 당연한 게 통하지 않고 가명 혹은 남의 이름으로 저금할 수 있었다.
남의 이름으로 혹은 가명으로 저금할 수 있으니 탈세의 방편이 되고 부정부패와 청탁을 비롯해 온갖 비리의 온상이 되었다.
또한 경제발전으로 경제규모가 커지다 보니 금융부정사건이 터지면 액수가 천문학적이라 금융실명제는 피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가 되었다. 그러나 금융거래가 투명해지면 저축이 위축되고 경제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을 고려해 금융실명제의 필요성을 알면서도 실행할 수가 없었다.
금융 실명제 실시는 시대적 요청이자 김영삼 대통령의 선거공약으로 27년이 흐른 지금도 금융 실명제는 김영삼정권 업적으로 인정받는다. 금융 실명제로 경제정의와 투명성 확보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경제 위축의 주범으로 지목되었다. 특히 97년 IMF로 경제위기가 시작되자 경제인 연합회는 60년대 경제개발이래 올해가 최대의 경제위기라고 규정하며 경제난 타개를 위해 금융실명제를 전면 유보하라고 촉구했다.
이회창 신한국당(자유한국당 전신) 총재도 경제난 타개를 위해 금융실명제를 경제활성화 방향으로 보완하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금융실명제가 IMF 경제위기의 주범이 된 것이다.
그러나 IMF 경제위기는 한국경제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였지 금융실명제 때문이 아니었다. 정부는 경제발전을 위해 기업에 금융, 조세 특혜를 주었는데 특혜로 기업은 자기자본의 몇 배, 몇 십배 은행 융자를 받을 수 있었다. 특혜에 안주한 기업들은 금융시장 개방에 따른 금리 자유화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금융 실명제 탄생 주역의 한 명인 홍재형 당시 재무부장관은 정치권과 대기업이 실명제를 가장 반대했다고 술회했다.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선거에 정치권이 대기업에 손을 내밀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2002년에 현금을 차떼기로 실어 운반하는 일이 있었지만.
기업에서도 경제활동 위축을 들어 실명제 반대했으나 표면적 이유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탈세, 비자금 은닉, 불법 상속, 증여로 발생한 검은 돈을 더 이상 관계기관의 눈을 속여 숨겨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긴급명령에 의한 금융실명제는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한다는 이유로 헌법소원 대상이 되었으나 정당한 통치권 행사로 인정받아 기각되었다.

문재인 정부의 개혁 과제
개혁은 정권 초창기 지지도가 높을 때 김영삼 대통령식으로 전격적으로 밀어 붙어야 성공 가능성이 높은데 문재인 정부의 개혁은 임기 절반 가까이 채우고 시작되었다. 공수처법(고위공직자 범죄수사처)을 비롯해 선거법, 검경수사권 조정법안, 유치원 3법등 신속처리법안(패스트 트랙)이 1년 넘게 끌어오다 연말 연시에 모두 국회를 통과했다.
신속처리법안 지정부터 거대 야당 자유한국당은 시종일관 반대의 반대를 거듭해 민주당은 다른 야당과 공조로 신속처리법안 지정부터 통과까지 처리했다.
자유한국당이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으로 법안 상정을 막으려 했으나 여당과 이에 동조한 야당은 회기 쪼개기로 법안을 통과시켰다. 법안 처리과정을 보면 과거 국회에 비해 정치력이 떨어졌다는 느낌이 든다. 무작정 반대만 하는 거대야당 자유한국당, 군소야당과 공조해 힘으로 밀어붙이는 여당 사이에 정치력이란 단어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개혁 중에 가장 어려운 개혁이 권력기관 개혁이다. 한국에서는 검찰과 군 개혁이 가장 어려운 개혁이다. 군살이 덕지덕지 붙은 힘과 권력을 ‘견제와 균형’ 원칙에 맞게 날렵하게 분산시키려고 하면 반발이 무섭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은 삼군 통합사령부를 구상했다 포기한 적이 있다. 삼군 통합사령부가 생기면 장군 보직이 대폭 줄어든다. 장군들은 조직적으로 반발했다. 정적들이나 야당 국회의원을 정보기관에 불법감금하고 개 패 듯하던 박정희 대통령도 물리력을 가진 장군들의 조직적 반발에는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검경수사권 조정법안과 공수처법으로 검찰과 경찰이 상하관계에서 협조관계로 바뀌었고 검찰 창설 71년만에 기소 독점주의가 깨어졌다. 무소불위 권력을 견제하려는 시도는 검찰의 조직적 반발을 어떻게 조정하나에 달려 있다.
한국 검찰은 민생이나 인권보호 보다는 독재정권에 기생하며 권력의 단맛에 취해 지나치게 정치화 되었고 권력지향이 되었다. 새로운 권력에 아부하다 말기가 되면 늙은 사자에게 달려드는 하이에나처럼 물고 뜯어 다음 권력에게 제물로 바친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어 왔다.
과거 금융실명제 반대하듯 문재인 정부 검찰개혁입법도 여기저기서 반대가 심하고 심지어 고소 고발 사태까지 벌어졌지만 역사의 비 가역적 과정을 거쳐 다시는 과거의 정치검찰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기사 등록일: 2020-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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