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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을 헤치고_1, 글: 류지성 (캘거리 교민)
본 글은 CN드림 08호(2002년 12/6일자)에서 부터 연재가 되고 있는 글로써 현재까지 총 세번의 글이 실린바 있습니다.

이번시간에는 지난 08호에 실렸던 1편과 13호(2/21일자)에 실렸던 정글을 헤치고 1/2편을 수록하였습니다.



정글을 헤치고_1

(이는 필자가 약 20년전 해외건설 현장에서 직접 체험한 것을 수기형식으로 쓴 글입니다. )
1981년 9월 6일, 나는 처음 타보는 민간 여객기의 창가에 앉아 우두커니 날개를 바라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감과 기내 서비스의 신기함, 그리고 이 비행기에서는 뛰어 내리지 않아도 된다는 부질없는 안도감과 함께 ..

불과 몇 달전까지 군수송기 C-123에서 낙하산 하나 믿고 정신없이 뛰어내렸던 그 공포가 새삼 떠오른다. 4초안에 펴지지 않으면 그 길로 국립묘지다. 아무리 횟수를 거듭해도 익숙해 지지않던 그 짜르르한 공포감 .낙하 생명수당이 1회에 10,400원이고 Px 면세양주 또한 한 병에 정확히 10,400원 이었다. 우연이기엔 너무나 아이러니한 가격덕에 빈병을 참 많이 만들었었지 .

지난 40개월의 군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임관해서 팀스프리트, 대 간첩작전, 각종특수교육, 대통령서거, 계엄령, 부마사태진압, 12.12 사태등 그 혼란의 와중에서 하룬들 마음 편한적이 있었던가? 전역 그 다음날 입사해서 한달만에 지금 해외현장으로 가고 있으니 난 참 고단한 팔자인가보다.

East Malaysia의 Bintulu(빈투루)에 있는 LNG 신축현장. 여기가 앞으로 내가 1년간을 지내야 할 목적지이다. 한국인 근로자 3,000 여명, 현지 근로자 약 2,000명 그리고 직원 150여명이 약 3년간 상주하면서 말레이지아 개국이래 제일 큰 공장을 짓는데 인건비로만 당시 금액으로 약 4,000억원이었다.

김포를 출발한지 약 5시간만에 보르네오섬 상단에 있는 코타키나 발루에 도착을 했다. 오늘밤은 여기서 1박을 하고 내일아침 일찍 국내선으로 Bintulu까지 가게 되어있다. 동행한 약 50여명의 근로자들을 인솔해서 지정된 호텔에 투숙을 했다. 여기서 근로자들이란, 회사와 wage를 정하고 1년 계약을 맺은 다음 해외현장으로 가서 일을 하게 되는데, 회사에서는 급료외에 숙박, 왕복항공료, 의료보험등의 혜택을 제공한다. 건설에 관계되는 모든 직종이 다 요구되며 심지어는 아무 기술이 없는 헬퍼까지도 송출을 했다. 이 때 회사직원이 동행하게 되면 도착 때까지 그 직원이 인솔을 책임지게 되는데, 이번 팀은 내가 인솔 책임자다. 마음이 이래저래 갑갑하다.

호텔에서 제공한 저녁을 먹고, 방 배정을 하면서 내일아침 일찍 가야 하니까 절대 외출하지 말고 일찍 자라고 수없이 당부를 한다. 참고로, 해외 취업 1년차를 초탕이라고 하는데 2번째부터 두탕, 삼탕, 사탕 그렇게 부른다. 해외에서는 탕수가 최고다. 나이고 기술이고는 그 다음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 중에 많은 두탕, 삼탕 짜리들이 내가 초탕이란 걸 벌써 읽고 있었다. 그러니 말빨이 서겠는가? 그들의 주장인 즉, 내일부터 1년간을 뼈빠지게 일만 해야 되는데 오늘 밤을, 그것도 외국에 와서 그냥 잘 수가 있느냐는 논리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상당히 일리는 있어 보이지만, 혹시 생길지도 모르는 사고를 우려해서 외출은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초탕이 목욕하려고 욕조에 물을 받고 있는데, 두탕, 삼탕들이 나가서 한잔하자고 선동을 하니까 밸브도 잠그지 않고 그냥 따라 나갔다는 거다. 얼마 후, 그 물이 욕조를 넘쳐 방을 지나 복도로 흘러나오니, 호텔 직원들이 길길이 뛰고 나도 따라서 방방 뛰었다. 내친 김에 각 방을 체크 해보니 빈방들이 수두룩하다. 이거 제대를 괜히 한거아냐? 말뚝 박으라고 할 때 박을 걸 그랬나 싶다.

다음 날 아침에 총원집합해서 체크 아웃을 하려는 데, 호텔측에서 객실 검사를 해야 하니 기다려 달란다. 1번 방부터 목욕타월 2장 분실. 그 다음방도 마찬가지 무전기로 방에서 보고하면 로비에선 차례로 그 방 투숙객 가방을 열어보란다. 어김없이 젖은 수건들이 나오는 데, 어떤 방은 방에도 없고 가방에도 없다. 눈치 빠른 호텔직원이 바지를 벗어 보란다. 많이 겪어 본 솜씨다. 젖은 타올 때문에 바지가 이미 젖어 있었다. 보고 있으려니 정말 가관이다.

보고 지나가는 외국인들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고 말레이지아인 직원은 이것을 즐기는 듯한 표정이다. 이런 불리한 상황을 빨리 끝내려면 대화보다는 해병대식이 빠르다. 인상 팍 쓰고 언성을 높힌다. 호텔이 마음에 들어서 기념으로 가져가는데 겨우 그거 가지고 이 지랄이냐 C8. 그렇게 소중한 거면 가져가지 말라는 sign을 붙여 놓아야 할 거 아니냐 이 S.O.B들아. 즉각 검색이 중단되고 매니저가 나와 사과를 한다. 떠들수록 누가 더 손해인가는 매니저쯤 되야 빨리 감이 잡히는가 보다. 나를 보는 100여개의 눈동자들이 어제하고는 영 달라 보인다. 괘씸한 삼탕놈들

국내선 비행기는 프로펠러인데 아무리 외진 정글을 다니는 거라지만 이건 조금 심했다. 재작년도가 도무지 추측이 안 간다. 엄청난 소음과 심한 흔들림에 모두들 불안해서인지 담배를 태워대는 데 기내가 금방 굴뚝이 된다. 기내멘트로 담배를 꺼달라고 아무리 외쳐대도 무슨 말인지 알아 들어야 끌 거 아닌가? 하는 수 없이 여승무원이 좌석마다 다가와서 금연을 요구하는 데 이 또한 못 알아들어 쑥쓰러우니까 그 옆에 있던 사람마저도 한 대 쓱 꺼내문다. 뒷자석에서 보고 있던 나도 따라서 쌱 꺼내 물었다. 우리는 그렇게 연기를 뿜어대면서 빈투루로 날아갔다. Bridge over troubled water를 들으면서 ....



정글을 헤치고_2
Malaysia Bintulu! 비행기로 밖에 들어갈수 없는 정글 오지의 시골 마을이 거대한 공장건설 덕분에 갑자기 바뀌고 있었다. 각종 유흥업소 들이 여기저기에 들어서고 멀리서 원정온 각국의 아가씨들도 계속 늘어나는 추세라 하고 그래서인지 첫 느낌이 아주 좋았다. 현장은 여기에서 육로로 약 1시간 걸리는 바닷가에 있었는데 북위 4도라 우기철을 제외하고 평균 40도 가까운 폭염이 내내 계속되고 습도도 아주 높아 하루에 몇번씩 옷을 벗어 땀을 짜가면서 일을 했다.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가 정상작업시간이고 수시로 철야를 하는데 일년에 오직 하루 구정을 제외하곤 쉬는날이 없다.

그곳에는 한국근로자가 약 150명에 원주민 근로자가 약 100여명이 있고 전임 기사는 1년전 휴가가서 결혼하고 며칠만에 다시왔는데 후임자가 안 와서 휴가도 못가고 있다가 나를 보자 너무 좋아서 울려고 했다. 불과 하루동안에 현장에 대해 설명하고 인계인수를 하는데 무슨 말인지, 무슨 뜻인지를 한마디도 못알아들었지 아마.

다음날 이 친구는 무정하게 떠나버리고 나의 노가다 생활은 드디어 시작 됐는데 3일째부터 공구장이 조져대기 시작했다. 인부들은 현장용어를 전부 일본말로 하고 감독들은 영어로 해대고 원주민들은 저희말로 떠들어 대는데 정말 대소변을 못가리겠더란 이야기다. 노가다판. 거기서도 토목하는 사람들이 제일 거칠다. 부하직원에게 이새끼 저새끼는 보통이고 심하면 귀싸대기도 올라 가곤 하는데 인격적인 대우는 아예 먼나라 이야기다.

흔히들 노가다라고 말은 하지만 정확한 뜻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노는 영어로 No 이고 가다는 일본말로 틀이란 뜻이다. 그래서 일정한 틀이나 전문성 없이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이해하면 거의 맞다. 그러나 몸으로 때워서라도 잘살아 보려는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고 조선팔도에서 다 모이다 보니까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한편으론 단순하고 무엇보다 잔머리를 굴리지 않아서 편하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서 하루종일 뙤약볕에서 싸다니다 (현장기사는 일과시간중에 절대 사무실에 앉아있으면 안 된다) 저녁 10시에 작업이 끝나면 비로서 내 책상 앞에 앉아 서류정리 해놓고 숙소에 돌아오는데 거의 자정쯤 된다. 긴장의 연속이라 그런지 피곤해도 잠이 안온다. 해병대서 지옥주때 잠은 전혀 못자고 하루 한끼만 먹고 뛴 적이 있었는데 일주일뒤엔 오히려 잠도 안 오고 배도 별로 고프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정말 고달픈 인생이야 나는!!!!!!!

어느날 원주민 근로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출근할때 도시락하고 정글칼을 꼭 차고 와서 걸어놓고 일을 하는데 한국사람이 욕을 하거나 하면 일단 참았다가 날을 잡아서 거사를 한다. 단결이 잘되 전부가 칼 빼들고 설치면 한국사람은 무조건 멀리 도망가야한다. 초탕인 나는 그것도 모르고 사무실로 피해 있다가 거기서 죽을뻔 했는데 평소에 내가 일 시키면서 인종차별을 안 한게 살아남는데 도움이 된 것 같았다. 그 대신에 내 책상과 집기들이 보는 앞에서 박살이 났다. 이런 난동으로 적지않은 한국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고 그들과의 크고 작은 사건들이 꽤나 자주 일어났다.

가까운 곳에 일본인 현장이 있었다. 직원하고 Foreman 몇명이서 원주민들만 데리고 일을 하는데 모든 대우가 우리보다 못했음에도 원주민한테 그 현장은 선망의 대상이였고 그렇게 고분고분할수가 없더란 이야기다. 학교서 배워온 일본이 아니였다. 내꺼 주고도 당하는 한국사람들하곤 확실히 다른 그 무엇이 있었다. 노가다들 중엔 과거에 어두운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증거로 온몸에 문신이며, 배나 팔에 자해한 흉터들을 무슨 훈장처럼 내보이며 주위를 늘 피곤하게 하는 그런 무리들이다. 그런데 이런자들 일수록 난동이 일어나면 제일 선두에서 도망가는것을 몇번 보곤 나는 그사람들을 아예 쓰레기로 취급해 버렸다.2개월마다 개인고과를 하는데 직원 의견란에 '재송출불가'라는 꼬리표를 꼭 달았다. 이게 붙으면 적어도 대림산업으로는 다시 못나온다. 고과가 좋을수록 시급이 올라가고 해외탕수도 많아지고 하는것이다.

어느날 흙을 버릴 사토장을 만들라는 지시가 떨어져 불도저를 끌고 정글로 들어갔다. 열대수림은 가늘고 길어서 뿌리가 약하니까 도저로 그냥 밀어버리고 넘어진 나무들을 끌어다 계곡속에 쌓아놓고 불을 지르니 비오면 꺼졌다가 다시 저절로 붙었다 하면서 약 한달을 탔다. 대낯인데도 정글엔 한발만 들이면 모기떼와 이상한 파충류들 로 들어가기를 꺼렸는데 정글을 헤치고 고생해 가며 공사가 거의 마무리될 무렵인 어느날 갑자기 큰 비가 와서 도저가 진흙탕에 빠졌는데 무거운 자중때문에 발버둥 칠수록 자꾸 빠져 들어가 마침내는 운전석만 남기고 잠겨버렸다. 2번 도저가 용감하게 구출을 시도하다가 결국 저도 똑같은 신세가 되어버렸다.

불도저가 빠지니 이걸 빼낼 장비가 있어야지. 구출 방법을 문의하니 본부에서 해답이 내려왔다.- 마를때까지 기다려라.- 우기철이라 매일 비만 퍼 붇는데 장비 대여료는 꼬박꼬박 물어줘가면서 석달을 마를때까지 그렇게 처박아 두었다. 폭우가 쏟아지면 현장이고 캠프고 수시로 잠기는데 한밤중에 자다가 물이 침대까지 차 올라오면 책상위에 올라가 날 샐때 까지 쪼르려 자곤했다. 현장은 완전히 물논으로 변하고 낮은곳에 있었던 장비들은 자동적으로 잠수함이 된다. 복구한다고 밤새가며 콘크리트 칠 준비해 놓으면 아침에 또 퍼부어 댄다. 다시 잠겨가는 기초 자리들을 바라보면서 혼자 현장식당에서 빽미주(50%)를 들이키곤 했는데 이렇게 13번을 반복한 끝에 콘크리트를 친 곳도 있었다.

우리현장은 캠프에서 제일 멀기 때문에 식사를 운반해다 먹었는데 야전식당이라 점심때는 츄라이에 밥을 퍼놓으면 파리떼가 까맣게 앉아 사람들이 오기직전에 에프킬라를 뿌려댔다. 저녁식사는 주로 어두워서 많이 하게 되는데 식탁 밑으로 쥐떼가 엄청나게 다녔다. 열대쥐들은 덩치가 큰 대신 동작이 둔해
서 발을 툭툭치며 지나 다닌다.

숟가락을 놓자마자 담배한대 꺼내물고 모두들 묵묵히 일을 하러 간다. 이 사람들에겐 더위도 장마도 쥐떼도 관심이 없다. 오로지 고국에 두고 온 가족뿐이다. 돈 모아서 내집을 갖고 또 자식들이 학비 걱정없이 공부 잘 하기만을 바라면서 내 몸은 부셔져도 좋으니까 일만 많이 시켜주길 바란다.

비록 교육 혜택은 적게 받았지만 가장으로서의 책임의식 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사람들이다. 한번은 구조물에 누수가 심해 급히 방수를 해야하는데 오전에 5시간만 자고 하루 19시간을 철야로 15일간을 한적이 있었다. 나야 아무런 혜택이 없었지만 일꾼들은 심야수당이 2배로 뛰니까 그달 송금액이 꽤 많았다. 말이 밤샘 15일이지 한밤중에도 30도 더위에 모기떼와 싸우면서 일 한다는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러나 한 사람도 불평이 없었다. 고국의 식구들이 좋아하는 모습이 떠올라 힘이 저절로 생겼다고 했다.

남자가 일단 가정을 가지게 되면 더 이상 남자가 아니라 가장일 뿐이다. 가장이 되면 숨쉬는 것만 빼고 가족을 위해 전부를 바쳐야 한다는 것을 노가다를 통해 배웠다. 나와 한방을 쓰는 룸메이트는 한국에서 2살 4살이 된 꼬마들이 아빠를 부르며 재롱떠는것을 테이프로 녹음을 해서 보내왔는데 밤만 되면 테이프를 들으며 우는걸 보고는 나는 결혼을 하지않고 남자로 남기로 했다.
그리고 이 약속은 5년 뒤까지 지켜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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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등록일: 2003-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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