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안내   종이신문보기   업소록   로그인 | 회원가입 | 아이디/비밀번호찾기
예수님의 비유_1 (약속의 땅 가나안 2_23)
예수님이 천국 복음을 전파하러 다니실 때 주로 갈릴리 호숫가에 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말씀하셨다. 이들의 대부분은 배운 것이 없고 가진것이 없는 하류층에 속한 사람들이였다.
이들에게 천국 복음을 알아듣기 쉽게 하기 위해서 많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들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서에 기록되였다. 씨 뿌리는 비유, 결혼 잔치의 비유, 열 처녀의 비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잃은 양의 비유, 탕자의 비유, 무화과나무의 비유 등 많은 비유들이 있다.
여기서는 특별히 누가 5: 36-39에 비유로 말씀하신 것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이 비유속에는 이 시대에 사는 성도들이 꼭 알아야 할 중요한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트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것이라.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마시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라”. 새 옷과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과 천국 복음의 말씀을 뜻하는 것이고 낡은 옷과 낡은 부대는 유대 민족 특히 바리새인들이 지키는 율법주의를 뜻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오실 메시아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다는 자들이다. 위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마태 27: 50-51 말씀을 생각해 보자.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신 역사적인 사건이다. 이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고 했다. 율법주의로 가로 막혔던 벽이 무너지고 은혜의 시대 복음의 시대로 열렸다는 뜻이다. 구약 시대에 집승을 잡아 짐승의 피로 드리는 제사는 일시적 효과만 있었다. 또 완전하게 죄를 씻을 수 없었다. 죄없는 예수님의 제물의 피는 모든 죄인들의 영원한 대속을 이루신 것이다. 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 이것이 복음이며 새 옷과 새 술로 비유된것이다. 낡은 옷과 낡은 부대로 비유된 유대인들이 지키는 율법주의 적인 것들은 무엇인가.
?안식일을 지키는일 (금요일 저녁 해질때 부터 다음날 해질때 까지. 지금의 토요일)
?십일조를 드리는 일
?할례를 행하는 일
?율법을 지키는 일 등이다.
이러한 것들을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이 지키던 것인데 신약시대에도 바리새인들은 지키고 있었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은 유대인들이 지키는 율법주의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알아보자.

첫째, 안식일에 대하여

안식일의 기원을 따지면 창 2: 2-3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우시던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엿새동안은 일하고 제 칠일은 너희에게 성일이니 특별한 안식일이라. 무릇 이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나 안식일에는 모든 처소에서 불을 피우지 말지니라.” (출 35: 2-3)
민수기 15: 32-36 에서는 안식일에 나무하는 사람을 발견하고 그들을 돌로 쳐서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듯 구약시대에는 안식일을 엄격하게 지켜야만 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안식일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셨는가를 살펴보자.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 마가 2: 27-28)
이 말씀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밀밭사이를 지나 가실때 제자들이 이삭을 자르는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고 질문한 것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인 것이다.
또 초대교회 예배는 언제 드렸나 보자.
사도행전 20: 7 보면 안식후 첫날에 사도바울이 예배 인도한 기록이 있다. 안식후 첫날은 지금의 일요일 즉 주일에 예배를 드린 것이다. 주일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날이다. 성도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날이다. 오늘날 모든 교회가 이날을 주의 날이라고 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 안식교회만 토요일이 안식일이라 하여 바리새인들이 지키는 안식일 즉, 토요일에 예배를 드린다.

둘째, 십일조 헌금에 대하여

십일조 헌금을 하는 것이 옳은지, 안해도 되는지, 많은 기독교인들이 의문을 가지고 있는것 같다. 심지어는 목회하시는 목사님간에도 이견이 있는 것 같다. 몇 년전에 토론토에 계시는 어떤 목사님이 많은 한인교회가 십일조 명목으로 헌금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요지의 글을 한국일보에 실었는데 그 글을 읽은 다른 목사님이 구약 성경에 기록된 예를 들으면서 나는 십일조 헌금을 하는 것이 옳다고 믿고 지금까지 매달 십일조 헌금을 한다면서 먼저 목사님의 글을 반박하는 글을 실은것을 읽은 기억이 있다. 나는 평신도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으로 성경을 학문적으로 또는 체계적으로 배운 일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성경을 여러번 읽으면서 내가 이해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적어보려고 한다 .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에 셈족들은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했다고 믿었다. 땅에서 나는 곡식, 나무의 열매(과실), 가축들은 그들이 생활하는데 꼭 필요한 것들이였다. 이 필요한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소출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돌려 드린다는 사상이 자연스럽게 이루어 진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십일조 헌금을 하도록 규정이 만들어 지기전에 아브라함이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의의왕, 평화의 왕인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받친일(창 14:20) 과 야곱이 하나님께서 주신것에서 십분의 일을 드리겠다고 서원했기 때문이다. ( 창 28: 20-22)
모세 이후에 십일조 헌금을 하도록 규정하였고 쓰여지는 용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십일조 헌금이 사용된 곳은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생활 보조금으로 쓰여졌고 성막관리와 가난한 사람 구제하는데 사용되었다. (레위기 29: 30-38, 민수기 18 : 21-32, 신명기 12: 5-18, 14:22)
구약성경 마지막인 말라기 3장 8절에서는 십일조 헌금을 하지 않은 사람을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는 것이라고까지 하였다.
그러면 신약 성경에서는 십일조에 대해 어떻게 기록되었나 알아보자. 신약성경에서는 십일조를 하라는 기록자체가 없다. 십일조 대신 연보를 하라고 되어있다. 그러면 연보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성경에서 찾아보라. “ 각각 마음에 정한대로 할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자를 사랑하느니라”. (고후 9:7)
연보는 바리새인들이 하는 것 같이 십일조 헌금을 하라고 했기 때문에 하는 의무감으로 우리가 세금을 내는 것 같이 하는것이 아니라 각자의 형편을 고려해서 마음에 정한대로 하되 억지로나 인색함으로 하지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연보하는 사람을 액수의 많고 적음을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수입의 십분의 일을 들이기로 마음에 정하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드렸다고 하자. 드리는 액수가 바리새인들이 하는 십일조와 같을 지라도 이 사람이 하는 십분의 일은 스스로 마음에 정하여 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하는 십일조와는 그 의미가 다른 것이다.
마가복음 12:41-44 에서는 한 가난한 과부가 두렙돈을 연보하는 모습을 보시고 다른 사람보다 많이 했다고 예수님이 칭찬 하셨다. 또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가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기 때문에 많은 환란과 시련이 있는데도 하나님을 믿고 넘치는 기쁨으로 풍성한 연보를 했다고 칭찬하였다. (고후 8: 1-2)
이상의 예를 보더라도 지금 우리가 십일조 명목으로 헌금을 하도록 하는 것은 성경의 뜻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대부분의 백인 교회에서는 십일조 헌금을 안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부분의 백인 교회라고 한 것은 모든 백인 교회에 십일조를 하는지 안하는지 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한 것 뿐이다. 내가 경험한 캐나다 장로교회, 루터교회, Alliance교회등에서는 안하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셋째 할례에 대하여

할례란 무엇인가?
할례는 남자의 성기의 표피 윗부분을 제거 하는 것으로서 육신이나 죄의 더러운 것을 버린다는 상징적 의미가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할례를 받으므로 죄에서 떠나 의롭게 된다는 의미가 있다. 그런 뜻에서 신약시대에 행하는 세례의식의 예표라고 한다. 유대민족은 태어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하도록 했다. 그러면 구약 성경에 기록된 할례에 대하여 찾아보기로 하자. “ 너희중에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 후손사이에 지킬 언약이니라 너희는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 창 17 :10-11)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후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므로 하나님과 언약의 징표를 삼았다. 아브라함의 후손 (유대 민족)은 누구나 할례를 하므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 (거룩한 백성)으로 이방민족과 구별하였던 것이다. 여호수아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할례를 행하였다. (여호수아 5: 3-5)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민족은 다 할례를 받았는데 광야에서 사십년을 지내는 동안 새로 태어난 백성은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한것이라고 했다.
“ 유대인과 예루살렘 거민아 너희는 스스로 할혜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수아께 속하라”.(에레미아 4:4)
“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의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지나라”. (신명기 10:16)
이상에서 아는바와 같이 할례는 죄를 떠나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의미가 내재하고 있는것이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할례의 의미가 아무것도 아닌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할례를 적어보면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라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 (로마 3: 30)
“할례를 받는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를 받지 아니하는것도 아무것도 아니므로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다”. (고전7: 19)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 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갈라디아 5:2)
사도 바울이 초대교회에 복음을 전하던 당시에 유대인들의 할례를 받아야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는다는 이론 때문에 초신자들이 혼돈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서신중에 할례를 받는것이 의롭게 되는데 아무 소용이 없다는 편지를 쓰게 된것이다.
그런데 딱 한번 예외로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사실이 사도행전 16:3에 있다.
“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줄 앎이러라”
유대인들은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의 전도를 완강히 거부하였다. 이런 조건에서 유대인을 전도하기 위해서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것이다. 전도를 위해 예외적으로 한것이지 할례를 받으므로 의롭게 되기 때문에 행한것은 아니다.
(디모데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였지만 아버지는 헬라인이였다.)

넷째, 율법에 대하여

율법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십계명에서 시작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십계명이 600개 이상의 법으로 세분화 되었다고 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 많은 법을 다 지키므로 의롭게 되고 구원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늘 이 많은 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살았다. 신약시대에 비리새인들은 이 많은 법을 잘 지킨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면 지금 우리들도 바리새인들과 같이 십계명을 잘지키며 살아야 하는가?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신약성경에 기록된것을 찾아보자.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로마서 10: 4)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한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 까지 있을 것이라”. (갈라디아 3:19)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뜻은 유대인들이 믿고 행하는 율법 즉 율법을 지키으로 의롭게 된다고 믿는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므로 다 끝이 났다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때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갈라질때 율법을 행하므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끝이 났다는 것이다. 지금은 은혜의 시대, 복음의 시대가 열려진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이 끝이 났으면 아무소용이 없다는 것이냐? 그렇지 않다 율법을 지키므로 의롭게 될 수는 없지만 율법으로 인해서 죄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그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닮음 이라”. (로마서 3:20)
또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보호자 또는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
“이와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 3:24)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느냐” (갈라디아 4:9)
갈라디아에 있는 교인들이 사도 바울의 전도를 받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 율법을 지켜야 의롭게 된다고 계속 가르치고 있으니까 새로 믿던 갈라디아 교인들의 믿음이 흔들리게 되었다. 유대인들이 가르치는 율법주의 사상을 사도 바울은 초등 학문이라고 하였고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을 율법의 종노릇 하려고 하느냐고 한것이다. 또 로마서 3:19 에는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자 (유대인)을 율법 아래 있는자들이라고 했고 이 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하였다.

이제 우리는 새옷과 낡은 옷이 무엇이며 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성경을 통해서 알아봤다. 아직도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묵은것이 좋다하는 바리새 인들과 같이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 헌금하고, 할례를 행하고,율법을 지키려 하는 성도들이 있는가? 그렇다면 과감히 그 태도를 바꿔야 할 것이다. 언제 바꿔야 하는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되기 때문이다.


편집자 주 : 본 기사는 CN드림 2007년 3/9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Copyright 2000-2007 CNDream. All rights Reserved

기사 등록일: 2007-03-10
나도 한마디
 
최근 인기기사
  캐나다 소득세법 개정… 고소득자..
  앨버타 집값 내년까지 15% 급..
  고공행진하는 캘거리 렌트비 - ..
  캘거리 교육청, 개기일식 중 학..
  첫 주택 구입자의 모기지 상환 ..
  앨버타 유입 인구로 캘거리 시장..
  로블로 불매운동 전국적으로 확산..
  에드먼튼 건설현장 총격 2명 사..
  해외근로자 취업허가 중간 임금 ..
  <기자수첩> 캐나다인에게 물었다.. +1
댓글 달린 뉴스
  2026년 캐나다 집값 사상 최.. +1
  개기일식 현장 모습.. 2024.. +2
  <기자수첩> 캐나다인에게 물었다.. +1
  캐나다 무역흑자폭 한달새 두 배.. +1
  캐나다 동부 여행-네 번째 일지.. +1
  중편 소설 <크리스마스에는 축복.. +1
회사소개 | 광고 문의 | 독자투고/제보 | 서비스약관 | 고객센터 | 공지사항 | 연락처 | 회원탈퇴
ⓒ 2015 CNDrea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