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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집 아들 (최우일의 잡담 한마디_7 )
나는 고국을 방문 할 때면 한사코 시골을 둘러보려고 애씁니다.

이제는 우리나라 살림도 흥청망청하여져 집모양새도 많이 달라졌고 찻길이 구석구석까지 쳐들어와서 유연한 시골 풍경을 보기란 그리 쉽지는 않지만, 몇채 남지도 않은 옛 와옥에 잡풀이라도 몇포기 안스레 고색이 창연하면 내 마음도 덩달아 창연해집니다. 요새집처럼 휘까닥 맞추는 집이아니라, 하나하나 다듬어올리는 옛집은 이제 마지막이 아닌가 해서입니다.

집을 짓기로 하면, 주추가 우선이고 기둥을 세우면서 들보를놓고나서야 지붕이 오르는 것이지만, 집을 보기로 말하면 단연 지붕이 먼저입니다. 나는 지붕꼭대기부터 휘둘러보고난 다음에 들보를 흘깃거리고는 곧바로 기둥을 쓸어봅니다.

그리하자고 하는 것은아니고 그저 내맘가는대로 집을보는 순서입니다. 와옥은 윗부분이 지나친듯 균형이 좀 위태롭기는해도, 살짝 처마끝을 끌어올려 멋을부리면서 아래로 쏠리는 무게를 덜어주는듯 안정을 찾습니다.

요새집처럼 비바람이 조금만쳐도 홀랑 날아버릴 것만같은 얄팍한 건축물이면 몰라도, 기와집에 지붕을 얹을때 기둥이 실하고 들보가 든든해야 하는 것은, 그 집안의 권위가 올라 앉아야 하기때문입니다. 무게를 견디지못하면 마룻대를 앉혀 서까래를걸고 지붕을 올릴 수가 없습니다.
주인의 성격이나 집안의 규모에따라 집은 모두 제각끔이면서도, 옛집의 설계에는 한가지 공통된 원칙이 지켜지고 있습니다. 집한채에 방하나라는 설정은, 한 울타리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대가족의 각자 사생활의 적당한 배려입니다.

여럿이 방하나를 나누어써야할 가난한 형편에선 기와집이나 이 설계원칙이란 처음부터 가당치도않지만 말입니다. 우리들의 집은 효용성만 따져지은 그냥집이아니라 이렇게 공동생활에의 질서와 조화에 마음써주는 집입니다.

한 울타리안에서는 아들따로 손자따로란 어림도 없는 일이고, 개개인은 전체라는 집의 지붕을 떠받치는 역할을 맡게되어있습니다. 이들이 주춧돌이며, 기둥이고 대들보인 것은 이것들위에 방바닥이 다져지고 벽이 세워지고 지붕이 올라 앉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남자를 중심으로 짜여진 사회에서는 집을 일으키고 면목을 세우는 것은 아들자식의 몫으로 그의 소임과 힘을 강조하고 교육하였습니다. 가장이란 지붕이 위엄을 갖추고 꼭대기에 있으려면 어떻게든 있어야할 구조적 필요이었지만, 그러나 자식들에게 심한 부담을 준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나는 옛것만을 옹호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세대의 가치기준도 존중해야한다는 입장입니다. 이제 기와집을 짓고사는 사람이 더는 없는 세상이 되었지만, 아직도 와옥의 육중한 권위의식에서 훌훌 벗어나지 못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을가진 아버지들이있다는 사실은 참 의외입니다.

고국을 떠난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아이들에게 고유의 전통과 기와집의 의미를 알리기는 매우 어려운일이란 것을 이들은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해는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과거와 뿌리가 없음이 아니라 무시와 거부라고 해야 옳을 이들의 태도를 속으로만 못마땅히 여기고 있음을 부인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우리와는 달리 우리의 아들들이 선호하는 주거는 효율성이 우선이어서, 천천히 뿌리내리고 시작하여 지붕받치고 사는 삶이 아닙니다. 아파트를 보십시요.

기둥없고 들보없이, 나의 천장은 남이 깔고앉는 방바닥이되고 내가 또한 또 다른 남의 머리위에 올라앉는 꼴로, 위와 아래가 불분명하니 관계의 질서가 깨어지고 주인에대한 배려없는 대량복제 상자곽이 아니고 무었입니까?

이들의 자유분방한 생활양태나 전통에의 반발과 파격은 우리 시대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니까 조금도 놀랠일은 아닙니다.

유기적 전체에로 확충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개개인의 개별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이미 고대 희랍인들에게 서였습니다.

그리고는 인본사상과 합리성의 시대를 거쳐 19세기에와서는 드디어 개인주의가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들어내게됩니다. 사람들은 국가나 교회의 권위에서 또 가정의위엄에서 홀가분해져 개체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이 결과로, 각 개인의 자기만족위주, 혹 방종이라할 수있는만큼 ‘갈대로 다가서’ 더는 심해질수 없는 이 상태가 마냥 위태롭기만 합니다. 지금까지 굴러오던 대로의 사회라는 기구에 큰고장을 일으킨 것이라고나 해야할까…… 기존의 가치양식이 부서져버리고, 가정이나 학교는 그 역할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일반 생활양식은 ‘일회성’이나 ‘즉석식,‘신속성’ 삶인듯, 우리와는 또다른 가치관과 구조적의식을 가지고 있슴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들의 질서는 우리가 은근히 바라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서 뽑혀 혼자 우뚝선 지금의 젊은 이들, 그들만의 세계에서 바삐 살고 있습니다. 1960년대를 회상해 보십시요. 사회문화의 입장에서본다면20세기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시기가 됩니다.

옷입는 습성, 말뽄새, 자유분방한 성에대한 태도, 그리고 가정이라는 기본단위의 파괴와 함께 극소입자인 개인의 자리를 최우선으로 합니다. 이 시대가 우리들의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난 시기이며 우리들의 청장년때입니다.

나는 아들이 없어도 조금도 섭섭한적 없는 사람이지만 남들이 되려 미안해하는 통에 본의 아니게도 나를 변명하려고 공연한 짖을 한적이 여러번 있습니다. 아들딸은 한 집안의 아들딸이기전에 평등한 인간입니다. 어느쪽을 선호하고 차별한다는 것은 이미 전 근대적 생각입니다. 예전같은 제도하에서처럼 아들들 거느리고 아버지의 하늘같은 위치를 뻐길 수있는 세상이 더는 아닙니다.

나는 부모와 자식들과, 개인과 사회와의 역학관계에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들이 마음의 뿌리를 내릴 수있는 곳은 도대체 어디일까, 또 이들은 지금의 젊음과 파격과 자신감을 과연 아주 오래오래 그들의 노년기 까지 이어 갈 수있다고 믿고 있는 것일까, 그들도 우리가 겪는 것처럼 새 세대와의 부조화와 대치할 때가 있지는 않을까, 그러면 지금 우리가 조정하고 수용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균형있게 지은 집은 하나하나가 힘을 주고 받으며 한 지붕아래서 버티고 있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조심스런사람은 뒤를 돌아다 보며 살고, 지각있는 이는 앞을 향해 산다고 했습니다. 집이던 사회던 옜과 지금의 균형을 가추어야하는 것입니다.

나무울타리를 가운데 하고 앞집 나는, 뒷집 기와집 아들과 어릴적 동무이었습니다. 내가 알파벳을 익히고 있을 때 그는 천자문을 읽으면서 가문을 먼저 내세운 아이였습니다. 나는 그가 살던 기와집이 가차없이 허물리고 양옥이 버젖이 차지하고 들어앉는 꼴을 보게될 날이 머지않을까보아 걱정이 태산입니다.


본 글은 CN드림 20호(5/30일 2003)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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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등록일: 2003-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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