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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나무 밑에서 _ 김 주 안(여류문협)
 
퇴근길에 과일가게를 지나는데 노란 살구가 눈에 띄었다. 탱글탱글하니 농익은 것이 무척 먹음직스러워 보여 한 바구니를 샀다.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고는 뒤꼭지부터 반으로 쪼개서 입에 넣었다. 생각만큼 어린 시절 먹던 깊은 맛이 아니라 왠지 서운했다.
고향마을 뒷동산에도 커다란 살구나무가 있었다. 깊고 넓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던 그 나무 밑은 긴긴 여름날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어린 우리들은 멀리 학교 뒷산으로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해가 저물도록 놀았다. 봄에는 가지마다 빼곡하게 꽃이라도 피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등불처럼 보였다. 온 동네가 이 살구꽃 등불로 환하게 빛났다. 노랗게 익은 살구들이 어느 날은 천사들의 눈알처럼 생각된 적도 있었다. 천사들의 빛나는 눈동자들이 우리를 내려다보며 지켜주고 있다고 여겼다. 어쩌다 살구가 익어서 떨어지면 무슨 행운이라도 얻은 것처럼 함박웃음을 지었다. 물컹물컹 터지는 살구맛을 혀끝으로 풋풋하게 느꼈다.
열두 살 때 서울로 이사를 왔지만 세월이 흘러도 살구꽃으로 환한 동네가 늘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럴 때마다 한달음에 달려가 뒷동산에 올라 살구나무 밑에서 마을을 내려다보곤 했다. 나무를 어루만지며, 친구들이 모두 떠난 이 자리에 너는 그대로 있구나, 올해도 열매를 많이 맺었니 하면서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그러면 살구나무는 내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이파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지금도 돌이켜보면 승용차도 없던 시절이었는데 살구나무 밑에 그저 앉아만 있다가 오려고 그 먼 길을 달려갔었는지, 참으로 모를 일이다.
고사(古史)에 보면 춘추시대 말, 공자가 자신의 고향인 산동성 곡부에서 행단(杏壇)을 만들어 최초로 예악(禮樂)과 시서(詩書)를 제자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그래서 행단이란 살구나무 밑에서 최초로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하여 학문을 닦는 곳을 이른다. 은행나무 밑이라고 알려진 부분이 있으나 북송(北宋) 이전에는 ‘銀杏’이란 명칭이 없었다는 게 학자들의 설명이다. 내게는 학문이라고 할 것은 없겠지만 어린 시절 살구나무 밑에서 놀면서 자연을 스승으로 둘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그래서 사람으로서는 따를 수 없는 자연의 이치를 배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행단의 상징은 기본적으로 예(禮)를 나타내지만 한편 급제를 의미한다니, 살구나무가 너른 세상에서 급제를 꿈꿀 수 있는 행운도 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러한 고향에 십오 년 전부터는 집을 다시 마련하면서 수시로 찾아가게 되었다. 이제는 몸과 마음이 모두 자라 살구나무 밑에서 놀 시기는 지났지만 여전히 그곳을 즐긴다. 살구나무도 이제는 늙어서 밑둥이 휑하니 뚫렸다. 더 이상 실한 과실을 맺지 않게 되자 사람들의 빛나던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내게도 인생에 있어서 살구나무와 같은 분이 계셨다. 동산 중앙에 우뚝 서 계시면서 깊고 넓은 그늘을 드리우셔서 행단을 만드셨고, 우리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문학을 배우며 이에 대한 꿈을 키웠다. 또한 좋은 문학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예(禮)에 대한 가르침도 받았다. 때로는 그 나무에서 떨어지는 물컹한 열매를 먹으며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머물렀다. 가지마다 피워낸 꽃들은 제자들의 가슴을 밝히는 환한 등불이었다. 그 등불을 바라보며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등불을 빛 삼아 자신들의 등불을 점점 더 밝히며 세상으로 나아갔다.
어느 날 세한(歲寒)의 시절이 덮쳐왔다. 사방에 찬서리가 내리면서 세상인심은 칼칼했고 잣대를 들이대며 거센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 세상 속에 놓여진 적막한 절해고도로 유배를 당하셨다. 침묵과 고통과 회한의 긴 세월을 건너야했다. 그늘의 고마움을 누리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사리며 모두 떠나버렸다. 세한의 시절을 가슴으로 지켜보면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떠올렸다. 제주도 유배시절, 혹한의 세월을 농축하여 회한을 담아 그린 그림이다. 허허로운 여백과 초라한 집 한 채는 유배지에서의 몸서리쳐지는 고독을 대변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권력에서 밀려난 그를 이득으로만 대하지 않았던 제자 이상적(李尙迪)을 위해 제발(題跋)을 적고 이 그림을 그려 주었다는 것은 후세에 두고두고 감동으로 전해지고 있다. 추사는 ‘송백후조’(松柏後凋)라는 공자의 논어 ‘자한편’(子罕篇)에 있는 말을 떠올리면서 늦게 시드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그렸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나무들의 풋풋한 기상에서 또다른 희망을 담아 낸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얼마 전에도 나는 동산에 있는 살구나무를 만나러 갔다. 이제는 고목이 되어 따 먹을 살구도 없지만 천성이 무지렁한 탓인지 그를 안 이후로 떠나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인적은 찾을 수 없었지만 그곳은 추사의 제자인 이상적이 말한 것처럼 저절로 맑고 시원했으며 그리고 행단도 그대로 있었다. 그 행단 아래서 결실한 살구씨들이 싹을 틔우고 풋풋한 기상으로 자라나 희망을 담아냈으면 하는, 늙은 살구나무의 마음을 오랜 시간 담아왔다.
서창에 비낀 노을을 보며 마지막 남은 물컹한 살구를 씹는다. 오늘 따라 어린 시절 먹던 풋풋했던 맛이 한 줌 붉은 노을빛처럼 그저 그립기만하다.

기사 등록일: 2020-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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