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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숲에서 여름나기(2)_ 김주안 (캐나다 여류문협)
 
이렇듯 내 마음을 온통 묶어버린 대자연의 초대는 하얀 숲(White Wood)에서의 여름나기를 더욱 빛나게 해 주었다. 낯설기만 했던 바람의 냄새, 온 우주를 휘감고 있던 하늘과 프레리 들판의 경계를 이어주는 아득한 지평선, 대자연의 거대하고도 황홀한 향연에 무방비하게 빠져들던 그 여름, 또 하나의 멋진 그림으로 덧대어져 내 인생의 색 바래지 않는 풍경화로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이다.
화이트 우드는 천여 명이 모여 사는 작은 타운이다. 마을이 이루어진 지 올해로 125년이 된다. 백년이 넘은 교회당 두 곳과 중심가에 몇 개의 건물들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이 마을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마을에 들어서면 1번 하이웨이를 지나는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가 있으며 모두 한국인이 경영한다. 길게 동서로 철길이 놓여 있고 이곳을 넘으면 왼편에 코업이라는 푸드 마켓이 보이며 오른쪽에는 판초스라는 가족 레스토랑이 있다. 그 옆에는 전쟁에 나가 희생된 마을사람들을 기리는 참전 용사 기념 공원이 있다. 이곳에도 무슨 전쟁이 있었나 싶어 공원을 둘러보았더니 1,2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후 전사한 군인들의 이름이 중앙탑에 빼곡히 적혀 있었다.
라론드 스트리트는 이 마을의 가장 번화가이며 이곳부터 3번가가 시작되는 입구에 커다란 벽화가 있다. ‘1890년 마켓 데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고 인근 지역에서 소와 말들을 팔고사기위해 정기적으로 섰던 장날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카우보이들과 농부들 그리고 마차를 탄 사람도 있고 말을 탄 여성도 눈에 띈다. 백여 년 지난 후에도 그림 속에 있는 건물이 라론드 스트리트에 그대로 남아 있어 화이트 우드의 역사를 또 한 번 읽을 수 있게 한다.
타임 스퀘어라는 자그마한 공원이 라론드 스트리트에 있는데 이곳은 마을에서 연합으로 하는 여러 행사들이 열린다. 캐나다 국경일 ‘캐나다 데이’ 다음 날인 7월 2일은 주일이어서 이 마을 일곱 교회가 함께 연합예배를 이 공원에서 하였다. 한국에서는 개신교와 서로 반목하는 캐토릭, 성공회, 루터교회 등 다른 종파들과도 이곳에서는 함께 행사를 치른다. 이날 150여 명이 참석하여 순서에 따라 예배를 드렸는데 아들은 그곳에서 유일한 동양인으로 중앙에 서서 찬양 리더를 하고 있었다. 이 마을에서 코리아라는 동양의 작은 나라를 그리 많이 알 리 없을 것 같아 아들이 홍보대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생각에 감회가 남달랐다.
그린가에 있는 시니어 공원에는 잘 정돈된 잔디밭 주위로 전나무가 빙 둘러 서 있고 중앙에 우물과 돌 비석이 있다. 우물은 아마 개척민 시대 사람들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팠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돌 비석에는 이 땅을 개간하고 개발한 개척민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는 비문이 적혀 있었다. 화단에는 나리꽃이 붉게 피어나 이들의 업적을 더욱 빛나게 해 주는 듯 공원을 환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이 공원 건너편에는 시니어 아파트가 있는데 아들이 부임하던 초기에 살던 곳이다. 하루는 이 시니어들과 점심을 할 기회가 있었다. 70세 정도는 젊은 층에 속한다고 하며 91세에도 정정한 모습이었다. 몇 분이서 직접 구운 빵과 쿠키를 가져오고 샐러드를 곁들여 음료수와 같이 점심을 즐기는 시간이었다. 매주 목요일이면 로비에 모여서 함께 식사를 하곤 했는데 이들의 따뜻한 배려로 아들은 낯선 곳에서의 적응이 훨씬 쉬웠다고 한다. 어느 날은 이들이 피크닉을 간다고 해서 따라와 보았더니 뒤뜰로 의자들을 옮겨 놓고 앉아 하루를 즐기고 있었다. 아들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진하게 듣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봉사하시는 분들이 모두 70세가 훌쩍 넘은 듯 보여 의자에 앉아 있기가 민망했지만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 ‘땡큐’만 연발했다. 음식을 나누면서 자그마한 이야기에도 맑은 목소리로 명랑하게 웃는 모습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남쪽으로 마을을 조금 벗어나면 너른 들판이 시작된다. 아무리 둘러봐도 높은 지대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대평원지대다. 이 들판으로 난 길을 따라 산책하기를 좋아했다. 고요가 가득한 공간에도 바람은 쉴 새 없이 일었다. 처음에는 그 바람조차도 낯설게만 느껴졌었는데 시간이 지나자 바람이 들려주는 풍경의 소리가 익숙하게 다가왔다. 시간을 달리하며 피었다 지는 들꽃들이 늘 말을 걸어주었다. 온 우주를 떠받치고 있는 듯한 광활한 하늘을 올려다보면 이 마을에 온 이유 중 하나가 더 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를 두고 셔터를 눌러도 하늘이 있어 풍경다운 풍경을 찍을 수 있었다. 깊고 푸른 하늘에 하얀 뭉게구름이 펼쳐져 있으면 온 마을은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서쪽 지평선 너머로 지는 해를 따라 노을이 그 구름들을 붉게 물들이면 온 마을은 몽환적인 풍경으로 바뀐다. 나는 그 들판에 서서 땅거미가 내려앉을 때까지 노을 속을 서성거리다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내 삶의 또 하나의 새로운 인연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돌이켜 보면 새로운 인연이 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울컥해지는 일이다. 잠시 스쳐갔다 해서 어느 누가 기억에 담아 두겠냐만 나는 어느새 마을 풍경들과 새로움을 넘어 지독한 인연에 묶여버린 듯했다. 두 달을 지낸 후 마을을 떠나던 날 그러한 인연으로 나를 묶었던 사방의 풍경들에 대해 손을 흔들며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내 기억들을 위해서 다시 한 번 눈에 담았다. 내 인생에 있어서 지독한 인연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자동차가 마을을 슬금슬금 빠져나가자 가슴이 먹먹해지고 있었다. 이별에는 늘 서툴다는 사실을 또 한 번 깨닫고 있었다.

기사 등록일: 2021-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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