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료칼럼) 오직 성경만이 판단 기준이다 9 - 다시 오실 예수님
— 시한부 종말론을 넘어, 성경이 말하는 재림의 길잡이
“예수님은 언제 오실까?” 인류가 가장 오래 묻는 질문 가운데 하나다. 대답을 서두른 사람들도 많았다. 1992년 한국을 뒤흔든 이른바 ‘휴거’ 소동은 날짜까지 정한 예언이었고, 직장과 학교를 그만두거나 재산을 처분한 이들의 상처를 남겼다. 당시 사이비 지도자와 추종 집단이 만든 소동은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고, 언론과 법정의 비판 속에 막을 내렸다.
다른 나라들도 다르지 않다. 2011년 미국의 라디오 목사 해럴드 캠핑은 “5월 21일”을 재림일로 못 박았지만 예고는 빗나갔고, 대중에겐 허탈과 냉소만 남았다. 더 비극적인 사례도 있다. 1997년 캘리포니아에서 39명이 ‘혜일-밥 혜성’ 뒤 우주선을 믿고 집단 자살한 ‘헤븐스 게이트’ 사건이다. 날짜를 정하고 폐쇄적으로 달려가면 무엇이 무너지는지, 이 사건들은 우리에게 차갑게 보여준다.
이런 일들을 나열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재림의 시간을 ‘정해놓는 일’은 사람을 두렵게 만들 뿐만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재림 신앙을 왜곡한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마 24:36) 날짜를 정하는 순간, 이미 성경에서 벗어난 것이다.
동시에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정반대의 현상인 ‘무감각’이다. “지겹도록 들어서” 재림을 잊고 사는 태도, 오늘의 편안함에 영원 감각을 꺼버리는 태도 역시 위험하다. 성경은 “깨어 있으라”(막 13:37)고, 삶의 현재 시제를 깨우는 명령형을 쓴다.
“언제?”가 아니라 “어떻게?”
예수님은 “내가 다시 오겠다”(요 14:3)고 분명히 약속했다. 다만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마 24:36). 날짜를 정해 선동하는 시한부 담론은 성경적이지 않다. 동시에 “아무도 모른다”는 말을 핑계로 무관심 속에 살아가는 태도 역시 성경과 거리가 멀다. 핵심은 ‘언제를 맞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맞이하느냐다’. 재림 신앙은 ‘예상’이 아니라 ‘준비’의 문제다.
징조는 계산표가 아니라 깨어남의 신호
마태복음 24장은 지진과 기근, 전염병, 전쟁과 소문, 사랑이 식어가는 시대, 복음의 세계적 확산을 징조로 제시한다. 오늘의 세계를 비관적으로 해석하자는 뜻이 아니다. 낙관과 비관의 진동 속에서 무감각을 깨우는 신호로 받아들이라는 초대다. 달력의 X표시가 아니라 양심의 알람이다. 징조를 본 사람에게 요구되는 첫 반응은 호들갑이 아니라 깊은 성찰과 실천이다.
재림은 보이고 들리는 실제
재림은 은유나 상징이 아니다. “구름을 타고 오는 그를 모든 눈이 보리라”(계 1:7).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울린다(살전 4:16). 어떤 비밀스런 영적 체험으로 대체되지 않는다. 그래서 재림 신앙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 각성이다. 오늘의 선택과 언어와 관계가 영원을 향해 선명해지는 체험, 그것이 재림을 기다리는 삶의 표지다.
성경이 그려주는 재림의 장면
성경은 두 가지 그림을 보여준다. 첫째, 생명의 부활: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아 있는 성도는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한다(요 5:29, 살전 4:16–17). 둘째, 닫힌 문: 자비의 시간이 끝나면 더 이상 유예는 없다(마 25장 열 처녀 비유). 그러므로 오늘의 시간은 유예된 은혜다. 기회가 기회일 때 붙드는 것이 지혜다.
잘못된 공포 마케팅, 그리고 또 다른 함정
시한부 예언은 공포로 결단을 강요한다. 반대로, 정보 과잉 시대의 무관심은 경각심을 마비시킨다. 둘 다 신앙을 왜곡한다. 성경은 공포가 아니라 소망으로 깨어 있으라고 부른다(막 13:33). 동시에 “노아의 때처럼” 일상의 바쁨이 영적 감각을 무디게 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마 24:37–39). 공포 대신 소망, 무감각 대신 깨어 있음—두 축을 동시에 붙들어야 한다.
징조의 시대를 사는 일상의 기술
양심의 등불을 매일 켠다:
-말씀을 읽고(작은 분량이라도), 오늘 한 가지 순종을 실천한다. 징조는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작은 순종을 통해 내 안에서 해석된다.
-관계의 평화를 앞당긴다: 화해를 미루는 습관은 종말 신앙과 어울리지 않는다. 오늘 전화 한 통, 메시지 한 줄이 재림 신앙의 실제다.
-가벼운 소유, 깊은 나눔: 불확실성의 시대일수록 더 움켜쥐고 싶지만, 재림을 믿는 사람은 ‘가지지 않음의 자유’를 배운다. 작은 관대함이 큰 증언이 된다.
-소명으로 일한다: 직업은 빵을 구하지만, 소명은 의미를 굽는다. 같은 일을 해도 목적이 바뀌면 하루가 달라진다.
-공적 책임을 기도와 행동으로: 전쟁과 재난의 뉴스를 소비하지 말고, 지역의 약자와 다음 세대를 위해 구체적 참여의 문을 연다.
경각심을 일으키는 오늘의 장면들
한 세대가 겪기 어려운 재난들이 겹쳤다. 팬데믹은 인간의 한계를 드러냈고, 전쟁은 평화의 취약성을 폭로했다. 기후 위기는 창조 질서의 신음이다. 기술은 편리함을 약속하지만, 진실과 거짓의 경계는 흐려진다. 성경의 언어로 번역하면, 사랑이 식고(마 24:12) 복음은 더 많이 전해져야 하고(마 24:14) 피조물이 탄식한다(롬 8:22). 이 장면들은 숫자 맞히기의 근거가 아니라, 신앙의 각성을 촉구하는 배경이다.
“도적같이”가 두렵지 않으려면
“도적같이 온다”(살전 5:2)는 표현은 위협이 아니라 초대다. 준비한 이에게 도적은 없다. 준비란 특별한 의식이 아니라 꾸준한 일상이다. 어제보다 오늘 한 걸음 더 정직하게, 더 정결하게, 더 따뜻하게. 그 누적이 신앙의 체력을 만든다.
맺음말—가까움의 윤리
고통과 괴로움의 인생의 길에서 우리는 자주 생각한다. 이 모든 일을 가장 잘 마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예수님이 오시는 것 만큼 확실한 결말은 없을 것이다. 그 때는 통증도, 질병도, 죽음도, 눈물도 없는 새로운 삶이 시작될 테니까. 마음 아픈 일도 더 이상 없을 것이고 죄의 결과도 다시는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테니까.
오늘 우리는 다시 이렇게 다짐한다. 날짜는 내려놓고, 방향은 붙든다-말씀을 따라 다시 오실 그 분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