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시행하라는데 정작 정부는 “미루라”...항공 민원제도 표류 - 정부 문건서 “교통부·장관들, 항공사 부담금 시행 지연·개입 정황”
아니타 아난드는 교통부 장관 재임 시절 항공사에 부과되는 수수료 도입을 연기해 줄 것을 교통국(CTA)에 요청했다. (사진출처=CBC)
(안영민 기자) 캐나다 정부 내부 문건에서 항공사에 민원 처리 비용을 부담하도록 한 제도 도입이 연방 교통부와 역대 교통장관들의 개입으로 수년째 지연돼 왔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그 사이 항공 여객 불만 처리 비용은 고스란히 세금으로 충당되고, 민원 적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공영방송 CBC의 탐사보도 프로그램 ‘고 퍼블릭(Go Public)’이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교통부와 두 명의 교통장관은 항공 여객 불만을 담당하는 캐나다교통청(CTA)의 업무에 반복적으로 개입하며 항공사 비용 회수 수수료 도입을 늦추거나 무력화하려 한 것으로 나타났다. CTA는 독립 규제기관이지만, 의회는 2023년 항공사들이 민원 처리 비용의 일부를 부담하도록 하는 제도를 도입하라고 명확히 지시한 바 있다.
그러나 2년 반이 지난 현재까지도 해당 수수료는 시행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항공 여객 민원 처리에 매년 약 3,000만 달러가 세금으로 투입되고 있으며, 보상 지연·결항·수하물 분실 등으로 제기된 민원 적체 건수는 이미 8만8,000건을 넘어섰다.
CTA는 민원 폭증으로 시스템이 마비되자, 임시 비용 회수 방안으로 ‘보상 대상이 되는 민원’에 한해 항공사에 수수료를 부과하라는 의회의 지시를 받았다. 하지만 CBC가 확보한 2,000쪽이 넘는 내부 문건에는 교통부와 장관실이 CTA에 공공 의견 수렴을 늦추거나, 수수료 수준에 문제를 제기하고, 제도 도입 자체를 보류하라고 요청한 정황이 다수 담겨 있다.
CTA는 항공사당 민원 1건당 790달러를 부과하는 방안을 제안했고, 2024년 가을 공청회를 열어 83건의 의견서를 접수했다. 소비자 단체와 시민들은 대체로 찬성했지만, 항공사와 업계는 ‘근거 없는 민원을 부추긴다’며 강하게 반대했다. 항공사가 아닌 승객에게 비용을 부담시키자는 주장도 나왔지만, 이는 의회가 허용하지 않은 방안이었다.
문건에는 2024년 10월 당시 교통장관이던 아니타 아난드가 CTA 위원장에게 보낸 서한도 포함돼 있다. 아난드는 자신이 장관직을 맡기 직전 CTA가 공청회를 강행했다며, 교통부가 “반복적으로 연기를 요청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전 장관과의 협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며, 자신에게 의견을 제시할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은 부당하다고 밝혔다. 또한 790달러라는 수수료 수준에 대해 충분한 검토가 이뤄졌는지 의문을 제기하며, 항공여객보호규정 전반의 개정이 마무리될 때까지 어떤 비용 회수 제도도 시행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오타와대 행정·헌법 전문가인 폴리 데일리는 “헌법적으로 부적절한 개입”이라고 비판했다. 장관이 바뀌었다고 해서 법적 절차가 다시 시작되는 것은 아니며, 누구를 어떻게 협의할지는 독립기관의 권한이라는 지적이다. 항공 여객 권리 단체 ‘에어 패신저 라이츠’의 창립자 가보르 루카치는 “정부가 의회의 결정을 사실상 방해하고 있다”며, 장관의 요청은 형식상 ‘요청’일 뿐 실질적으로는 지시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2025년 5월 크리스티아 프릴랜드가 새 교통장관으로 취임한 뒤, CTA 위원장은 비용 회수 제도 시행 준비가 끝났다고 서한을 보냈지만 이후 진전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루카치는 “교통부와 장관들이 ‘협의권’을 명분으로 제도 시행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 사이 항공업계의 로비는 거세졌다. 공개 로비 기록에 따르면, 수수료 도입 지시 이후 주요 항공사와 업계 단체들은 총리실, 교통부 고위 관료, 국회의원, 장관들을 상대로 약 150차례 회동을 가졌다. 웨스트젯은 다수의 로비 보고서에서 ‘비용 회수 제안’을 주요 의제로 명시했다.
전문가들은 항공사가 수익에 영향을 주는 제도에 반발하는 것은 예상 가능한 일이지만, 문제는 규제 시스템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현재 CTA의 민원 적체는 2028년까지 15만 건 이상으로 늘어날 수 있다는 내부 전망도 나온다. 법이 보장한 보상을 받기까지 수년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현실화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