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충근의 기자 수첩) Remembrance Day - 전쟁 중에도 인간의 존엄과 명예, 신뢰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독특한 사례
노병의 경례 _출처 CN드림
Remembrance Day, 11월11은 1차대전이 끝난 날이다. 1914년7월28일 시작해 1918년 11월11일 11시에 인류 최초의 대량 살육이 끝났다. 그래서 기념식은 통상11시에 시작된다. 기계공업의 발전으로 1차대전에는 탱크, 기관총, 화염방사기, 독가스 등 대량살상 무기가 등장했다. 사망자 수는 군인 민간인 합해 약 2,000만명에 이른다.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그 중 가장 잔인한 파괴는 인간파괴다. 전쟁은 무기로 신체를 물리적으로 파괴하고 살아 남더라도 부상자는 정신적 신체적 장애를 안고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한다. 전쟁은 가족과 공동체를 파괴하고 인간과의 신뢰를 파괴하고 증오와 적개심을 심어준다.
전쟁은 단순한 무력충돌이 아니라 인간의 몸과 마음, 사회, 도덕, 문화까지 파괴하는 악마의 행위다.
그러나 인간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전쟁 속에서도 인간으로서 품위와 도덕, 존엄과 자존을 지키려 노력한다.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이면서도 윤리적 존재이기 때문일까?
전쟁 속에 피어난 인간의 자존과 명예
로버트 캠벨 대위는 1차대전 당시 영국군 이스트 서리 연대(East Surrey Regiment) 하급부대 지휘관이었다. 그 부대는 프랑스 북서부 지방에 주둔했는데 1914년8월24일 독일군과 전투에서 캠벨 대위는 다섯 군데 총상을 입었고 턱이 부숴지고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은 채 독일군 포로가 되었다. 독일군은 그를 퀠른에 있는 군병원으로 이송해 치료했다고 기록도 있고 벨기에 간호사가 치료했다는 기록도 있다. 치료가 끝나자 마그데부르그(Magdeburg) 포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어느 날 그는 적십자사를 통해 가족에서 온 편지를 받았다. 차가운 막사 속에서 편지를 읽는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캠벨의 어머니 루이스가 암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동료 포로들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 편지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갈 수 없는 곳, 전선에서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갈 수 없는 곳에서 외아들 얼굴도 못 본채 죽어가고 있었다. 참호 속에서는 온갖 형태의 죽음이 일상처럼 흔하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이야기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다는 사실은 또 다른 잔혹 함이었다. 여기서 캠벨은 불가능한 결심을 했다. 독일군에게 가석방을 요청해 집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기록에는 수용소 당국에 편지를 썼다고 했고 다른 기록에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에게 편지를 썼다고 했다. 그는 편지에 사정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가 위독한데 외아들로서 임종을 지키고 싶으니 임시로 석방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장교로서 신사로서 자신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맹세했다. 편지를 쓴 캠벨도 기대하지 않았고 동료 장교들도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전쟁 중인데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이유로 적국에서 포로를 풀어줄 리가 있겠나? 그러나 캠벨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편지를 보냈다.
기관총, 독가스, 참호전에서 대량학살로 모든 것이 파괴되는 1차대전에도 장교들의 명예는 그래도 명맥을 유지했다. 장교들은 무기를 들지 않겠다는 약속이나 돌아오겠다는 약속으로 임시로 석방될 수 있었다. 이것을 신사도(code of honor)라고 한다.
편지를 보냈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어 캠벨은 단념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용소 당국에서 호출을 했다. 독일군 장교는 조심스러운 영어로 “귀하의 요청이 수락되었다.”고 말했다. 어머니를 보러 영국 가는 것이 허락되다니!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야 합니다. 이곳으로 반드시 돌아와야 합니다.” 캠벨을 주저 없이 말했다. “맹세합니다.”
중립국 스위스와 적십자사를 통해 이동이 조율되었다. 독일군의 호송을 받으며 스위스 국경에 도착한 캠벨은 국경을 넘어 중립국으로 들어 갔다. 그곳에서 프랑스를 거쳐 마침내 도버 해협을 건너 그리운 고향 땅을 밟았다.
단 1초도 주저함 없이
철조망, 진흙탕으로 변한 참호, 굶주림과 공포, 둔중한 중화기의 포성, 온기 없는 포로 막사, 독일군 감시초소를 뒤로 하고 고향에 돌아온 캠벨은 자유인이 되어 고향 땅을 걸었다. 익숙한 얼굴들과 거리에서 마주쳤다.
어머니는 아직 살아 있었다. 그는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와 아들의 대화는 개인적이고 신성한 것이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몰라도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못 잊어 하는 아들을 만났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그는 장례에 참석했다. 다른 자료에는 어머니가 1917년에 돌아가셨다고 전한다.
캠벨은 포로수용소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누구도 그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고향의 가족들도 돌아가지 말라고 간청했다. 영국 국방부에서 캠벨에게 원대 복귀하라고 명령할 수도 있다. 그런 명령이 내리면 군인으로서 명령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국방부는 캠벨에게 복귀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가족들과 작별하고 그는 오던 길을 되짚어 수용소로 돌아가는 여정을 시작했다.
캠벨의 수용소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은 단호해 가족들의 간청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명예뿐 아니라 동료 포로들에 대한 신뢰도 있었다.
“내가 돌아가지 않으면 동료 포로 누군가 가석방이 필요할 때 가석방이 거절당하는 불이익을 겪어야 한다.” “내가 돌아가지 않으면 어쩌면 동료 포로들은 보복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평생을 명예를 저버렸다는 죄책감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
아무 것도 잃을 게 없을 때, 손해 볼 게 없을 때 지키는 약속은 너무도 쉽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고, 생명을 조차 잃을 수 있는 순간에 지켜야 하는 약속에 캠벨은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위선일까, 모순일까?
그는 마그데부르그 수용소에 정문에 다시 나타났다. 독일군 위병 장교와 악수를 했다.
그의 복귀는 영국과 독일 양쪽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독일 신문에서는 “명예를 지킨 영국인”을 대서특필했고 영국 신문은 “인간 존엄성을 지킨 신사” 라고 추켜세웠다. 그의 이야기는 전선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독가스와 기관총이 난무하는 지옥 같은 참호전에서도 명예는 살아 있었고 인간성은 살아있었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전쟁 속에서도 약속의 의미는 살아있었다.
복귀한 캠벨 대위는 동료 포로들과 탈출 계획을 세웠다. 캠벨은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지 탈출을 포기하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았다. 군인은 적에 포로가 되었을 때 탈출해서 부대에 복귀하는 것이 또한 의무다. 예외가 있다면 소련군이다. 2차대전 때 소련군은 자국 군인이 포로 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포로가 되었다 복귀하면 처벌받았다. 포로가 되느니 자결을 종용했다.
캠벨은 동료들과 굴을 파서 탈출하기로 계획을 세워 경비병을 매수해 장비를 구하고 몇 달 동안 경비병 몰래 굴을 파고 파낸 흙을 숨겼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발각되어 탈출은 실패했고 그는 징벌방으로 이송되었다. 일부에서는 그의 행위를 위선이라고 비판했다. 탈출하느니 돌아오지 않았으면 될 것 아닌가? 그러나 캠벨은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탈출은 군인의 의무로 명예를 저버린 것이 아니다.
독일군도 캠벨의 논리를 인정해 명예를 저버린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는 포로 생활하다 1918년 11월11일 종전 후 석방되어 영국으로 돌아왔다. 부대에 복귀한 캠벨은 1925년 전역했다. 그는 2차대전이 일어나자 1939년 현역으로 복귀해 중령으로 군 생활을 마친 후 1966년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로버트 캠벨 대위의 실화는 전쟁 중에도 인간의 존엄과 명예, 신뢰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독특한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