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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희 시인의 시 창작 특징 - 평론/이명희 (사)한국문협 알버타지부)

이명희 (시인, 평론가)
출처 : 조선일보 
고발적인 시- 최영미 시인이 ‘괴물’이라는 시로 고은 시인을 고발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름다움을 포장한 변태 노인의 시를 분별없이 감상했을 테고, 문제의 시인을 존경했을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김승희 시에서도 조용한 고발을 엿볼 수 있다.

[배고픈 승냥이의 노래] ‘어디야, 어디야/명사계가 어디야/중략/거울이 원죄야, 이름이 원죄야, 아니 다/밥이 원수야, 꿈이 원수야/중략/거울 앞에 나를 세워놓고 부려먹고 부려먹고 또 부려먹고/이 산 너머 가면 명사계 있냐고/중략/어디 가야 우리 어머니 만나요?/어디가야 내 사랑 다시 만나요?/어디 가야 해와 달 함께 만나요? ’

군부의 희생양이 된 넋을 달래는 시다. 배고픈 승냥이는 양심의 가책 없이 저보다 약한 자를 마구 잡아먹는다. 그녀의 시 곳곳에 군부정권을 고발하는 한숨과 절망으로 점철되어 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듯이’ 그녀의 시가 고발의 밑거름이 되어 세상이 바뀌고, 사회가 바뀌고, 인간들이 바뀐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교화적인 시-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의 시에는 세상살이가 토악질을 할 만큼 힘들어도 참고 살다보면 환상의 섬에 도착할 수 있다고 위로한다. 자살하려는 사람,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사람들을 교화시키며 희망을 주고 있다.

[서울의 우울 13-위층 사람] ‘당신은 지금 나의 하늘을 밟고 서 계십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지 마시고/ 천상천하 유아공존 하십시오./당신은 하늘을 밟고 서 계시나/ 소리 내지 않는 그분을 상기하십시오./아니요/ 아니요/ 물망초 꽃이 아니라 아예 나를 잊으라는 망초꽃으로/ 조용한 망초꽃으로 /너영나영 아늑히 피어나자는 것입니다.’

사회의 문제가 된 층간 소음에 관한 시다. 살인까지 불사하는 현대인들의 병적 에너지를 달래본다. 이 얼마나 부드러운 교화인가! 하잘 것 없는 감정싸움으로 삶을 낭비하고, 혈압 올려 핏 값을 치루는 고질적인 현대인의 병. 에고는 그만 내려놓고 타자를 위해 살기를 권유하는 시가 아니겠는가!

원만해진 시- 김승희의 산문집 [33세의 팡세]는 ‘열정’ ‘고독’ ‘언어의 카리스마’ 를 상징했다. 이런 수식어는 젊을 때 감성의 과부하에서 온 게 아닌가 싶다. 사물을 보는 감성을 안으로 삭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낱낱이 드러내야 하는 사람이 있다. 명성이 높았다가 주홍글씨를 달고 추락하는 시인보다 이름 없이 겸손하고 곱게 사라지는 글쟁이가 나을 수도 있다.


[희망이 외롭다]의 시처럼 아름다운 시는 마음의 바탕에서 나온다. 열띠고 흥분된 감정에서 묘사한 시가 아닌 중년의 삶이 묻어 나온 시라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지 않고 구체적인 심상을 드러냄으로써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둥글어져 보인다.

엘리엇의 에세이 구절 ‘시는 감정의 해방이 아니라 감정으로부터의 탈출이며, 인격의 표현이 아니라 인격으로부터의 탈출이다’ 감정조절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희망에는 신의 물방울이 들어 있다] 1연에 ‘꽃들이 반짝반짝했는데/그 자리에 가을이 앉아 있다/꽃이 피어 있을 땐 보지 못했던/검붉은 씨가 눈망울처럼 맺혀 있다/희망이라고...’

[서울의 우울 3-캔버스 위에 연탄재] ‘가르칠 무엇도 없는데/가방을 들고 학교에 나간다/나는 하수인/나는 심부름꾼/ 중략 /나는 시인이다/연탄재를 버리려고/연탄집게를 들고 영동대로에 서 있다/버릴 곳이 없다/얼어붙은 입이 자꾸 구겨지며 피가 터진다’

시인의 연륜, 경륜으로 희망을 가르치려 해도 허무한 몸짓임을 핵심만 표현했다. 첫 시 [희망에는 신의 물방울이 들어 있다]에서부터 [희망이 외롭다 1], [서울의 우울 3-캔버스 위에 연탄재]까지 독자들을 부추기거나 감정의 홍수로 끌어들이지 않고 있다. 이것이 원숙미다. ‘내려놓음’의 시라 해석이 편안하다.

[모차르트의 엉~덩이 3]의 첫 연을 보면 ‘미안하지만/난 실용 시대의 배덕자/풍자를 선택한 순간에만 마음을 가질 수 있네/이건 비밀이지만/접시 물에 빠져 죽는 파리처럼/시대를 선택하면 네가 죽을 수밖에/없다는 예감이 사방에서 다가왔던 것이다.’

시인은 모차르트처럼 맘대로 살 수 없어 기회주의자이며, 현실주의자임을 밝힌다. 그녀는 자신이 월급쟁이고, 직장에서 해고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평범한 사람임을 보여준다. 모차르트는 자기감정이 추구하는 대로 살았다. 뇌에 번득이는 악곡을 세상에 남겨 천재성을 알렸지만 현재의 삶도 감당할 수 없었고, 사후조차 알 수 없었다. 모차르트는 세기적인 작품을 후대에 남겼지만 정작 자신은 ‘육신이 묻힐 땅 한 평도 없어 빈민들의 시체와 함께 공동묘지에 던져졌다’

시인은 현실이 두려워 앙드레 지드의 ‘배덕자’나 모차르트 같은 천재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평범하게 살 수 없음이 복선으로 깔려 있어 의미심장하다.

기사 등록일: 2025-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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