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기 _ 필름 카메라로 쓴 시 - 연작 10
한때 나의 책상 위에는
말이 없는 친구 하나가 있었다.
Erika Typewriter
그 조용한 기계는
내 생각이 길을 잃을 때마다
검은 리본 위에
하나씩 길을 만들어 주었다.
연애편지와 리포트,
밤늦은 일기와 서툰 논문까지
나는 독수리 타법으로 더듬더듬 말을 걸었고
그 친구는
또각또각 소리로 대답했다.
생각이 맑은 날에는
그 소리가 새처럼 가벼웠고
마음이 흐린 밤에는
키 하나 누르는 일도
서로 숨을 고르듯 느려졌다.
이제 그 친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책장 사이에서
오래된 시간처럼 조용히 앉아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내 젊은 날의 문장들은
어디까지나
그 친구의 또각거림 속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글과 사진 : 원주희 ( 캘거리 문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