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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민수기) 야 빵 맛있겠다_2
글_이경임 (캘거리 교민)

그이의 학교는 지금은 대학교 조경이 아름답기로 전국에서도 손꼽힐 정도이지만 그때는 산밑에 덩그라니 빌딩하나만이 자리잡고 있어서 삭막하기 짝이 없었다.
스산한 산바람이 불어오면 그 소리는 꼭 귀신이 우는 듯 하게 들렸다. 휘이잉 휘이잉.
겨우내 미동도 않던 개골창 가에 뽀시시 나온 버들강아지가 기지개 켜고, 눈 인듯 이슬 인듯 꽁꽁 얼어 붙은 땅 위로 살포시 고개를 내밀던 할미꽃. 할미꽃을 시샘이라도 하듯이 민들레는 화려한 노랑 꽃잎을 자랑하며 여기저기서 아우성을 치고 그러면 이내 힘없는 할미꽃은 사라져 갔다.
여름이면 매미 울음 소리가 하늘을 가득 메우고 고추잠자리가 잔디위로 하나 가득 춤 출때면 뒷산 숲속 감나무는 노랗게 빨갛게 익어간다.
우리는 오솔길을 따라 거닐며 데이트를 즐겼고 야산을 가로 질러 자취집에 들어서면 일명 '마귀할멈' 이라 불리는 할머니가 손녀랑 함께 마루에서 우리를 쳐다 보곤 하였다. 마귀할멈이란 별명이 붙은 이유는 다름 아닌 '똥값' 때문이다.
지금은 대부분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 하겠지만 그때는 개인집들이 대부분 푸세식 화장실이었고 화장실의 크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화장실 청소차를 한번 부를 때마다 오천원에서 칠천원 정도의 청소비용이 든다.
그런데 자취를 시작한지 사흘만에 화장실을 청소했다며 두당 칠백원씩 천사백원의 똥값을 할머니가 요구했던 것이었다.
둘이는 이사 온지 며칠 되지도 않았고 푸세식 화장실은 냄새가 지독하기 때문에 학교에 있는 수세식 화장실을 이용한다고 항변했지만 할머니의 막무가내식에는 당할 도리 밖에 없었다.
덕분에 할머니는 '마귀할멈'이란 자랑스럽지 못한 별명을 달게 되었다. 삶이 힘겨워 등은 굽고 얼굴엔 훈장처럼 굵직굵직한 주름이 깊이 패어 있었지만 삶을 다하는 그날까지 일하고 아끼고 어떻게 해서든 한푼이라도 살림살이에 보태고 손녀 과자라도 사주고 싶어하시던 작은 몸집의 할머니. 우리들 할머니의 자화상. 난 그 할머니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가끔 그이의 자취방에 들러 청소도 해 주고 손가락이 아니라 주먹이 드나들 정도로 많이 찢어진 창호지도 발라 주고(도배하던 실력 발휘해서) 할머니 손녀에게 과자도 사 주었으므로 할머니는 내가 가면 반가와 했다.
지금쯤 하늘 나라에 계시겠지. 어쨌든 우리는 3학년 1학기 동안을 대부분 그이의 학교 주변에서 보냈다.
대학교 주변에서 데이트 할 때 좋은점은 첫째, 대부분 남녀 학생들이 섞여 다니므로 우리가 함께 다녀도 특별한 시선을 던지지 않는다. 둘째, 대학교 주변의 음식점들은 시내 중심가 보다 가격이 훨씬 저렴 하다는 점이다. 가끔씩은 당구장에 가서 그이가 친구들과 하는 당구게임이 끝날 때까지 야쿠르트를 마시면서 기다려 주기도 했다. 당구장에 가면 서비스로 나오는게 야쿠르트인데 한입에 꿀꺽해도 시원찮지만 그때는 빨대를 꽂아 얌전하게 꼴깍꼴깍 마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친구들과 어울려 놀 시간 좀 주지 뭐하러 당구장까지 따라 다녔나 싶다.
그리고 또다시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다. 목욕탕은 대부분 8월 한달은 휴업하면서 보일러나 다른 기계들을 보수 한다.
우리집도 예외는 아니어서 겨울 방학 때와는 달리 나는 많은 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는데 그이로부터의 연락이 끊겨 버렸다. 자취방에는 전화가 없었으므로 전화는 꼼짝없이 내가 기다려야 했다.
여자의 예감이란 특별하지 않은가. 전화를 기다리다 못해 나는 그이를 찾아 학교로 갔고 그이의 알 수 없는 차가운 태도에 나는 왜 그러는지 이유도 묻지 않은 채 돌아왔다.
우리의 1차 냉각기가 시작되었다. 서로 연락을 끊고 만나지 않았으며 그이도 나도 많은 방황 없이 3학년을 보냈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나?) 4학년이 된 5월말 우리는 우연히 55번 시내버스 안에서 만났다. 또 한번의 우연인지 필연인지의 만남이었다.
죽도록 사랑하다 헤어진 것도 아니고 서로 미워하고 원망하면서 헤어진 것도 아니었기에 우린 누가 먼저 랄 것도 없이 서로 인사를 주고 받았다. 조금은 반갑고 조금은 어색해 하면서.
물론 그 이후로 우리의 데이트는 다시 시작 되었는데 그래도 그이가 그때 왜 그랬는지 이유는 알고 싶었다. 그이는 나와 데이트 하면서 성적이 조금 떨어졌다. 게다가 사랑이 깊어지면 깊어질 수록 이별에 대한 아픔이 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한 나머지 나와 만나지 않기로 다짐했던 것이었다.
그이는 이미 그때 언젠가 내가 그이 곁을 떠날 것이라는 것을 생각 했던가 보다. 그이가 내게 한말이 기억 난다. 몸이 불편한 자기와 결혼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며 그 대신 주위에 만나는 여학생들을 모두 친구로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몸이 불편하다고 모두가 혼자 사는 것은 아니지만 결혼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듯이 그이가 우리의 미래를 걱정할 때에도 난 ‘꼭 그이와 결혼해야겠다’ 라는 생각보다는 그냥 얼굴을 보면 반갑고 얘기 나누는 것이 즐겁고 안보면 보고 싶고 그런 내 감정에 따라 무턱대고 만난 것 같다.
비가 온 뒤 땅이 굳어 진다고 우리의 사랑은 조금씩 조금씩 발전해 나갔고 나는 더디어 우리의 앞날에 대해 조금씩 걱정을 하게 되었다. 그냥 그렇게 데이트만 하다가 내 마음이 변하지는 않을까도 걱정되었다.
그래서 내 마음이 흔들릴까 봐 내 마음을 잡아두기 위한 방편으로 그이의 부모님께 예를 갖추어 인사를 드리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그이는 느닷없이 자기를 따라 오라며 나를 끌고 가 부모님께 며느리 될 사람이라고 소개를 시켜 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부모님께서 얼마나 황당해 하셨을지, 또 얼마나 나를 배우지 못한 여자라고 흉보셨을지 짐작하고도 남겠다.
(다음호에 계속)

본 글은 CN드림 2003년 5월 2일자와 2005년 1/21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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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등록일: 2003-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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