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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적 내용으로 가득한 최성철 목사의 칼럼_독자투고
“제발 목사 타이틀만이라도 빼달라 !!!”
얼마 전 에드몬톤의 모 독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최성철 목사 칼럼은 다분히 이단적인 내용들로 가득차 있는데 어떻게 교민신문에 실을 수 있느냐며 CN드림을 아끼고 사랑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안타깝다고 뜻을 전해주었다.
최근 캘거리에 모 교민(장로 직분)도 최 목사 칼럼에 대해 구두로 의견을 전해주었는데 위와 유사한 의견을 가진 독자 분들이 더 있다고 판단되어 본지에서는 독자투고 형식을 빌어 편집부의 답변을 함께 실어보았다. 본 답변에 대해 이견이 있는 분들은 독자투고나 개인 칼럼 형식을 통해 언제든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음을 알려둔다. (다만, 근거 없는 비방이나 인신공격은 사절) 끝으로 CN드림은 특정 종교나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 항상 공평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알려둔다. (편집부)


독자 의견)
최성철 목사의 칼럼 내용이 다분히 반 기독교적이라 교민신문에 실리는 게 당혹스럽기는 하지만 모두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는 만큼 실리는 것 자체에 이의는 없다. 다만 목사가 창세기도 믿지 않고, 원죄론도 안 믿고, 천국과 지옥은 인간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며 심지어 예수도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말하는 건 인본주의자들과 안티크리스챤들의 주장인데 어떻게 스스로를 목사라고 칭할 수 있나?”
목사라는 칭호로 인해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가치관의 혼란과 신앙의 혼선을 빚고 있다. 그러니 제발 그 칼럼에서 ‘목사’라는 호칭은 빼달라.

편집부 답변)
최 목사 칼럼이 다분히 진보적이라는 데에는 동의합니다. 이민사회에서는 보기 힘든, 그래서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에게는 내용이 충격적이라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도 이해합니다.
그런데 실은 그 칼럼 내용들 대부분 북미의 주류 신학계에서는 이미 상식에 속하는 내용들이며 이는 새로운 변화의 물결입니다. 그래서 동포사회에 충격과 여파가 크더라도 한번쯤은 소개해서 성서나 기독교 교리에 대해 독자들의 이해의 폭을 넓히고 각자에게 많은 도전의 시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1년간 칼럼을 게재하는 것으로 최 목사와 전격 합의가 된 것입니다.
우선, 목사 직함을 빼달라는 요청에 답변하자면, 최목사는 캐나다의 명문 맥길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캐나다의 주류교단인 캐나다 연합교회에서 정식으로 목사 안수를 받았고, 지난 20년간 캐나다에서 정상적으로 목회활동을 하였으므로 외부의 요청에 의해 종교 칼럼에 목사 직함을 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교민사회에 최 목사 칼럼이 이단이라는 주장들이 적잖게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최목사가 만들어낸 이야기들이 아니고 실상 이미 서구사회에서는 상당히 상식적인 내용이고, 신학계에서 이런 내용은 이미 주류로 자리를 잡고 있으나 유독 보수적인 한인교단에서만 이를 일체 거부하고 이단시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캐나다의 명문 대학들(토론토, 퀸즈, 맥길, UBC, 앨버타, 캘거리, 리자이나, 멕메스터 등)과 미국의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등의 아이비리그 대학들에서 가르치는 ‘성서비평학’ 에서 신구약성서는 고대 유대인들이 신비스럽고 경이로운 하나님 체험을 ‘은유적으로’ 기록한 책이라고 가르칩니다.
성서비평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언제, 누가, 어디에서, 왜, 누구를 위해서, 어떻게 기록했는지 그리고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문화에 대해서 탐구하여 문자 뒤에 숨겨진 메시지를 찾는 것이 목적입니다. 현재 성서비평은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의 주류이며, 문자주의 또는 직역주의는 소수의 비주류에 속합니다.
최목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 안타깝게도 많은 한인 목사들은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 학교에서 배운대로 가르치지 않고, 주일학교 시절로 되돌아가 교인들을 어린 아이 취급하면서 신학은 전문인들이나 다루는 이해하기 힘든 학문이라고 주장한다”며 “새로운 신앙의 탐구인 신학에는 목사와 평신도 구분이 없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최목사는 인터뷰와 칼럼을 통해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전 세계 기독교에서 ‘성서비평’이 보편화되면서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지 않고, 다른 종교들과 인종들에 대해서 포용적이며 성 차별과 동성애 차별을 배척합니다. 캐나다, 영국, 프랑스, 등 주요 기독교 국가들이 동성애 결혼을 합법화하고 있으며, 미국은 금년 안에 합법화 될 것입니다.
최근 한국 갤럽의 통계에 따르면, 남한의 개신교 인구는 약 860만입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목적을 순위별로 보면 ‘마음에 평안을 얻기 위해’(68%), ‘복을 받기 위해’(16%), ‘죽은 후에 영원히 살기 위해’(7.8%) 입니다. 다원주의에 대해서는 53.1%가 다른 종교들에도 동일한 진리가 있다고 긍정적으로 이해합니다.
다시 말해, 대다수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성서를 하나님의 절대적인 계시로 문자적으로 읽어야 하고,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어야 하고, 예수가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것을 믿어야 하나님의 징벌을 면하고 축복을 받는다는 성서 근본주의에 관심이 없습니다. 즉 지옥/천당, 징벌/축복의 이분법적 믿음은 더 이상 효력이 없습니다.
초, 중, 고등학교에서도 하나님은 자연의 법칙을 깨뜨리는 초자연적인 신이고, 약6000년 전에 6일 동안에 미리 설계된 대로 완성된 우주를 만들었다는 창조론을 가르치지 않고, 우주의 생성의 기원인 빅뱅과 다윈의 진화론과 지구과학(지질학)을 가르칩니다. 이민사회 대다수 한인개신교회가 갖고 있는 성서 근본주의는 지난 100여 년 동안 소수의 개신교도들 가운데에서 일어났던 현대의 산물이며, 21세기에 이 세상에 더 이상 적용이 안되고 있습니다. "

이런 정황으로 볼 때 단지 내 것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이단으로 규정하기 보다는 상대의 주장이 틀렸다면 신학적 타당한 근거와 논리로서 당당하게 맞대응 하는 것만이 사회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만약 특정 광고나 칼럼이 기득권층 혹은 권력의 압력으로 인해 못 실린다면 바로 이것이 사회의 해악이며 동포사회는 이런 것들을 더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의 개신교도 초기에는 이단으로 낙인 찍혀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한 순교의 역사로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을 바꾸었던 모든 혁신들도 다수가 아닌 소수에서 시작되었으며 기존 사회의 통념과 관습을 모조리 파괴하고 뒤엎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의 나를 죽여야 내일의 내가 태어나는 법’이라는 문구가 절실해 지는 시기입니다.
오랜 세월 교민신문에는 보수적인 색채의 종교칼럼으로 채워져 왔었습니다. 이제는 한번쯤 세계의 흐름에 발 맞춰 진보 쪽 의견도 경청해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독자 분들께 있기를 바래봅니다. 감사합니다.
끝으로 신구약 성경에 대해 최성철 목사가 보내온 내용을 옮깁니다.

하나님은 왜 성서원본을 보존하지 않았을까?
성서는 인류사회의 ‘역사적 산물’이다. 구약은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가 변천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생존한 체험적인 이야기들이며, 신약은 로마제국의 잔혹한 통치시대에 기독교 공동체들이 용감하게 예수의 정신에 따라 하나님 나라 운동을 전개한 이야기들이다. 성서는 고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역사적 환경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과 세상을 체험한 신앙고백이기 때문에 성서는 ‘인간성의 산물’이다.
구약은 히브리어로, 신약은 고대 그리스어로 기록되었기에 성서본문의 온전한 의미와 뉘앙스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이해해야 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는 글자가 없는 아람어를 사용했다. 예수가 아람어로 가르친 진리들이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지 40여 년 후에 최초로 마가가 그리스어로 번역해서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했다. 예수의 말씀이 얼마나 정확하게 전달되었는지 알 수 없다.
또한 히브리어 구약성서와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라틴어와 영어, 한국어로 번역한 성서들도 원초적인 성서 본문의 뜻을 완벽하게 전하지 못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성서원본을 수많은 필사가들이 수 백 년 동안 베낀 수많은 사본들이 얼마나 정확한지 파악하기도 어렵고, 고대어를 알지 못하는 대다수의 현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축자영감의 성서가 일점일획의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계시라면 하나님은 성서원본을 보존했어야 하고 또한 평범한 사람들이 수준 높은 지적 능력이나 고대어를 배우지 않고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기록했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감을 불어넣은 오류가 하나도 없는 고대성서 원본을 현대 기독교인들은 하나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 사본들을 현대어로 번역한 성서가 오류가 하나도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성서 근본주의는 큰 모순이 아닐 수 없다.
현대인들이 읽고 있는 성서는 수 백 년 동안 수많은 필사가들이 사본에서 사본으로 베낀 것들 중에 극소수 주관적으로 선별하여 편집한 책이다. 심지어는 어느 사본이 원본을 처음으로 베낀 첫 번째 사본인지 알기도 어렵다. 그러나 사본들이 그 시대의 우주적인 하나님의 궁극적인 진리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진실하다.
성서는 대단히 인간적인 책이다. 성서는 단번에 한두 사람이 완성한 단행본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수많은 필사가들이 여러 사본들을 수집하고 편집하여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필사한 사본들의 모음집이다.
원초적인 성서저자들도 의심할 여지도 없이 자신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한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세계관과 경험과 신학과 신앙과 견해와 필요성이 성서기록의 기초가 되었다. 필사가들도 다른 사본들을 베낄 때에 개인적인 주관에 따라서 고의적으로 변개하고 첨가하고 편집했다.
성서는 한두 사람이 단번에 쓴 책이 아니기 때문에 앞뒤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부분들이 많다. 또한 신약의 원초적인 언어들은 그리스어가 아니라 아람어나 히브리어 즉 ‘셈족의 언어’였다.
즉 성서의 언어는 아람어와 히브리어이었고 이것이 그리스어로 번역되어 신약성서 원본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성서원본은 현존하지 않고 수백년 동안 많은 필사자들에 의해서 수없이 많은 그리스어 사본들이 만들어졌다.
인쇄술이 생기기 이전인 고대사회에서는 책의 사본 하나를 손에 쥔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필사본을 만들었다. 원저자의 원본을 첫 번째로 필사하는 사람은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정확하게 필사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책을 베끼다 보면 부주의로 본문이 변경되기도 하고, 필사자가 고의적으로 본문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 또한 자연스럽게 실수도 따르기 마련이다. 종이는 물론 제대로 된 필기도구도 없었고 전등불도 없던 시절, 닳고 닳아 희미해진 필사본을 또 다시 손으로 베껴 쓰기가 반복된 것을 감안해 볼 때 더더욱 그렇다.
또한 고대사회의 문맹율은 90% 이상이었고 게다가 신약성서를 포함해 거의 모든 초기 기독교 문서들은 그리스어로 되어 있어 당시의 그리스어를 읽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그래서 고대사회에는 글을 읽어주는 사람들과 글을 써주는 사람들이 구분되어 있었다.
이런 가운데 초대 기독교교회 지도자들은 많은 사본들 중에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삶에 권위를 지닌 기독교 문서들을 선별하려고 노력했으나 이러한 정경화 과정은 길고도 복잡했다. 아직 경전이 없었던 초대 기독교인들은 예배 중에 유대인 성서(히브리어의 구약 성서)와 다양한 복음서들을 낭독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문서들(사본들)도 유대인 성서만큼 권위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주후 2세기 중반에 마르시온은 자신의 주관적인 신학으로 사본들을 모아 정경을 만들어낸 최초의 기독교인이다. 마르시온의 정경은 복음서 한 권과 열 개의 바울서신뿐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이레니우스는 마르시온을 이단으로 몰고 주관적으로 네 복음서를 주장했다.
따라서 2세기 말경에 4개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 들만 인정하는 기독교인들이 생겼다. 이것마저도도 정경이 공식화된 것이 아니었고 이후에도 정경화의 논쟁은 수 세기 동안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4세기 후반에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는 정확하게 27권의 문서들을 신약성서로 주장했지만 이후에도 정경화 논쟁은 수백 년 동안 더 계속되었다.
주후 2~3세기까지 전문 필사자가 없었고, 일반인들이 자발적으로 문서들을 필사했다. 따라서 사본들에 ‘많은 오류’가 있었기 때문에 필사자들은 다른 사본들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다른 것들을 이단이라고 주장했다. 정통이고 이단이고 간에 필사자들은 자신의 신학에 들어맞도록 적지 않게 본문을 변경시켰다.
주후 4세기초에 이르러 기독교에 전문 필사자들이 등장했으며 필사작업은 인쇄술이 발명된 15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에라스무스는 1515년에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편집해 세계최초 인쇄본 성경을 펴냈고 이것이 약 300년 이상 서구 유럽 사회 성서출판사들의 그리스어 신약성서 표준 본문이 되었다.
거의 한 세기 후에 나온 최초의 영문판 성경인 킹 제임스역(1611년)은 에라스무스 그리스어 신약성서의 본문을 대본으로 삼아 번역했는데 에라스무스의 성서는 후대의 열등한 한두 가지 사본만을 가지고 만들어낸 오류투성이의 본문임이 밝혀졌고 그래서 영어번역 성서 중에 킹제임스역만이 정통성서라는 주장은 잘못이다.
기독교교회는 어느 특정한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정경을 결정한 적이 없다. 다만 많은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읽는 사본들을 자연스럽게 정경으로 생각했을 뿐이다. 따라서 성서 근본주의의 축자영감설과 무오설과 문자주의는 모순이다. 성서 근본주의는 성서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 기독교의 원초적인 신학과 신앙이 아니다.

기사 등록일: 201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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