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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과 100년 후 _ 오충근의 기자수첩
 
100년 전에 있었던 일
100년전인 1918년 2월6일 영국 의회에서 30세 이상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국민투표법이 통과되었다. 1928년에는 연령이 21세로 대폭 인하 조정되었다. 지금은 여성 대통령, 여성 수상이 당연하지만 100년전에는 민주주의의 산실이라는 영국에서 여자들은 투표권조차 없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오스트렐리아, 뉴질랜드, 캐나다가 오히려 영국보다 먼저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했다.
영국 여성들이나 식민지 여성들이나 남자들이 “엿다 참정권”해서 받든 게 아니라 피 묻은 손으로 쟁취한 것이다. 가장 늦게 참정권을 쥔 영국 여성들의 투쟁이 가장 심하고 격렬했다. 처음부터 격렬하고 전투적인 것은 아니었다.
여성 참정권을 이끈 상징적 인물 에멀린 팽크허스트(Emmeline Pankhurst)는 1903년 여성사회정치연합 WSPU(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을 조직해 처음에는 합법적 비폭력 평화적 방법으로 참정권을 인정받으려 했다. 그러나 1908년 자유당이 집권한 후에도 여성 참정권이 진전이 없자 폭력투쟁으로 바뀌었다.

노예로 사느니 반역자가 되겠다
폭력투쟁에 대해 팽크허스트는 “우리의 목숨을 바쳐 참정권을 인정받겠으나 남의 목숨을 해치지는 않겠다. 그러나 정부가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지키려는 게 있으니 곧 재산이다. 우리는 재산을 파괴해 목적을 이루겠다.” WSPU 이름으로 전선을 끊어 암흑세계 만들기, 우체국에 폭탄을 던지거나 건물 유리창 깨뜨리기, 건물 폭파, 방화 등 불법 파괴활동이 시작되었다.
팽크허스트의 의지는 단호했다. “노예로 사느니 반역자가 되겠다.” 여성 참정권 운동을 이끈WSPU 멤버를 서프러제트(suffragette)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감옥에 들어가서도 단식투쟁을 했다. 당국에서는 고심 끝에 단식으로 허약해진 멤버를 석방했다 건강을 다시 찾으면 재수감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1913년 6월4일 런던에서 더비 경마대회가 열렸다. 전통에 따라 국왕 조지5세 소유의 말도 참가했다. 결승점을 앞두고 말들이 마지막 코너를 돌 때 어떤 여자가 경마 코스로 달려들어와 “여성에게 참정권을!” 외치며 국왕의 말에 뛰어들었다. 여자도 말도 기수도 쓸어졌다. 병원으로 옮긴 여자는 4일만에 숨을 거두었다. 에밀리 데이비슨은 이렇게 목숨과 여성 참정권을 바꾸었다.
1914년 1차대전이 일어나자 팽크허스트는 멤버들에게 투쟁 중단을 알렸다. 참정권 투쟁은 잠시 접어두고 전쟁을 돕자고 독려했다. 여성 참정권이 인정된 것은 나라에 기여한 여성들의 공로가 전쟁 말기에 인정된 것으로 팽크허스트는 반역자가 아니라 애국자가 된 것이다.
팽크허스트는 자신의 생일이 7월14일이라고 믿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날이다. 출생증명서에는 7월15일로 되어 있지만. 핑크허스트의 노력으로 여성 참정권은 영국을 넘어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는데 혁명의 원조 프랑스는 유럽국가로서는 맨 마지막으로 1944년 여성 참정권을 인정했다. 그러나 여성 권리 주장의 효시는 프랑스 혁명에서 시작되었다.

프랑스 혁명과 올랑프 드 쿠즈(Olympe de Gouges)
프랑스 혁명이 후세에 평가절하 당하고 있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백인 남자들만을 위한 혁명이었지 여성, 제3세계, 유색인종, 노예 문제는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여성들도 혁명에 참여하고 역할을 했으나 열매는 남자들이 다 가져갔다. 올라프 드 쿠즈는 풍자소설 희곡을 쓰는 작가이자 급진적 여성주의자이자 노예해방론자로 프랑스 혁명 때 “여성과 여성시민의 권리선언”을 작성했다.
이 권리선언에서 쿠즈는 이혼하는 여성의 재산권을 포함해 성 평등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여성의 권리를 주장했다. 프랑스 혁명이 평등을 말하면서 여성의 평등에는 무관심해 여성시민의 권리선언은 국민공회를 통과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혁명정부의 공포정치는 오히려 여성권리를 주장하는 클럽을 폐쇄 시켰다. 쿠즈는 혁명이념에 일부 동의해 혁명에 참가했으나 군주제에 호의적이었고 왕비 마리 앙뜨와네트를 공경했다.
쿠즈는 왕과 왕비가 오스트리아로 도주하다 잡혀 온 후에도 왕실에 대한 지지를 바꾸지 않았다. 혁명정부는 쿠즈의 반혁명의 증거를 찾으려고 가택수색을 하자 쿠즈는 스스로 희곡과 소설 원고를 내놓았다. 쿠즈는 사형선고를 받고 단두대에 섰다. 죽음을 앞두고 “내가 단두대에 설 수 있다면 의회 단상에도 설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1차대전과 여성 권리
1차대전은 인류에게 큰 충격을 준 전쟁이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최초의 대량살륙이 벌어진 전쟁으로 “전쟁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을 수도 있구나”라는 비극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역사라는 큰 틀에서 볼 때 전쟁이나 혁명 같은 커다란 혼란 속에서 인류는 더 많은 것을 깨닫고 얻으며 진보한다. 1차대전을 통해 여성의 역할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여성은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손자병법에서 손자는 “전쟁은 국가의 명운을 좌우하고 백성의 생명이 걸린 중차대한 일이므로 결정은 신중해야 하나 시작하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말했듯 1차대전이 시작되자 전쟁 당사국은 이기려고 총력전을 벌였다. 인류 최초의 대량살륙이 벌어진 전쟁에 군인은 무한정으로 필요했다. 남자들은 모두 전선에 투입되어 후방에는 생산을 담당할 남자가 없었다.
전쟁에서 전투 못지않게 중요한 게 생산인데 누가 생산을 하는가? 공업, 농업, 상업을 불문하고 남자들이 떠난 빈자리를 여자들이 메울 수 밖에 없었다. 평화시에 여자들의 경제활동이란 게 귀족이나 부르주아의 하녀 아니면 식품공장 직물공장의 허드레 일이 고작이었으나 선반공, 용접공, 기관차 승무원, 건축설계 등 금녀의 구역에 여자들이 진출했다. 경상도 사투리로 “택도 없는 일”이 전시라서 가능했다.
일차대전 시작 무렵 프랑스 군수공장 여성 노동자는 21만명이었으나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91만명으로 무려 4배 이상 증가했다. 팽크허스트와 서프러제트가 재산 파괴대신 전쟁 수행으로 “여성의 능력을 보여줘 권리를 인정받자”는 생각도 전쟁 중이라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정치계와 언론이 “여성들은 원위치로”를 외쳤으나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났고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고 돌아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100년이 지났는데
성 평등이 법과 제도로 인정되고 학교에서 교육 시켜도 무의식 속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남성우위의 가부장적 인식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미국은 1920년 여성 참정권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가부장 전통에서 시작되는 뿌리깊은 남성우월의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1956년에 나온 영화 ‘자이언트’는 “Just like a sleeping giant sprawling in the sun” 햇빛 속에서 팔을 쭉 뻗고 잠자는 거인처럼 광활한 텍사스를 거인에 비유한 영화지만 흑백갈등은 다룬 영화 ‘흑과 백’보다 먼저 인종차별을 다뤘고 남녀차별을 다뤘다는 점에서 할리우드가 만든 “Giant”급 영화다.
그런데 영화를 통해 진보의 가치를 추구해 공감을 받았던 할리우드의 두 얼굴이 벗겨졌다. 영화제작자이자 영화감독인 하비 와인스타인이 30년동안 영화배우 영화계 종사자들을 상대로 성추행, 성폭행을 해왔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피해자들은 당시 20대 초 중반으로 하비 와인스타인의 우월적 지위와 권력 앞에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행이 불거지자 극작가 제임스 토백을 비롯해 스티븐 시걸, 케빈 스페이시 등등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나오는데 영화계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어느 조직에서나 피해자들이 ‘미투’를 외치며 폭로에 나섰다. 한국 같은 경우는 법과 정의를 실현한다는 검찰도 여자 검사를 상급자가 성추행 하는 등 성 범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데 어찌 한국 검찰 뿐이랴. 남녀가 같이 일하는 전 세계 어떤 조직도 성범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성추행, 성희롱 등 성범죄는 갑을 관계의 을이 피해자가 되는 전형적 권력형 범죄이자 약자를 괴롭히는 비열한 범죄다. 할리우드뿐 아니라 어떤 조직도 가해자의 우월적 힘과 권력 때문에 불리한 대우 받을까 봐 피해자들은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100년 이란 세월이 지나면서 여성들은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자각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100년 전에 끝난 전쟁은 자본주의 탐욕이 제국주의 국가주의 탈을 쓰고 시작한 전쟁이지만 100년 후 여성들이 시작한 미투는 성 평등을 향해 한발 앞으로 나아가는 전쟁이 될 것이다. 미투는 북미나 유럽처럼 여권이 신장되었다고 하는 곳부터 시작해 아프리카, 남미, 중국, 러시아 등 전 세계로 확산되어 여성인권이 한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될 것이다. 수 천 년을 이어온 가부장제의 유습을 깨려면 좀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기사 등록일: 2018-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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