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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평가 받는 의인 안병하의 5.18 _ 오충근의 기자 수첩
 
경찰의 임무는 시민 보호

운명은 보이지 않는 암살자의 총구처럼 찾아와 거역과 회피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는 소리 없이 찾아온 운명을 양 어깨에 힘겹게 짊어지고 현대사의 험한 언덕을 넘었다.
1980년 5월27일 경향신문에 5.18관련 짤막한 기사가 실렸다. “계엄사령부는 27일 전 전남도경국장 안병하 경무관을 광주소요사태에 관련, 지휘권 포기 등의 직무유기혐의로 수사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안 전 도경국장(이하 안병하)은 광주사태와 관련 26일 자로 직위해제, 치안본부 대기발령을 받은 후 조사를 받았었다.”
보안사령부에서 혹독한 심문을 당한 안병하는 6월2일 의원면직 되었다. 그 사이 계엄사 특수요원들이 광주에 파견되어 안병하의 비리를 샅샅이 캐고 다녔으나 개인비리는 발견된 게 없었다. 직무유기도 무혐의 처리되었다.


육사8기 출신 도경국장

안병하(1928년-1988년)는 육사 8기로 5.16 쿠데타 후 1962년 11월 경찰을 자원해 중령에서 총경으로 특채되었다. 88년 사망 당시 경무관이었으나 2017년 11월 치안감으로 추서되었다. 육사8기는 1,200명이 넘은 엄청나게 많은 생도들이 3개월-6개월 이수하고 소위로 임관되어 동기들끼리도 누구 누구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졸업생의 1/3이 6.25때 전사해 가장 많은 전사자를 낸 기수이기도 한데 안병하 치안감도 결혼식 다음날 신혼여행 대신 전선으로 출동해야 했다. 5.16 쿠데타 때 핵심 역할을 담당했던 기수로 김종필, 김형욱, 강창성, 윤필용 등등 정계 관계 군에 많이 포진되어 한국 현대사에 한 장을 장식하고 있다. 쿠데타 당시 소령이었던 그는 동기생들이 쿠데타에 참여 권유에 “군인의 길을 가겠다.”고 거부했다.
안병하는 79년 2월20일 전남도경국장으로 발령 받아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길로 접어들어 10월26일 박정희 사망, 12월12일 전두환의 군사반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등 소용돌이 치는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었다. 참고로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군 지휘계통에 있었던 이희성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진종채 2군 사령관, 윤흥정 전투교육 사령관이 안병하의 육사8기 동기생이다.


5월의 일주일

1980년 봄부터 신군부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광주를 중심으로 전라남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안병하는 시위진압경찰 병력에게 “공격진압 아닌 방어진압” “진압 시 안전수칙 엄수” “도주하는 시위대 추격 금지” “교내 진입 금지” “가혹 행위 금지” 등을 지시했다.
5월16일 광주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횃불시위가 있었다. 이날 전국에서 유일하게 광주에서만 시위가 있었는데 경찰은 사고를 우려해 시위가 안전하게 끝나도록 유도했다. 학생들과 시민들도 협조해 시위는 평화적으로 아무런 사고 없이 끝났다. 안병하는 “야간 횃불 시위는 평화적으로 끝나 치안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즉 5월17일 자정을 기해 내려진 비상계엄 확대로 광주시 일원에 출동한 공수부대는 치안과는 무관하다고 안병하는 지적했다. 진단이었다.
그러나 악마들은 치안을 빌미로 동족을 살해하고 정권을 전복하는 잔인하고 무서운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공수부대들은 5월17일 비상계엄 확대 이전에 부대를 광주로 이동 시키고 있었다. 가장 먼저 광주에 진주한 부대는 7공수여단으로 새벽 2시경 조선대에 진입, 교내에 있던 43명의 학생들을 체포해 연행했다.
7공수 여단장 신우식 준장은 12.12 당시 특전사 작전참모로 반란군 편에서 정병주 사령관 체포에 앞장 선 인물이다. 7공수를 비롯해 11공수 3공수가 속속 광주로 진입했다.
3개 공수여단 5개 대대가 광주에 진입하는 동안 서울에서는 김대중 체포작전이 진행되었다. 김대중뿐 아니라 재야인사들, 김종필 등 부정축재자도 체포되었는데 김대중이 ‘내란음모’ 혐의로 체포된 사실을 광주에서 알게 된 시점은 18일 늦게 혹은 19일 오전이었다. 그날은 일요일로 나는 야구중계를 보다 속보로 자막이 뜨는 걸 보고 신군부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신군부는 단칼에 잠재적 정적들을 정리했다.
계엄사령부는 전남대 시위 진압을 위해 공수부대를 투입 시켰다고 하는데 그날 시위대 약 200명 진압에 공수 부대 5개 대대가 동원되어 광주의 참상이 시작되었다.
안병하는 “경찰과 시민, 학생은 결코 적대적인 관계에 있지 않았다. 상호협조적이면서 치안이 확보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공수부대 병력이 광주 일원에 투입됨으로써 도리어 치안이 파괴되고 사태를 급전직하로 악화시키고 말았다.
공수부대가 투입되지 않았다면 광주의 비극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태 과정 중 경찰은 시민들을 보호하고 치료하는 입장에 있었으므로 시민세력과는 우호적이었던 반면 공수진압 부대와는 불편한 관계였다. 경찰 간부가 시민들 앞에서 공수부대 장교에게 구타 당했을 정도였다.”고 당시 상황을 술회했다.
5월20일 시위진압에 미온적이라고 나주경찰서장이 시민들 앞에서 공수부대원들에게 질질 끌려 다니고 전남도경 과장이 공수부대 과격진압에 항의하다 집단폭행 당해 머리가 터져 피를 쏟았으니 시민들과 학생들 상대의 폭력이 얼마나 심했는지 상상할 수 있다.
5월21일 공수부대가 도청에서 철수했다. 고립무원의 경찰은 보급품도 끊어져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진압용 가스탄 마저 떨어졌다. 안병하는 육사 동기인 계엄분소장 윤흥정 중장에게 “역부족으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을 설명”하며 철수를 요청했다. 김종환 내무장관도 “알아서 처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5월23일 안병하는 휘하 경찰에 작전지시를 내려 정해진 지역으로 퇴각시켰다. 1차집결지는 무등산 밑, 2차집결지는 상무대 비행장이었는데 적절한 행동지침까지도 함께 시달했다.
5월25일 최규하 당시 대통령이 광주 상무대를 방문했다. 그 자리에서 이희성 계엄사령관, 그는 바지사령관에 불과했지만, 은 안병하에게 경찰이 무장하고 도청을 접수하라고 윽박질렀다. 시민을 상대로 발포를 해서라도 진압하라는 요구였다. 안병하는 “경찰은 시민군에 형제, 가족도 있을 테고 이웃도 있는데 경찰이 무기를 사용하면서까지 할 수 없다”고 발포명령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러자 이희성은 “저런 사람이 전남 치안을 맡고 있는 경찰인가”라며 면박을 줬는데 안병하는 대통령 앞에서까지 경찰의 무기 사용을 극구 반대했다.
무기 사용반대와 시위대 보호는 부하경찰에게도 불만사항이었다. 5월19일 오후 광산동 노동청 앞에서 시위대버스의 돌진으로 함평경찰서 직원 4명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 이후 상당수 경찰들이 안병하의 지휘방침에 큰 불만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 생각해 볼 때 안병하의 판단이 옳았다고 당시 시위진압에 나섰던 경찰들은 입을 모았다.


잊혀진 인물 안병하

안병하는 경찰항공대 임시 막사에서 보안사 요원들에게 연행되어 동빙고에서 심문 받았다. 8일동안 고문으로 그는 심신이 황폐되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의원면직 되어 경찰을 떠나야 했다. 집에 돌아온 그는 고문 후유증과 정신적 육체적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병객이 되었다. 고혈압, 당뇨, 신부전증으로 고생하던 안병하는 88년 세상을 떠났다.
8년동안 투병생활 하느라 가정은 풍비박산 났다. 보안사에서 탈탈 털어도 먼지 하나 안 나오는 청렴한 삶을 살아온 안병하에게 무슨 돈이 있어 8년간 투병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가족들의 고초는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경제적 고초보다 무관심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 경찰도, 광주도, 국가기관도 안병하를 외면했다.
신군부의 무력진압을 거부하고 소신을 지키다 죽은 안병하는 23년이 지난 2003년에서야 광주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순직으로 인정된 것은 강제로 2005년이었다. 공원묘지에 묻혔던 안병하의 시신은 그때서야 국립현충원으로 이장 되었다.
안병하의 유족들은 “광주시는 5.18 행사에 한번도 유족을 초청하지 않았다. 투병생활 할 때 한번도 찾아온 적이 없다. 현충원으로 이장 할 때도 광주 시청이 유일하게 이장 행사에 불참했다.”고 섭섭함을 토로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병하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할 때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흘러

광주민주화 운동 38주년이다. 38년이 흐르는 동안 새로운 자료들이 많이 공개되었는데 최근 미국에서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발포 책임자는 전두환이다. 최근 알려진 또 다른 자료에 따르면 북한군이 시민군에 섞여 선동한다는 낭설을 퍼뜨린 곳도 전두환의 보안사로 알려졌다.
그러나 전두환은 2016년 4월 신동아와 인터뷰에서 “나는 광주와 무관한 사람”이라고 책임 회피하고 북한군 600명 개입설에 대해 “처음 듣는 말”이라고 시치미를 뗐다.
5.18 발포 책임자로 드러난 전두환은 재판 받고 다시 형무소에 가야 한다. 민간인 학살 등 인륜에 관한 범죄는 공소시효가 없는 게 국제관례로 2차대전이 끝난 지 73년이 지났지만 나치전범에 대한 재판은 계속되고 있다. 95세의 나치 전범 오스카어 그뢰니에게 징역 4년이 선고 되었는데 87세의 전두환은 그 보다 젊고 건강해 충분히 수형생활 할 수 있다.


기사 등록일: 201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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