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안내   종이신문보기   업소록   로그인 | 회원가입 | 아이디/비밀번호찾기
현대사 물꼬를 바꾼 부시 대통령(41대) 서거 _ 오충근의 기자수첩
 
일본군 술 안주 될 뻔한 미국 대통령

유럽이나 유럽의 문화 전통을 물려받은 미국 캐나다에서는 전쟁이나 국난의 시기에 ‘있는 집 자녀’들이 앞장서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번 11월30일 세상을 떠난 부시 대통령(41대)은 1924년생으로 2차대전 때 참전했다. 1943년 6월 해군장교로 임관한 청년 부시는 폭격기 조종사로 태평양 방면 전투에 종군했다. 부시 중위는 폭격기 애칭을 바바라라고 불렀다. 고향에 두고 온 약혼녀 이름으로 나중에 결혼해 백년해로 했는데 바바라 여사는 올해 4월 세상을 떠났다.
1944년9월2일 제51 뇌격대는 오가사와라 제도 폭격 임무를 부여받았다. 부시 중위는 폭격기 바바라를 몰고 작전에 나섰는데 일본군 대공포에 맞아 격추되었다. 부시 중위는 낙하산으로 탈출했다. 부시 중위를 생포하려 일본 함정이 출동했으나 미군기의 도움으로 생포를 면하고 구명정에 의지해 바다를 떠돌다 미군 잠수함에 구출되었다.
이날 격추된 폭격기 조종사 중에 부시 중위만 생환했고 지미 다이, 글렌 프로이저, 플로이드 홀, 마브 모숀, 워런 얼 본, 딕 울러프, 그레이디 요크, 신원미상 1명의 비행사는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일본군 포로가 된 미군들은 1945년 2월23일에서 2월25일 사이에 고문당해 죽었고 일본군은 이들의 시신을 해부해 내장과 허벅지 살을 술 안주로 이용했다.
전쟁이란 게 일상생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처절한 극한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본능만 번득이며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짓을 할 때가 많다. 널브러져 있는 시체더미 곁에서 먹고 잔다든가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얼어붙은 시체를 베어 녹여서 먹기도 하지만 멀쩡하게 살아 있는 포로를 죽여 인육을 술 안주로 한 사실은 일본군에게만 있는 명예로운 기록이다. 구석기시대 야만인들 전쟁도 아니고 문명화 되었다는 현대전에서 이런 일이 생기다니.
치치시마(父島)에서 부시 중위 동료들을 살해하고 인육을 술 안주로 삼았던 다치바나 사단장, 모리 해군 중장 등 인육 파티를 주도한 전범 25명은 패전 후 포로가 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다치바나 중장, 마토바 소령, 이토 중령, 요시이 대령, 나카지마 대위에겐 사형이 선고됐고, 모리 중장과 가토 대령, 야마시타 대위, 도키 대위, 사토 대위는 종신형이 선고되었다.
인육 파티 사건은 미국 신문에서도 대서특필했으나 어느 날 사라졌다. 희생자 가족들이 “조국을 위한 명예로운 전사가 이런 처참한 죽음이란 사실이 너무 괴롭다.”고 호소했기 때문이다.
독일과 일본은 같은 전범 국가인데 독일이 처절한 반성을 거쳐 국제사회 일원으로 의무를 다 하고 있으나 일본은 반성 없이 전범행위에 대한 변명과 궤변으로 일관하고 있다. 일본을 문명국가라고 말하고 있으나 일본인들의 유전자 속에 숨어 있는 변태적 잔혹성 야만성이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그 시대로 다시 돌아가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다.


몰타 회담, 사이비 진보의 가면을 벗기다

부시라는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닉슨 대통령의 핑퐁외교로 죽의 장막이 걷히고 중공과의 국교 정상화가 시작되면서부터였다. 1971년 나고야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한 미국선수단 일행이 중공을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72년 닉슨 대통령이 중공을 방문해 국교 정상화의 첫발을 내디뎠다.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부시는 북경 연락 사무소 소장으로 초창기 미국-중공 외교관계의 초석을 놓았다.
중앙정보국(CIA)국장을 거쳐 레이건 대통령 때 부통령을 지낸 부시는 41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1989년-1993년 재임했다. 대통령 재임 중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와 몰타에서 정상회담을 가져 2차대전이후 계속된 냉전을 걷어내는 성과를 올렸다.
2차대전후 세계는 자본주의 공산주의 양극체제로 갈라져 대결을 벌렸다. ‘총성 없는 전쟁’을 냉전(cold war)이라고 하는데 미, 소는 경쟁적으로 핵무기 개발에 힘을 쏟았다. 그런데 해 아래 세상 만물은 변하게 되어 있다. 양극체제로 갈라져 있던 세계에 비동맹이라는 제3세계가 등장해 양극체제에 균열이 생겼다. 상대를 한방에 제압하는 핵무기도 미, 소의 전유물이 아니라 영국, 프랑스, 중공도 갖게 되어 희소가치가 떨어졌다.
1960년대부터 전세계적으로 불어온 변혁, 사랑, 평화, 화해 등의 무형의 가치도 냉전을 걷어내는 밑거름이 되었다. 닉슨 독트린, 베트남 전 종식, 미-중 수교 등70년대 미국이 변화되는 모습을 보이자 소련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소련이 군비경쟁을 중지한 이유는 파탄에 이른 재정문제가 큰 이유지만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미국을 적으로 생각하기 보다 지구촌 경제와 안보를 같이 책임지는 협력자로 여기는 외교적 변화가 동력이 되었다.
여러 가지 요인이 겹쳐 몰타회담을 이끌었다. 회담 결과 미, 소 장거리 미사일 점진적 폐기, 공산권 군사협력기구인 바르샤바 조약기구 해체, 더 나아가 소비에트 연방해체로 이어졌다. 소비에트 연방해체로 공산주의 판정패가 확정되었고 이는 한국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쳐 그 동안 독재정부에 기생해 오던 사이비 진보 쭉정이 사회주의 인사들의 가면이 벗겨지고 맨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김지하, 서경석, 김문수, 이재오를 비롯해 하태경, 김영환 등 주사파들이 그런 부류의 인간들로 뉴 라이트라는 이름으로 한국사회에 온갖 악취 나는 오물을 뿌리며 돌아다니고 있다.


걸프전쟁의 주역 부시 대통령

1990년 8월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무력 점령했다. 이라크는 비옥한 반달지대에 위치한 4대문명 발상지에 하나로 쿠웨이트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해 오다 무력 점령해 국제사회의 비난을 샀다. 이라크는 이란과의 전쟁에 막대한 전비를 소모해 경제가 말이 아니었는데 쿠웨이트의 석유자원이 탐이 나 무력 점령한 것이다.
이라크와 이란은 원래 숙적관계이나 이라크를 꼬드겨 이란과 전쟁에 끌어들인 나라는 미국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담 후세인과 미국은 밀월관계를 유지했다. 에너지 확보를 국가안보차원에서 관리하는 미국은 중동 정세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데 지금처럼 원유를 하루에 1,200만 배럴씩 생산한다면 문제가 달라졌을 것이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무력 점령은 미국이나 서구 세계의 분노를 샀지만 이라크의 쿠웨이트 영유권 주장은 무리로서 아랍국가들 사이에서도 사담 후세인에게 “임자가 그건 무리수 두는 거야.”라는 책망을 들었다. 이라크와 쿠웨이트는 역사적, 문화적, 혈통적 동질성이 없다.
바그다드 아바스 왕조가 쿠웨이트를 지배한 적이 있지만 정착민도 없는 쓸모 없는 사막지대, 한적한 어촌 마을 몇 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쿠웨이트는 갈대아 인들의 관심 밖의 버려진 땅이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면 몽골도 중동에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중동 정세 안정이 에너지 확보차원에서 중요하므로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묵과할 수 없었다. 쿠웨이트가 면적은 작지만 전세계 원유 매장량의 10%를 차지하고 있는 에너지 요충지다.
이라크가 쿠웨이트 점령하는데 이틀이면 충분했다. 쿠웨이트 왕가는 사우디 아라비아로 망명했다. 아랍국가와 서구세계는 1월15일까지 이라크에 쿠웨이트 철군을 요구했으나 사담 후세인이 물러서지 않자 1월17일 미국 주도의 걸프전쟁이 시작되었다.
다국적군에는 중동에서 외세를 배격하고 아랍의 이익을 공동으로 지키자는 아랍연맹 국가들도 참가했고 덴마크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 심지어 세네갈이나 방글라데시도 참전해 이라크를 국제적 왕따로 만들었다.
걸프전쟁은 그 당시에 개발된 온갖 첨단무기가 총동원된 첨단무기 시험장으로 전쟁은 42일만에 끝났다. 전쟁 결과 이라크는 유엔으로부터 경제 제재와 봉쇄를 당하게 되었고 1,500억 달러의 거액의 배상금을 물어주게 되었다.
군사전문가들은 이 전쟁이 베트남 전쟁처럼 장기전이 될 것을 예상했으나 현대화된 최첨단 무기로 간단하게 끝냈다. 걸프전을 바라보는 러시아와 중국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군사력 세계4위의 이라크 무기 대부분이 러시아 중국 제품인데 첨단무기 앞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앞에서 확인했다. “현대화 첨단화로 양 보다 질을” 추구해야 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중국 러시아는 무기 현대화, 첨단화를 국방 목표로 삼았다.
부시 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하고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공화당원, 민주당원으로 정파는 달랐으나 백악관을 떠나던 날 부시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당신의 성공이 미국의 성공”이라는 편지를 남겼다. 당파적 이익 보다 나라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앞선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걸프전쟁으로 인해 전쟁광이라는 이미지가 덧칠해져 있지만 냉전을 끝내고 화해와 평화로 이끈 공로도 있다. 만약 저 세상이라는 게 있어 사담 후세인을 다시 만난다면 화해의 악수를 나누기를.

기사 등록일: 2018-12-08
나도 한마디
 
최근 인기기사
  캐나다 소득세법 개정… 고소득자..
  앨버타 집값 내년까지 15% 급..
  첫 주택 구입자의 모기지 상환 ..
  로블로 불매운동 전국적으로 확산..
  에드먼튼 건설현장 총격 2명 사..
  해외근로자 취업허가 중간 임금 ..
  개기일식 현장 모습.. 2024.. +2
  앨버타 신규 이주자 급증에 실업..
  연방치과보험, 치료할 의사 없어..
  앨버타 주민, 부채에 둔감해진다..
댓글 달린 뉴스
  2026년 캐나다 집값 사상 최.. +1
  개기일식 현장 모습.. 2024.. +2
  <기자수첩> 캐나다인에게 물었다.. +1
  캐나다 무역흑자폭 한달새 두 배.. +1
  캐나다 동부 여행-네 번째 일지.. +1
  중편 소설 <크리스마스에는 축복.. +1
회사소개 | 광고 문의 | 독자투고/제보 | 서비스약관 | 고객센터 | 공지사항 | 연락처 | 회원탈퇴
ⓒ 2015 CNDrea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