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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독립운동가들 _ 오충근의 기자수첩
기미독립 운동100주년을 맞아
 
20세기 초는 정글의 법칙이 통용되던 약육강식의 시대로 국력이 약한 나라는 강한 나라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어느 나라나 빼앗긴 나라 찾자고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했지만 우리 조상들은 더욱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침략국과 피침략국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두 나라의 수준차이가 적을수록 저항이 거세진다고 하는데 우리와 일본이 바로 그런 경우다. 명치유신 전만 해도 조선의 생활수준 문화수준이 일본을 능가했으므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사실에 조선 민중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런 충격은 조선 중기에도 있었다. 조선은 여진족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는데 여진족이 청나라를 건국한 후 오히려 조공을 바치는 입장이 되었다. 조선 중기에 임경업전이나 박씨전 등 조선의 정체성,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민간소설이 유행한 배경에는 여진족에게 조공을 바치게 된 조선 민중의 충격, 낙담, 좌절이 나타나 있다.
경술국치 이전 일본에 대한 저항은 의병운동 등 무장투쟁에서 시작되었다. 군수 조병갑의 탐학이 직접 원인이 된 농민혁명은 부패척결, 내정개혁 등 국내문제 해결이 주요 이슈가 되었으나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일본과 서양의 외세를 배격해 의를 세운다는 외세배격도 이슈였다.
정치권에서는 친미, 친노, 친일, 친청으로 갈라져 외세를 등에 업고 권력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으나 민중들이 외세를 배격하자고 주장해 오히려 정치권보다 뛰어난 정세적 안목을 보여주었다. 동학농민혁명은 후에 일어나는 의병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의병은 외세 침략에 대해 민중이 자발적으로 조직해 저항하는 민병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이 크게 활약했고 조선 말에는 동학농민혁명 이후 명성왕후 시해로 일어난 을미 의병, 을사늑약으로 일어난 을사의병,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일어난 정미의병 등이 있다.
무장투쟁은 일본에 비해 무기, 조직력 약세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진압 되었으나 후에 독립군, 광복군 창설의 모태가 되었다. 왕조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던 유생, 선비들, 군대 해산 후 군인 출신들이 의병을 조직해 무장투쟁에 나섰다. 평소에 글 읽고 공부하던 선비들이 군사에 대한 지식도 없고 총이나 칼을 다룰 줄도 모르면서 국권회복의 의지 하나로 나섰다.


안중근의사가 존경한 의병장 허위

명성왕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되었다. 이 사건을 을미왜변이라고 한다. 명성왕후가 한 짓을 보면 마리 앙뜨와네트, 박근혜와 똑 같아 당시 민중들은 명성왕후를 미워했어도 일본인들에게 왕후가 시해 당하자 의병을 일으켜 일본에 대항했다. 글 읽고 아이들 가르치던 선비 허위도 왕후가 시해 당하자 의병을 일으켜 일본에 저항했다.
고종은 허위를 발탁해 관리로 등용했다. 그는 의정부 참찬, 비서원 승(고종 비서실장)을 지냈다. 선비로서 관직에 나아갔으니 집안에 경사가 났지만 1907년 고종이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허위는 다시 의병을 일으켜 일본에 저항했다.
1907년부터 나라를 빼앗긴 1910년까지 의병 투쟁이 가장 활발해 일본군은 대토벌 작전으로 의병 투쟁을 진압했다.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일본의 야욕이 노골화되자 오직 의기 하나로 의병을 조직해 일본군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벌였다. 허위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는 일이 뜻을 꼭 이루고자 하는 게 아니라 차마 왜적들과 함께 살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국권회복을 위해 일신의 영달을 버리고 의병투쟁에 나섰으나 일본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조정에서는 비적 취급을 했다. 총리대신 이완용은 어전회의에서 “전 참판 허위가 자진하여 비적의 수괴가 되어 우매한 백성을 선동하여 노략질을 일 삼으므로 염탐하여 잡아다 처결함이 옳다.”고 주장했다.
의병을 모아 서울로 진군하려면 허위의 계획은 일본군의 압도적 화력과 군사력 앞에 실패로 끝났다. 허위는 일본군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서대문 형무소 사형수 1호로 처형되었다. 유언을 묻자 “뜻을 이루자 못한 자가 유언을 남겨 무얼 하겠는가”라고 거부하고 시신을 거둘 자가 있냐고 묻자 “시신이 감옥에서 썩건 말건 상관 없다. 어서 죽이라.”고 대답했다.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저격 처단한 안중근의사는 “고관들이란 대개 자기 일신만 돌보는데 허위는 달랐다. 그는 최고의 충신이다.”라고 존경하는 마음을 보냈거니와 안중근 자신도 무장투쟁의 의지를 본받아 동양 평화를 위해 이등박문을 처단하는 쾌거를 이뤘다.


독립운동, 그 종착역이 불법체류자던가

허위는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둘째 형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남은 3형제와 그 후손들은 모두 조국독립을 위해 몸을 마음을 불살랐다. 큰형 허훈은 전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댔고 허겸과 허위는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허위가 죽고 일가친척들은 재산을 정리해 만주로 망명했다.
허위와 형제들의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특히 연해주로 이주한 후손들은 혹독한 고생을 했다. 스탈린의 독수에 걸려 가축 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중국에 살다 조국으로 돌아와 오랫동안 불법체류자로 산 후손도 있다. 독립운동가 후손이 해방된 조국에서 불법체류자로 살아야 하는 게 현실이다.
이제는 불법체류자 신세를 면했다. 그 후손은 “독립 운동한 사람을 조국이 챙겨주지 못한 것도 그 동안 조국도 먹고 살기 바빠 못 했으리라 생각한다. 조국을 원망하지 않는다. 우리가 없는 동안 나라를 발전 시켜줘서 오히려 고맙다.”고 전했다. 독립운동가 후손다운 말이다.
일제에 대한 무장투쟁을 테러로 간주하는 부류들이 있다. 친일단체 뉴 라이트, 반공으로 가장한 가짜 보수, 허파에 바람만 잔뜩 들어간 진보주의자들이다. 테러는 목적 달성을 위해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살상을 저지르지만 일제에 대한 무장투쟁은 조선 침략과 수탈에 책임이 있는 개인과 기관 즉 일본 왕, 내각, 일본군과 경찰, 행정관료조직, 동양척식회사가 대상이었다.


100년이 된 기미독립운동

기미독립운동은 비폭력 독립운동이었다. 그러나 독립을 하고자 하는 의지는 폭력 비폭력의 수단의 문제가 아니라 독립의 대한 열망과 그에 따르는 행동이 따라야 한다. 의병 투쟁으로 시작된 선열들의 국권회복운동이 기미독립운동이라는 거족적 운동으로 발현된 것이다.
또 하나는 민족자결원칙이다. 각 민족이 타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의지에 따라 장래를 결정한다는 원칙이다. 1차대전 종결을 앞두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이 원칙으로 많은 식민지들이 독립을 하는데 패전국 식민지에만 해당되는 원칙으로 연합국의 기득권을 확인 시켜준 일종의 사기다.
러시아 혁명 후 레닌도 공산주의 이행의 선행조건으로 민족자결원칙을 발표해 식민지국가에 대해 지원을 했다. 독립운동가들 중에 소련의 지원을 받은 경우도 많고 식민지 시대 청년들이 사회주의를 동경하게 된 계기도 된다.
당시 윤치호는 “만세나 부른다고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순진한 발상”이라고 비난하며 참가를 거부했다. 최악의 친일파 이완용은 기미독립운동에 대해 식민통치에 순응하면 살길이 생기는데 조선독립이라는 허언에 속아 망동을 부린다고 친일파 수괴다운 발언을 쏟아냈다.
독립만세 부른다고 선뜻 독립시켜주는 제국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거족적 만세운동은 AP통신의 앨버트 테일러 기자에 의해 “정의와 인류애의 이름으로 독립을 선포한다”는 제목으로 우리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일제의 폭력진압이 전 세계로 알려져 일본의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심어주는 동기가 되었다.
파리 강화회의에 민족 대표로 참석한 김규식 박사도 파리로 떠나기에 앞서 신한청년단 동지들에게 “서구인들이 내가 누군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 국내에서 누군가 독립선언을 해라. 일제의 학정을 알려지면 내가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는지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미독립운동은 민중들이 독립을 자각할 수 있는 동기가 되었다. 독립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아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임시정부 수립도 그 일환으로 임시정부가 독립운동 방향을 놓고 파벌싸움을 벌이기도 했지만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독립투쟁 예우 받는 사회

기미독립운동은 아직까지 통일된 명칭이 없다. 3.1운동, 3.1만세운동, 기미독립운동, 3.1혁명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는데 권위 있는 기관에서 한가지 명칭으로 통일할 필요가 있다. 전국적으로 일어난 투쟁인데 운동이라고 부르는 건 독립의지를 축소, 폄하하는 의미가 있으므로 3.1혁명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기미독립운동 1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를 맞아 소망하기는 남북이 갈등과 대결을 청산하고 화해의 악수를 나누고 북미회담이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해 한반도에 평화가 오고 반공으로 가장한 가짜 보수들의 친일의 추악한 얼굴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고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불법체류자가 아니라 우대받고 존경 받는 사회가 되기 바란다. 문재인 대통령 말대로 “친일청산, 독립운동 예우가 민족정기 바로 세우는 일”이다.

기사 등록일: 2019-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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