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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과 21세기 이완용 ‘토착 왜구’_ 오충근의 기자수첩
 
4월11일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독립지사들은 나라 망한지 9년만에 망명정부를 세웠다. 3월17일 러시아 연해주에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4월11일에는 상해 임시정부가 4월23일에는 서울에 한성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3개의 임시정부는 9월11일 상해에서 통합 임시정부를 구성해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상해임시정부는 모든 독립운동의 합집합이었다. 민족주의자, 복벽주의자,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무력투쟁, 외교투쟁 등 제 각각의 사상과 생각을 가진, 그러나 일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자는 한가지 목적에는 일치한 독립지사들이 모였다.
혈혈단신으로 임시정부에 참여한 지사들도 있었고 전 재산을 처분해 가솔을 이끌고 참여한 지사들도 있었다. 생각이 다르고 사상이 달랐지만 중국인들에게 망국노(亡國奴 중국인들이 한국인을 비하하여 부르는 말)라는 멸시를 받으면서도 조국독립이라는 시대정신을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실천했다. 우리는 모두 망국노의 후손들이고 망국노들의 피와 눈물 위에서 대한민국이 세워졌다.
매국노 이완용의 경고문
3.1운동이 일어나고 임시정부가 세워지자 이완용은 매일신보에 경고문을 실었다. 매일신보는 총독부가 만든 관제 기관지로 총독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신문이었다. 이완용은 3차에 걸친 경고문에서 “조선 독립이 허언이고 망동인데 일반 대중이 이를 자각하지 못한다.”고 한탄하며 “처음에는 몰지각한 아이들이 망동을 부리더니 각 지방에서 뜬소문을 듣고 들고 일어나 치안을 방해하고 있다.”고 책망하고 있다.
이완용은 “일한합방은 상천(上天 하느님) 의 뜻으로 두 땅(조선과 일본)이 나뉘는 것을 불허하시고 일본의 통치로 조선과 일본이 함께 잘 사는 것을 원하실 것”이라고 하느님을 끌어다 댔다. 그리고 “지난 10년간 조선의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고 주장해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이영훈 교수의 참고서 역할을 했다.
식민지 근대화론이 사실이라면 이는 착한 제국주의 표본으로 인류 역사에 길이 보존해야 할 희귀한 경우다. 이완용 말대로 식민지 10년 동안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먹고 살만해졌다면 인구의 1/10이 목숨 걸고 만세운동에 참가해 모진 고문 받으며 옥에 갇히고 중국에서 만주벌판에서 러시아에서 멸시 받고 망국노 소리 들어가며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 했겠는가?
이완용은 억울할까?
지하에 있는 이완용은 혼자 매국노 누명을 쓴 게 억울하다고 할 수 있다. 국력을 갉아 먹어 나라를 쇠약하게 만든데는 고종, 민비, 대원군 등 당시 권력층도 큰 역할을 했으니까. 민비를 일러 명성황후라고 부르는데 일본인 손에 살해 당한 사실이 유쾌하지는 않지만 유길준 말대로 민비는 앙뜨와네트와 같은 여자이고 현대판 박근혜다.
조선말에는 이완용 말고도 매국노들이 조정에 우글거렸다. 대한매일신보는 “세계 각국에서 매국노 수입하려거든 조선으로 오시오. 왕족, 고관대작 가운데 매국노 아닌 사람이 없소.”라고 세태를 비꼬았다.
이완용은 기회주의자다. 독립파, 친미파, 친러파, 친일파를 골고루 전전하다 일본의 점지를 받아 일본 이익을 위해 일했다. 그 당시에는 이건창 등 몇몇 보수인사를 제외하고는 대다수 고관들이 친청, 친미, 친러, 친일 등 외세를 빌려 개혁을 하거나 정치세력을 확장하려 했으니 이완용 혼자 기회주의자라고 할 수는 없지만.
대개 나라가 망할 때는 국력이 쇠잔해지며 전쟁에 져서 망하는데 조선은 조약에 의해 망했다. 조선을 망하게 한 3가지 조약, 을사 늑약, 정미 칠조약, 경술년 한일 병탄조약. 세가지 조약에 모두 이름을 올린 고관대작은 이완용이 유일하다. 경술 한일 병탄조약은 이완용이 총리대신 자격으로 서명했다.
우리는 고등학교 때 한일합방이라고 배웠는데 합방은 동등한 자격에서 합해지는 것을 말한다. 앞으로 남, 북한이 평화적으로 통일할 때는 동등한 자격으로 통일을 할 테니 ‘남북합방’ 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조선과 일본이 동등한 자격으로 합했는가? 합방이란 단어는 이 경우에 매우 부당한 언어다.
이완용을 명분보다 실리를 택한 실용주의자의 표본이라고 높게 평가 하기도 하는데 일본과 동등한 조건에서 조약을 맺는다는 게 불가능한, 나라 망하게 하는 조약인 걸 알면서도 세가지 조약에 골고루 서명 했다는 사실은 그가 일본 침략에 동조한 것으로 후세에 매국노의 대명사가 된 사실을 이 위대한 실용주의자는 지하에서 조금도 억울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친일청산은 아직 멀었다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되었고 해방된 지 74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이 땅에는 수 많은 이완용이 있다.
고국의 문화체육부가 한국 갤럽에 의뢰해 조사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전 국민의 80%는 친일 잔재가 청산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30.8%가 전혀 청산되지 않았다, 49.3%가 별로 청산되지 않았다고 응답했다. 15.5%는 청산되었다고 응답했다.
청산되지 않은 이유에는 절반이 정치인, 고위공무원, 재벌에 친일파 후손들이 많아서라고 응답했다.
이 여론조사가 끝나고 얼마 후에 자유한국당 나경원의원이 “해방 후 반민특위로 국론분열이 일어났다.”고 발언해 여론조사 결과가 옳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었다.
반민특위는 일제시대 일본제국에 적극적으로 협력해 악질적으로 반민족행위를 저지른 자들을 조사하는 목적으로 제헌국회에서 설치한 특별위원회인데 설치 1년만에 해체되었다. 대통령 이승만을 비롯해 친일파들이 조직적으로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하고 와해 공작을 폈다.
강대국 논리에 의해 국토가 반 토막 났다. 오스트리아처럼 정치인들이 국토가 조각나는 것을 막지는 못할망정 반 토막으로 갈라진 현실을 이용했다. 적반하장이라고 친일파들은 오히려 민족주의자들을 암살하던가 테러를 가하던가 아니면 빨갱이 공산주의자로 몰아 청산했다.
이승만과 친일파들은 반공이라는 방패를 이용해 남한의 정치, 경제, 문화, 행정, 군사 등 사회전반에 걸쳐 주류세력이 되어 오늘까지 이어져 내려와 마침내 “반민특위가 국론분열 일으켰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21세기 이완용, ‘토착왜구’
조선이 망하기 두 달 전, 1910년 6월22일 대한매일신보 시사단평에 토왜천지(土倭天地)라는 기사를 실었다. 일본에 항거해 자결한 이태현 선생도 정암사고에서 ‘토왜’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토왜란 자생적 친일부역자를 말한다. 토왜에 관해 대한매일신보 시사단평의 한 구절을 소개하면 “얼굴은 한인이나 창자는 일인” 즉 겉은 한국인이나 속은 일본인을 말한다.
토왜를 요즘에는 토착왜구라고 하는데 예를 들면 자유한국당과 나경원이 전형적 토착왜구다. 독립운동가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을수록 친일매국노들은 설 자리를 잃는다. 그래서 독립운동가 활동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폄하한다.
공산주의자라고 약산 김원봉 선생의 서훈을 반대하는 토착왜구들은 약산이 왜 월북할 수 밖에 없었는지 모르는가?
약산은 민족주의 좌파계열 독립운동가로 무력항쟁을 주도한 의열단 단장이다. 일제는 약산 체포에 현상금 100만원을 걸었다. 백범 김구선생 현상금이 60만원이었다. 해방 후 우파, 좌파 모두 약산을 경원했다. 친일파들은 약산을 모욕했다.
수도청장(서울시 경찰청장) 장택상의 지시로 친일경찰 노덕술이 약산을 체포했다. 약산은 화장실에서 혁대로 매지 못한 채 노덕술에게 체포 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장택상은 바지도 제대로 못 입은 채 수갑 차고 끌려오는 약산을 보고 “누가 이렇게 모시라고 했나?”라고 노덕술을 나무랐다. 그러나 그건 장택상의 연극이었다.
장택상 아버지 장승원은 조선 말기 관찰사를 지낸 인물로 영남의 거부였다. 대한광복회 회원들이 장승원을 찾아가 독립운동 자금을 요청했으나 장승원을 자금을 주는 대신 밀고했다. 박상진을 비롯해 광복회 회원들은 장승원을 찾아가 처단했다. 장택상 자신도 독립운동을 하기는 했으나 마음 속 깊이 부친을 처단한 무장독립운동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군정 당시 장택상과 더불어 치안을 책임진 경무부장을 지낸 조병옥은 친일경찰들의 죄과를 묻지 않고 등용해 토착왜구를 양산했다.
친일파들이 날뛰고 암살, 테러의 위협 속에서 약산은 남한에 대한 정이 떨어졌다. 그러나 김일성 일파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약산은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남북협상으로 북에 올라갔다 내려오지 않았다. 약산은 북한에서 장관을 지내다 숙청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친일파 등쌀에 견디지 못하고 월북한 약산은 북한에서도 대우받지 못하고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토착왜구들에게 시달리고 있다.
해방 후 친일파 정리가 되었으면 해방된 지 74년이 지난 지금 에드먼튼에 이민 온 내가 이런 글을 쓸 필요가 없는데 친일파 정리가 될 때까지는 계속 써야 한다. 토착왜구 이야기 그만 쓸 날이 빨리 오기 바란다.

기사 등록일: 2019-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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