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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영원한 상처 6.25 _ 오충근의 기자수첩
 
분단이 빚은 비극의 상처
해마다 6월이 되면 한국인들 뇌리에는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되살아난다. 동족상잔의 비극 6.25다. 이 전쟁은 호칭도 다양해 한국전쟁, 6.25전쟁, 6.25사변, 6.25동란, 한국동란 등의 호칭이 있고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르고 중국에서는 항미원조전쟁이라고 부른다.
나는 6.25동란이라고 표현하는데 란(亂)은 각종 크고 작은 무력을 동반해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뜻이 있다. 지방의 노비들이 작당해 양반 착취세력에 항거한 것도 란(亂)이고 임진왜란 같은 국가적 전쟁도 란(亂)이다.
6.25동란의 성격, 원인에 대해서는 수많은 국내 외 학자들의 다양한 연구 분석이 있어 정치성향, 이념에 따라 논란을 빚기도 하는데 논란이 중요한 게 아니라 6.25동란으로 인한 가장 큰 피해를 우리 민족이 입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우리 민족은 전쟁의 피해당사자로서 물적 인적 정신적 피해를 막대하게 입었는데 비극 중에 비극이 이산가족이다.

이산가족의 아픔
6.25동란은 수많은 이산가족을 만들었다. 통계에 의하면 이산가족의 65-75%는 6.25동란을 계기로 생겼고 25-35%는 일제시대 혹은 광복 후 6.25동란 사이에 생겼다. 가족들이 왕래하며 모여 사는 삶이 인간본연의 삶이므로 이산가족 문제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삶에 해당되는 인도주의적 문제이나 남북의 정치적 문제가 걸려있어 70년 가까이 헤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전쟁이라는 재앙적 상황을 피하기 위해 가족들이 일시적으로 헤어지거나 고향을 떠났으나 70년 동안 가족을 못 만나고 고향에 돌아갈 수 없을 줄 누가 알았으랴.
그 동안 수십 차례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있었고 고향방문 행사가 있었으나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이산가족 입장에서 진행된 행사가 아니라 남북의 정치적 논리나 이해관계에서 진행된 행사였다. 중국여행이 자유로워지면서 이산가족들은 중국을 매개체로 개인적으로 비공식적으로 상봉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산 가족의 83%가 가족들이 어디 사는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산가족 1세대는 고령으로 인해 가족을 만나지 못하고,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있다. 가장 젊은 이산가족 세대가 70대다. 남한정부가 인도주의 정부라면, 북한정부가 민족을 우선하고 겨레를 우선한다면 아무런 조건 없이 이산가족 상봉과 고향방문을 허용해야 한다.

전쟁을 잉태한 한반도 분할점령
해방 후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이 갈라졌으나 처음에는 왕래가 자유로웠다. 미국이 소련이 합의해서 정한 38선의 원래 성격은 미군, 소련군의 군사행동을 제한하기 위한 군사분계선이었지 통치분계선이 아니었다. 자유로운 왕래는 1948년 남한 북한에 정부가 들어서면서 끊어졌다. 남북은 38선을 경계로 반목하는 적대관계가 시작되었다.
원래 한반도는 독립할 때까지 2차대전 전승국인 연합국이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군정에 의해 분할 점령을 받게 계획되었다. 미국이 경기도 강원도 충청북도 경상남북도를, 소련이 함경남북도, 영국이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중국이 충청남도와 전라남북도를 점령 점령한다는 방안이었다.
이 같은 분할 점령하는 방안은 한반도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었다. 독일도, 독일의 괴뢰국 오스트리아도 분할점령 되었다.
4개국 분할점령 계획은 그 후 미, 소의 분할 점령으로 변경되었다. 독일은 전쟁을 일으킨 당사국으로 패전 책임을 져야 하는만큼 분할점령을 비롯해 국제사회의 불리한 제재를 받아들여야 하지만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이어 국토가 분단되는 불행을 또 겪어야 했다.
한반도에는 두 개의 정권이 세워져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남북으로 갈라져 미국과 소련의 대리인이 정권을 잡은 한반도에 전쟁의 불씨는 이미 내재되어 있었다.

한반도와 오스트리아
독일의 괴뢰국이었던 오스트리아도 분할점령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점령 10년만에 외국군대를 내보내고 영세중립국으로 독립했다. 오스트리아와 한국은 비슷한 점이 몇 가지 있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반만년 유구한 역사에 빛나는 자랑스러운 단군의 후손’이라는.
오스트리아도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유럽의 중심 유구한 역사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본거지다. 700년 전통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세습 황실가문으로 권위와 영광을 누렸다.
신성로마제국은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서쪽부터 베네룩스 3국, 독일, 체코, 이탈리아 북부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이었다. 명목상 제국에 불과했지만.
우리도 삼국시대 때 고구려가 광활한 만주벌판을 지배한 경험이 있다. 너무 오래되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는 현실감을 느끼기에 부족하지만.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약소국으로 전락한 오스트리아는 2차대전 때 히틀러의 침략을 받아 국토를 빼앗기고 나치의 괴뢰국으로 전락했다. 유명한 뮤지컬 ‘sound of music’에 나오는 에델바이스가 그 당시 나치에 점령당해 신음하는 오스트리아의 민족의식을 상징하는 노래다.
한반도가 일제 식민지였듯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괴뢰국이었다는 사실도 비슷하다. 오스트리아 주변에는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 강대국이 도사리고 있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한반도 주변에도 중국 일본 러시아 등 만만한 이웃이 없어 지정학적으로 오스트리아와 비슷하다. 그 외 해방 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점이나 공산주의 위협을 받은 점도 비슷하다.
형편과 처지가 비슷한데 오스트리아는 어떻게 해서 점령 10년만에 외국군대 철수 시키고 국토를 온전히 보전한 채 독립했을까?

오스트리아가 주는 교훈
독일이 항복하자 소련군이 오스트리아에 가장 먼저 진주했다. 해방된 오스트리아에도 몇 개 정파가 난립했다. 크게 나눠 기독교사회당, 인민당, 공산당이 있었다. 우리도 비슷했다. 여운형의 건준(건국 준비 위원회), 이승만을 지지하는 친일 지주가 중심의 한민당, 김구가 중심이 된 임시정부 계열 등.
해방 후 이승만이 미국의 인정을 받았듯 오스트리아에서는 사회주의자 칼 레너가 소련의 인정을 받았다. 그래서 영국 미국 프랑스는 칼 레너가 소련의 앞잡이라고 의심을 했다. 노련한 사회주의자 칼 레너는 조국의 앞날을 생각해 대통합 차원에서 권력을 독차지 하지 않고 정파 별로 나눴다. 13개 장관을 기독교사회당 4개, 인민당 4개, 공산당 3개, 무소속 2개에 분배했다.
분열을 막기 위한 정파간의 합의와 균형이 최우선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우리보다 조건이 나빴다. 우리는 남북으로 갈라졌지만 오스트리아는 동서남북으로 갈라졌다. 수도 비엔나도 4쪽으로 갈라졌다.
우리와 오스트리아는 역사적으로 비슷한 점도 있고 2차대전 후 형편과 처지도 비슷했지만 다른 게 한가지 있다. 우리는 정파간의 합의와 균형보다는 분열과 반목을 택했다. 심지어 반대파에 대한 암살과 테러도 불사했다. 분열과 반목은 전쟁의 전주곡이었다.

반 쪽짜리 권력이라도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놓고 소련 대리인과 미국 대리인이 등장했다. 김일성과 이승만이다. 두 사람은 해방된 조국에서 권력욕만 내세웠지 민족 앞날에 대한 청사진이 없었다. 오스트리아처럼 통합이나 단결을 내세워 통일하려는 정파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김구, 김규식 같은 남북협상파는 김일성 이승만에게 이용만 당하던가 무시 당했다.
해방 후 3년 사이, 우리에게도 협상을 통한 통일의 기회가 없지 않았다. 그 기회가 비록 실낱 같은 기회였을 지라도 기회를 날려 먹었다.
첫 째, 모스코바 3상 회의에서는 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설하며 통일임시정부를 구성한다고 결의했다. 그리고 독립국가로 설 때까지 신탁통치 한다고 결의했다. 그러나 임시정부 출신이 중심이 된 우파들이 신탁통치를 반대했다. 통일임시정부구성은 뒷전이고 찬탁 반탁으로 갈라져 싸우다 통일임시정부 세울 기회를 날려 버렸다.
둘 째, 미군정은 1946년 모든 정파가 참여하는 좌우합작을 지지하였다. 미국은 이승만 김구를 정계에서 물러나게 하고 여운형이나 김규식에 주목했다. 여운형은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좌우를 아우를 수 있는 정치인이었고 김규식은 미국에서 공부했고 기독교 신자로서 미국이 신뢰할 수 있는 합리주의자였다. 그러나 좌파는 좌파대로 우파는 우파대로 정파적 이익을 앞세워 좌우합작에 반대하거나 소극적이었다.
당시 미군정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85%가 대의정치를 지지했고 3%가 계급정치를 지지했다. 체제에 대해서는 70%가 사회주의를 14%가 자본주의를 7%가 공산주의를 선호했다.
오스트리아가 영세중립국으로 독립을 한 이면에는 운도 크게 작용했다. 스탈린의 죽음이다. 소련은 오스트리아의 분단을 명분으로 소련의 괴뢰국을 만들려 했지 영세중립국 독립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탈린의 죽음은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소련 대외정책 변화를 가져왔다. 후임 서기장 후르시쵸프 시대에 동서화해 무드가 조성되어 오스트리아가 영세중립국으로 독립할 수 있게 되었는데 운도 노력하는 자에게 따르게 되어 있다.
해방된 조국에서 화해나 단결에 의한 통일 대신 반쪽 권력이라도 차지하는데 눈이 먼 두 독재자 이승만 김일성에게 신은 전쟁을 선물할 수 밖에 없었다.

기사 등록일: 2019-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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