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안내   종이신문보기   업소록   로그인 | 회원가입 | 아이디/비밀번호찾기
캐나다, 이민자의 나라 _ 오충근의 기자 수첩
 
원주민의 땅 캐나다
152년전 1867년 7월1일 캐나다가 독립했다. 총 한방 안 쏜 문서상의 독립이지만 캐나다는 독립국가의 틀을 마련했다. 그 이전에는 영국 프랑스의 식민지로 다양한 부족의 원주민들이 흩어져 살던 땅으로 원주민들은 캐나다 초기 역사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캐나다의 학교, 단체에서는 학교 시작 전에 단체나 교회에서는 행사나 예배 전에 ‘Land acknowledgement’를 낭독해 이 땅이 원주민들이 살던 땅임을 알린다. Treaty 6에 위치한 에드먼튼 지역에서는 Treaty 6 Land Acknowledgement를 낭독한다.
Treaty 6
We acknowledge that we are on Treaty 6 territory, a traditional meeting grounds, gathering place, and travelling route to the Cree, Saulteaux, Blackfoot, Métis, Dene and Nakota Sioux. We acknowledge all the many First Nations, Métis, and Inuit whose footsteps have marked these lands for centuries.
앨버타 주는 Treay 6,7,8 지역으로 NDP 정부 때는 주 정부 공식 행사에’Indigenous land acknowledgements’를 낭독하고 행사를 시작했으나 UCP 정부에서 식순에서 이 순서를 배제해 원주민 역사를 바라보는 UCP의 시각에 우려를 자아냈다. UCP 정부에서는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고 있지만.
원주민들의 땅에 대한 권리는 협약(treaty)에 의해 영국의 권리에 속하게 되는데 사기와 기만으로 원주민들은 눈 뜨고 땅을 빼앗겼다. 좋은 예가 1899년 연방정부의 루비콘 원주민 토지 사기 사건이다. 크리(Cree)족은 눈 뜨고 사기 당한 채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는 전통적 삶을 잃어버렸다.
원주민 사회는 캐나다 정부와 협정을 맺은 적고 없고 토지 권리를 포기한 적도 없었다. 세월이 흘러 이 사건은 유엔 인권위원회와 국제 인권단체에서 인권 위반 권고사항이 되었다.

향신료의 나비효과
원주민들이 살던 땅에 17세기부터 유럽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대륙의 발견의 시초는 당시 해상권을 쥐고 있던 스페인 포르투갈이었다. 육식을 주로 하는 유럽인들에게 후추는 필수 향신료인데 유럽에서는 후추 재배가 안되고 인도를 비롯한 동남아가 주산지로 이슬람 상인들이나 이탈리아를 통해 유럽으로 수입되었다.
그러나 오스만 터키가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버티고 앉아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 차 무역을 독점해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기존의 무역항로는 인도양에서 홍해, 홍해에서 지중해까지는 육로를 이용했다. 그 때는 수에즈 운하가 없었으니까. 지중해에서 유럽 각국으로 향하는 항로였다.
그러나 오스만 터키는 항로를 봉쇄했다. 오스만 터키의 횡포에 맞서 유럽에서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해 인도와 직거래를 시도했다. 스페인 포르투갈은 앞을 다퉈 항로개척에 나섰다. ‘인도로, 인도로’ 그러나 그들이 도착한 곳은 인도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아메리카 대륙이었다.
향신료가 발단이 되어 신대륙이 발견되자 후발주자인 영국 프랑스가 뒤를 이었다. 북미에는 야생동물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어 모피 상인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유럽에서 모피는 신분의 상징으로 러시아에서 수입했으나 신대륙의 발견으로 모피는 영국 프랑스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 주었다.

이민의 어두운 역사
원주민들과 모피상인들이 거래를 시작으로 캐나다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유럽인들의 이주가 시작되었는데 정부가 수립된 1867년 이후 지금까지 약 1,700만명이 캐나다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민정책은 연방정부 고유권한으로 캐나다는 이민 친화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캐나다 이민에는 밝은 면 못지 않게 어두운 면이 있었다.
연방 성립 이후 자유당과 보수당이 번갈아 연방정부를 구성했는데 자유당 집권기간이 약간 더 길다. 캐나다는 영국 정치제도를 본받아 내각책임제로 다수당을 구성하는 정당의 당 대표가 총리가 된다.
어느 당이 집권하느냐에 따라 이민 정책이 변화되는데 3대-7대, 1878년부터 1896년까지 집권한 보수당 때 인두세라는 인종차별적 제도가 있었다. 인두세는 중국인 이민자에게만 적용되는 세금이었다. 태평양 횡단 철도 공사에 필요한 노동력 때문에 중국인 노동자를 대량 고용했으나 철도 완공 후 중국인 노동력이 필요 없게 되었다. 완공 후 밀려드는 중국인 노동 이민자를 받지 않기 위해 취해진 조처다.
1885년에는 50달러를 부과하다 1900년 100달러로 올랐고 1903년 500달러로 올랐다. 물가시세로 비교할 때 당시 500달러는 노동자들이 한 푼도 쓰지 않고 2년간 저축해야 할 금액이라고 한다. 연방정부는 중국인에게서 거둔 인두세를 유럽이민 권장하는데 사용했다. 연방정부와 B.C. 주정부는 나중에 인두세에 대해 사과했다.
인두세는 1923년 폐지 되었는데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폐지 된 것이 아니고 중국인 입국법 시행으로 중국 이민자를 원천 봉쇄함으로써 인두세를 부과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민과 연방 자유당
인두세 외에도 인종차별적 이민제도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다. 유럽계 우대의 이민정책이 한계에 부딪친 것은 1960년대로 당시 총리였던 피에르 튀리도는 다양성을 존중하고 모든 민족이 똑같다는 복합문화주의를 표방하며 이민문호를 개방했다.
이때를 계기로 난민에게도 문호를 개방해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 아시아를 비롯해 자마이카, 하이티의 난민을 수용했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던 1997년을 전후해서 홍콩 이민이 급증했다.
캐나다는 저출산국에 속한다. 대체출산율이 2.1명이 되어야 현상유지를 하는데 캐나다 대체출산율은 2018년 기준 1.5명이다. 저조한 출산율과 고령화, 베이비 부머의 은퇴로 캐나다는 심각한 노동력 부족에 직면해 자유당은 인구의 1%를 이민자로 충당하고 있다.
인구의 1% 이민은 경제발전에 필요한 수준으로 현재와 같은 사회복지체제를 유지하려면 더 많은 이민자가 필요하다. 통계에 따르면 1971년 노동인구와 은퇴인구 비율이 6.6:1이었으나 2035년이 되면 4:1로 줄어든다. 최악의 경우 2:1로 줄어들 가능성이 있는데 노동인구와 은퇴인구가 2:1이 된다면 현행 사회복지제도는 없어진다.
연방 이민국이 올해 초 발표한 바에 따르면 향후 3년간 이민 목표 100만명으로 2019년 33만명, 2020년34만명, 2021년 35만명을 목표로 정했다. 그러나 경제계에서 권고한 45만명 선에는 매우 미흡한 수치다.
2016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5명중 1명이 이민자다. 이민자들은 고학력자로서 이민 온지 12년 되면 캐나다 평균소득에 도달하는데 경험이민의 경우는 1년 사이에 평균임금을 넘어서는 경우도 있어 이민자들의 경제 기여도를 엿볼 수 있다.
Visible minority(가시적 소수인종)도 크게 늘어나 7백7십만명에 이른다. 이는 인구의 22.3%에 해당한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71년 전체 이민자 중 아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5%였으나 2016년에는 48%로 늘어났다. 유럽계는 1971년 전체 이민자중 80%를 차지했으나 2016년에는 28%로 줄어 들었다.

이민사회의 그늘
캐나다는 오랫동안 복합문화정책, 요즘에는 다문화라고 하는데 이는 캐나다 헌법에도 명시 되었고 연방 하원에서 법으로 제정했다. 그러나 복합문화정책을 폐기 시키려는 시도가 보수당 정부에서 진행되었으나 부작용이 너무 크다고 판단해 중단 되었음이 밝혀졌다.
제이슨 케니 앨버타 주 수상이 보수당 하퍼 정부에서 이민 장관을 지낼 때는 복합문화정책을 복수주의(pluralism)로 대치할 것을 시도해 논란을 빚었다. 케니 장관(당시)은 “다문화는 이민자 중심의 문화로 영어나 불어, 원주민 문화를 포함한 문화와 별도 문화이니 이제는 한 단계 더 성숙한 복수주의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계에서는 이민자를 늘리라고 요구하는데 여론조사 결과는 이민을 줄이라고 말한다. 자유당이건 보수당이건 이민 친화정당으로 어느 당이 집권하던 큰 틀에서는 이민정책의 변화가 없겠으나 이민을 줄이라고 요구하는 계층은 보수당 지지자들이다.
여론조사 결과는 응답자의 50%가 너무 많은 이민자를 받아드린다고 대답했고 42%는 비 백인 이민자가 너무 많다고 대답해 비록 일부겠지만 이민자를 보는 시각이 왜곡 되었다는 우려가 생겼다.
이 같은 우려가 사실로 입증되었으니 다문화 사회답지 않게 캐나다에는 300개의 극우 백인우월단체가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단체들은 반 이민 인종증오 단체로 이민정책에 반대하고 있다. 지난 겨울에도 백인 극우단체들은 에드먼튼에서 반 이민 인종증오 시위를 가졌다. 반 이민 인종증오 단체의 증가는 여론조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앵거스 리드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 80%는 특정 인종에 대한 편견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44%는 백인 우월주의가 확산되어 우려가 되고 있다고 밝혔다.
캐나다는 이민자를 캐나다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 다문화를 통해 통합을 이루었다. 이민자들이 경제 발전과 인구증가 복지정책 유지에 필요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캐나다 구성원의 일원으로 소외감 느끼지 않고 자부심 갖고 살아가도록 연방정부의 배려와 관심이 필요하다.

기사 등록일: 2019-07-12
나도 한마디
 
최근 인기기사
  캐나다 소득세법 개정… 고소득자..
  앨버타 집값 내년까지 15% 급..
  첫 주택 구입자의 모기지 상환 ..
  로또 사기로 6명 기소 - 앨버.. +4
  에드먼튼 건설현장 총격 2명 사..
  캘거리 의사, 허위 청구서로 2.. +1
  해외근로자 취업허가 중간 임금 ..
  앨버타 주민, 부채에 둔감해진다..
  미 달러 강세로 원화 환율 7%..
  캐나다, 주택 위기 극복 위한 ..
댓글 달린 뉴스
  버스타고 밴프 가자 - 레이크 .. +2
  로또 사기로 6명 기소 - 앨버.. +4
  캘거리 의사, 허위 청구서로 2.. +1
  돈에 관한 원칙들: 보험 _ 박.. +1
  2026년 캐나다 집값 사상 최.. +1
  개기일식 현장 모습.. 2024.. +2
회사소개 | 광고 문의 | 독자투고/제보 | 서비스약관 | 고객센터 | 공지사항 | 연락처 | 회원탈퇴
ⓒ 2015 CNDrea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