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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론다이크(Klondike), 유콘, 에드먼튼 _ 오충근의 기자수첩
 
K-Day 축제의 유래
에드먼튼에서는 K-Day 축제가 한창이다. 19일부터 28일까지 열리는 K-Day 축제는 처음에 Edmonton Exhibition이라는 명칭으로 1879년에 처음 열렸다. 일종의 농산물 전시회로 그때는 City of Edmonton이 아니라 Fort Edmonton이었고 앨버타 주가 아니라 N.W.T.(North Western Territory)라고 불렀다. N.W.T는 지금의 유콘, N.W.T. 앨버타, 사스캐추원, 누나붓을 합친 광활한 지역이었다. 1905년 N.W.T.가 캐나다 연방에 가입할 때 연방정부가 주, 준주로 나누어 앨버타 주, 사스캐추원 주가 탄생했다.
이 여름축제는1964년 Klondike days로 명칭을 바꾸었다. 캘거리 스템피드가 서부개척시대 역사 유산을 재현해 크게 성공을 거두자 에드먼튼은 “우리는 역사적인 게 뭐가 있을까?” 궁리하다 1890년대 클론다이크 골드러시(Gold Rush)에 생각이 미쳤다. 골드러시는 에드먼튼 역사에 중요한 부분이다.
그 후 클론다이크 축제는 2006년 Capital EX로 명칭을 바꾸었다 반대가 빗발치고 입장객과 입장 수입이 크게 줄어들자 2012년 K-day로 명칭을 바꾸었다. K는 클론다이크, 골드러시를 의미한다. K-day로 명칭을 바꾼 후 입장객 및 입장수입이 지속적으로 늘어나 2017년에는 입장객이80만명을 넘어섰고 작년에는 동물보호, 낙태 반대 시위의 영향으로 입장객이 다소 줄었으나 그래도 80만명을 웃돌았다.

골드러시 광풍
유콘지역에는 1890년대 초기부터 금을 캐기 위해 광부들이 몰려들어 금광을 찾아 헤맸다. 1896년 8월 인척관계로 이루어진 원주민 그룹이 클론다이크 강 어구에서 연어잡이 중 노바 스코시아에서 온 로버트 헨더슨을 우연히 만났다. 헨더슨은 클론다이크 강 남쪽 인디언 강(Indian River)에서 금맥을 찾고 있었다. 그는 원주민들이 가까이 오는 걸 싫어했다. 원주민 그룹은 무스를 사냥하러 강을 따라 몇 킬로 더 올라가 래빗 크릭(Rabbit creek)에 도착했다. 8월16일 이들은 래빗 크릭에서 순도 높은 금맥을 발견했다. 원주민 그룹의 금맥 발견으로 골드러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금맥을 최초로 발견한 원주민은 타기쉬(Tagish)부족의 스쿠쿰 짐 메이슨이다. 그 후 래빗 크릭은 보난자 크릭(Bonanza Creek)으로 이름이 바뀌어 골드러시를 실감나게 했다.
금맥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은 강줄기를 따라 전염병처럼 퍼졌고 일년 후 7월에는 미국까지 소문이 닿았다. 1897년 7월1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7월17일 시애틀에서 꿈에 부푼 사람들이 배를 타고 유콘으로 향했다. 이들은 알라스카 스캐그웨이(Skagway)에서 칠쿠트 트레일(Chilkoot Trail)과 칠쿠트 패스(Chilkoot Pass)를 횡단해 유콘으로 유콘으로 밀려들었다. 약 10만명이 행운을 찾아 나섰으나 1898년 도슨(Dawson City)에 도착한 사람은 3만명으로 추산된다.
도중에 꿈을 포기하고 돌아간 사람들도 있고, 험난한 지형과 추위에 생명을 잃은 사람들도 있었다. 알라스카-캐나다 국경에는 연방경찰이 엄격하게 단속을 했다. 이주자들은 일년 동안 살수 있다는 사실을 연방경찰에 입증해야 했다. 입증에 실패하면 돌아가야 했다. 뿐만 아니라 무기단속을 엄격하게 하고 캐나다 법과 질서, 안전을 유지해 무법천지의 혼돈을 막았다.
이 같은 원칙을 연방경찰은 에드먼튼을 통해 들어오는 이주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3만명이 몰려들어 혼잡스럽던 도슨 시의 인구는 3년 후인 1901년 9천명으로 대폭 줄어 골드러시의 허망한 꿈을 말해준다.

에드먼튼과 골드러시
육로를 통해 행운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든 곳이 에드먼튼이다. 에드먼튼에서 유콘에 이르는 길을 all Canadian trails이라고 한다. 크게 나눠 3개 루트가 있는데 나는 지난 주에 일주일 여정으로 오버랜드 트레일(Overland Trail)로 알려진 길을 따라 유콘을 여행했다. 에드몬튼에서 화이트 호스까지는 1,988킬로미터인데 2박3일 걸려 도착했다. 더 빨리 갈수도 있었지만 내가 경쟁자를 앞질러 금을 캐러 가는 것도 아니고 유람 삼아 떠난 길이니 과속할 필요 없이 산천경개 구경하며 여유롭게 갔다. 돌아올 때는 프린스 죠지를 경유해 왔는데 산간벽지 길은 약 2,360킬로미터, 역시 2박3일 걸렸다.
내가 여유롭게 2박3일 걸린 길을 100년전 골드러시 때는 90일 걸렸다. 그나마 빨라야 90일이었다. 오버랜드 트레일은 현재 43번 도로인 알라스카 하이웨이와 대충 비슷한 길인데 마차나 말을 타고 가다 강을 만나면 뗏목에 의지해 급류가 소용돌이 치는 강을 건너는 멀고도 험한 길이었다. 일정이 길어져 도중에 겨울을 만나면 지옥보다도 더 혹독한 고생을 치러야 했다.
골드러시 때 일확천금의 부푼 꿈을 안고 에드먼튼에 모여든 사람들이 2천명이 넘었다. 에드먼튼은 온통 금 이야기로 들떠 있었다. 거리에서, 카페에서, 술집에서, 식당에서, 커뮤니티 회관에서, 교회에서, 두 세 명만 모이면 꿈 꾸는듯한 표정으로 금 이야기 하느라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에드먼튼에서는 클론다이크까지 가는 길이 겨울에도 적당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소문이란 게 원래 사실보다 부풀어져 퍼지지만 겨울에도 여행하기 적당하다는 건 얼토당토 않은 헛소문이었다. 그때는 알라스카 하이웨이가 개통되기 전이라 지금보다 훨씬 긴 3천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였다. 여름에는 모기를 비롯한 곤충, 벌레에 시달리고 급류와 홍수 진흙 길, 수렁이 기다리고 있었다. 겨울에는 살인적인 추위와 싸워야 했다. 시애틀의 어느 치과의사는 90일 걸리는 길을 2년 넘어 도착했다. 골드러시는 이미 끝났다. 그러나 행운이 그를 외면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일확천금의 꿈은 때로 생명을 요구하기도 했으니까.
신문기사는 온통 금 이야기로 도배 되었고 시중에 떠돌던 달콤한 소문은 나중에 대부분 유언비어와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도슨 까지만 가면 원하는 만큼 금을 가질 수 있다는 소문에 너도 나도 환상에 젖어 길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금 캐는데 성공한 사람들
기회는 공평하게 주어졌으나 결과는 공평하지 않아 극소수만 금을 캐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러나 기쁨과 성취감 뒤에는 술, 여자, 도박이 도사리고 있었다. 모든 난관과 유혹을 이겨내고 야바위꾼과 협잡꾼의 음모를 피해 금을 갖고 고향에 돌아간 사람은 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그러나 클론다이크까지 가지 않았어도 금 캐는데 성공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금이 다른 종류의 금이었지만. 2천명 넘는 사람들이 수십 개 그룹을 지어 에드먼튼을 떠났으나 클론다이크에 도착한 사람은 실제로 160명에 불과했다. 도중에 금을 포기하고 돌아간 사람, 마음을 바꿔 “내 팔자에 무슨 금이냐? 그냥 여기서 살자.”면서 정착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속담에 “가다 중지하면 아니 가느니만 못하다” 했지만 속담이라고 모든 경우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알렉스 몽크맨이 여기 해당한다.
위니펙에서 태어나 자란 몽크맨은 서부지역을 떠돌며 로데오 기사, 야생마 길들이는 일을 했다. 몬타나에서 골드러시 이야기를 들은 그는 1898년 에드먼튼으로 와서 금 캐는 대열에 참가했다. 피스 리버(Peace River)지역을 지날 때 무역업과 운송업을 하는 사람을 만났다. 몽크맨은 “ 그 금만 금이 아니다. 여기에도 금이 있다.”고 판단해 클론다이크 금을 포기했다. 그는 그랜드 프라리(Grande Prairie) 지역에서 화물과 모피 운송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그랜드 프라리 개척자로 알려졌다.
데이브 섹스미스(Dave Sexsmith)도 금 캐는 대열에 참가했다 회심한 사람이다. 온타리오에서 태어난 19세 청년은 골드러시에 미혹되어 에드먼튼에서 대장정을 시작했다. 27세부터 30세까지 3년을 피스 리버 지역에서 화물 운송, 광물 탐사로 시간을 보내던 그는 금에 대한 열망이 식었다. 그 대신 새로운 금을 찾았다. 그는 평생을 피스 리버 지역에서 살면서 진정한 개척자가 되었다. 그랜드 프라리에서 20킬로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섹스미스는 이 위대한 개척자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메티(Metis)의 정착지였던 이곳은 비옥한 땅으로 세계적인 곡물 산지로 성장했다. 이 지역에서 생산된 곡물은 대영제국을 유지하는 곡물창고 역할을 했다.
골드러시가 한창일 때 도슨의 인구는 3만명이었다. 인구가 급격히 팽창하자 인프라 확충이 뒤따랐다. 도로망과 교량 건설, 주택건설 붐이 일었다. 골드러시가 시들고 3만명이던 인구가 9천명으로 줄었으나 그때 건설된 인프라는 그 후 자원개발, 경제개발에 기여했다. 2019년 현재 유콘 인구가 40,369명이고 화이트호스 인구가 25,000임을 감안할 때 100년전 도슨 인구가 3만명이었다는 사실에서 골드러시 붐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새로운 금을 찾아서
골드러시 붐은 차갑게 식어갔으나 일확천금을 찾아나선 사람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더 이상 금맥은 없다.”라는 선언에도 경쟁자들이 우리를 따돌리고 금을 독차지 하려는 헛소문이라고 믿고 덧없는 희망을 이어갔다. 그러나 금맥은 더 이상 발견되지 않은 채 역사의 일부분이 되어 이곳을 찾는 호사가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전설이 된 골드러시는 세월이 흐르며 관광이라는 다른 형태의 금맥이 되었다. 통계에 따르면 2018년 유콘 관광 수입은 8억3천7백만 달러에 달했다. 5월부터 9월까지 유콘을 찾은 관광객이 거의 40만명에 달했다.
강물에서 금을 채취하는 골드 패닝(Gold panning)은 세월이 흘렀어도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상품이다. 유콘 강가에 세워져 있는 증기선 S.S. Klondike는 유지관리가 잘 되어 지금이라도 운항이 가능하게 보였다. 이 증기선이 골드러시 때 화이트 호스에서 도슨까지 금맥을 찾는 이주자와 각종 물자를 실어 날랐다.
골드러시 열풍이 불었을 때 개통된 알라스카 스캐그웨이(Skagway)에서 유콘 화이트 패스를 왕복하는 열차도 인기상품이 되었으니 골드러시는 세월이 흘러 후손들에게 또 다른 금맥을 선사한 것이다. 골드러시는 도슨 시 전체를 역사유적지로 만들었고 골드러시와 관계되면 관광상품으로 개발 되었다. 캐나다는 주마다 특색 있는 이름이 있는데 앨버타는 Wild rose country라고 부른다. 유콘은 Klondike다. 이 한가지 사실에서 유콘이 골드러시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어떻게 유콘에 영향을 주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기사 등록일: 2019-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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