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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와 노동조합 _ 오충근의 기자수첩
 
노동자 사회를 바꿔놓은 ‘9시간 노동운동’

캐나다 초대 총리는 누구인가 라고 묻는다면 시민권 시험에 나오기에는 너무 쉬운 문제일까? 죤 맥도날드(John A. Macdonald)가 바로 그다. 보수당 출신으로 1867년부터 1873년까지 2기에 걸쳐 총리로 재임하며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신생 정부 총리로서, 실용주의자로서의 정치철학을 갖고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
맥도날드 총리에 대한 공과는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의 재임기간 동안 캐나다 노동운동의 큰 획이 그어지는 일이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노동시간이 하루 10시간 이상이 보통이었고 12시간 넘는 노동도 흔했다. 매일 하루 10시간-12시간 일한다고 생각해보라. 그 당시 노동자들은 하루 9시간 노동이 꿈이었다.
초기 노동운동의 목표는 노동시간 단축이었다. 이는 산업혁명 이후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주요 이슈로 캐나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요구는 무시되었다. 견디다 못한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다. 1872년 3월25일 토론토 식자공, 인쇄공들이 하루 9시간 노동을 요구하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고용주들은 당연히 거부했다. 노동자들은 파업을 시작하자 고용주들은 대체 인력을 투입했다. 노동자들의 파업이 공감을 얻어 지지자들이 늘어났다. 4월15일 토론토에서는 10,000명 이상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그 당시에는 노동운동이 불법이라 주동자들은 음모혐의로 체포되었으나 4월18일 개혁파 의원들이 주도한 노동조합법(Trade Union Act)이 소개 되어 노동운동이 합법화 되고 보호되었다.
이때 파업은 ‘9시간 노동운동’으로 발전했다. 1850년 초반까지는 노동시간 줄이기가 노동운동의 큰 이슈로 등장해 활력을 불어넣었고 많은 노동자들이 노조에 가입해 생활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미국 노동자들이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며 일어난 시위, 시카고의 헤이 마켓 사건이 일어난 게 1886년으로 캐나다 노동자들의 노동시간 단축 요구 역사는 미국보다 14년 빠르게 일어났다.


1차대전 이후 노동시장 변화

인류역사상 최초의 대량살육전이라는 1차대전이 1918년 끝났다. 1차대전은 미증유의 살륙전으로 군인 민간인 합해 2천8백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비극이었으나 전쟁 후 사회가 전반적인 면에서 긍정적으로 변화 되었다. 그러나 부정적인 변화도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군인들이 전선에서 돌아왔다. 평화의 시대가 왔고 젊고 혈기 넘치는 군인들에게는 총칼 대신 직업이 필요했다. 남자들이 전선에서 적과 싸우는 동안 여자들이 생산을 담당했다. 여자들은 한번 차지한 사회적 위치를 남자에게 돌려주고 가정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전쟁 중에 기업주들은 ‘전쟁 특수’라는 호황을 누렸다.
생사를 넘나드는 비참한 경험을 겪고 돌아온 군인들은 향상된 사회적 조건 하에서 살고자 하는 희망에 부풀었으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넘쳐나는 노동인구로 실업률이 높아지고 전후에 어느 나라나 겪는 고질병인 인플레도 심해져 사회적 긴장이 높아져 갔다. 경제적 상황이 변하자 노동자들은 가족을 부양하는데 필요한 공정한 임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보자, 2018년 10월1일 기준 캐나다 최저임금은 11.07달러/시간인데, 최저임금을 받는다면 full time 즉, 주 35시간 이상 52주 일하면서도 기본 생활비의 88%밖에 벌지 못한다. 캐나다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기본적 사회 안전망이 작동하지만 저소득자들은 ‘working poor’를 벗어나기가 구조적으로 어렵다. 이런 악순환은 1차대전 후 캐나다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1919년 위니펙에서 노동자들이 대규모 파업을 일으켰다. 물가는 치솟는데 임금은 제자리였다.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도 파업의 원인이다. 이민자들은 보통 이민자들이 아니라 유럽 출신으로 혁명을 겪으며 사회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노동자들이었다.
5월15일 11시, 위니펙 노동자들은 거리에 나와 행진을 시작했다. 파업에는 봉제공장 노동자부터 경찰까지 공공부분 노동자 민간부분 노동자 3만명이 참가했다. 6주간 계속되던 시위는 ‘피의 토요일’을 클라이맥스로 장식했다. 위니펙 시에서는 귀환 군인들을 동원해 맞불 시위를 계획했으나 군인들이 거부했다.
시위대를 해산시키려고 전차를 동원했으나 시위대는 전차를 뒤집어 엎고 불을 질렀다. 마침내 시위진압법에 따라 연방경찰이 동원되어 시위대에 발포를 시작했다. 30명의 사상자를 내고 시위는 진압되었다. 시위대는 해산되고 주동자들은 체포되어 외관상 노동자들이 패배한 것으로 보이나 위니펙 파업은 장기적으로 노동 개혁으로 이어져 노동자의 삶의 질이 향상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1차대전과 정부의 실업자 대책

산업혁명으로 기술적 경제적 변동이 생기며 생산수단이 급격히 늘어났다. 자본의 집중으로 대규모 공장이 우후죽순으로 생기자 독립적이었던 영세 자영업자들은 임금노동자로 전락했다. 이농현상이 벌어져 가난한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어 공장 노동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그러나 불황이 닥치면 자본가들은 노동자를 대량 해고해 실업자가 넘쳐나 사회불안 요인이 되었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유럽에서는 실업문제를 사회문제로 인식해 20세기 초반 영국, 프랑스, 덴마크에서는 실직자들을 위해 정부에서 임시 재정지원을 하는 공공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유럽과 달리 캐나다는 실업문제를 국가적 조치가 필요한 사회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개인적이고 지역적 문제로 인식했다. 1870년 불황으로 실직자가 대량으로 생겨 생활이 궁핍하게 되었다. 불행을 당한 실직자들의 생활은 교회, 자선단체, 지역사회의 자비에 의지해야 했다. 연방정부와 주정부는 긴급지원만 했다.
그러나 1차대전은 캐나다 실업정책을 바꾸어 놓았다. 전쟁이 끝나고 장병들이 전선에서 돌아왔으나 이들에게는 직업이 없어 정상적 생활을 영위할 조건이 안 되었다. 전쟁을 겪고 돌아온 젊은이들을 캐나다 사회에 다시 통합 시키는 일에 연방정부는 고심했다.
1918년 연방정부는 고용관리법을 도입했다. 연방정부가 주 정부 고용부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비용분배 프로그램이다. 또한 연방정부는 고용서비스부를 신설했다. 고용서비스부에서는 고용정보와 자문을 제공했다. 연방정부가 고용서비스부를 신설했다는 의미는 실업문제를 정부가 영구적이고 국가적인 문제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1919년 연방정부는 1회 국제 노동자 회의에서 공공 실업보험을 권고하는 초안에 서명했다. 또한 왕립 산업관련 위원회를 설립하고 Mather를 위원장에 임명했다. 이 위원회는 위원장 이름을 따라 매더스 위원회라고 부르는데 매더스 위원회는 자기 잘못 없이 직장을 잃은 실직자를 위한 사회보험 시행 등 광범위한 노동 개혁을 권고했다. 자유당은 전당대회에서 공공 실업보험을 승인했다. 노동과 실직에 대한 정부의 인식변화는 1차대전이 가져온 변화다.


캐나다 직장, 안전이 최우선

캐나다 직장에서는 안전이 최우선이다.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안전을 강조하나 안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또한 노동자들은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작업을 거부할 수 있다. 그러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캐나다 직장 문화에는 아픈 과거가 있다.
1960년대는 변화와 진보의 시대요 자본주의가 황금기를 누린 시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기업가의 이기심과 추악함이 숨어 있다. 60년대 캐나다 노동자들은 착취를 당했다. 특히 이민자들이 손 쉬운 착취의 대상이 되었다. 영어가 서툰데다 노동자로서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무엇인지도 몰라 악덕 기업주의 손쉬운 먹이가 되었다.
1960년 3월 이탈리아 노동자 5명이 토론토 영 스트리트 주변 터널 공사에 투입되었다. 35피트 지하로 연결되는 직경 6피트의 터널이 있었다. 터널 속에는 36인치 수도 본관이 지나가 수도관 밑으로 기어 다녀야 했다. 그들은 안전모도 손전등도 없었다.
터널에 불이 났을 때 한쪽에는 녹아 내린 케이블 더미가 다른 한쪽에는 시멘트 터널 지지벽이 붙어 있어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5명은 캄캄한 터널에 갇혔다. 겁에 질린 구조대원들은 터널로 들어가는 공기를 차단했다. 바닥은 시멘트로 완전히 봉해지지 않아 불을 끄려고 밖에서 물을 쏟아 붓자 흙더미가 밀려들어 5명의 노동자는 진흙에 생매장 된 채 일산화탄소에 질식사 했다.
이 비극이 OHS(Occupational Health and Safety)의 기폭제가 되었다. 노조는 온타리오 정부와 투쟁을 주도해 산업안전법(Industrial Safety Act)을 통과 시켰다. 이 법은 10여년 후에 통과된 Canada Labour Act의 모체가 되었고 뒤이어 사스캐추원이 북미 최초로 OHS를 통과 시켰다. 오늘날 OHS는 캐나다 모든 작업장에서 공통으로 적용된다.
노동조합은 캐나다를 평등하고 민주적 사회로 만드는 주요 역할을 계속한다. 캐나다 노동조합이 비교적 강한 이유는 정치활동을 통해 모든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 노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사회 노동조합"의 강한 전통 때문이다. 캐나다 노동법은 대중의 폭넓은 노동조합 지지와 직장에서 노동조합의 긍정적 역할과 폭넓은 사회를 반영한다.
노동운동은 인권을 위한 중요한 힘이 되고 보다 폭넓은 경제적 평등을 지향한다. 그래서 극단적 소득 불평등이 미국보다 훨씬 양호하게 나타난다. 폭 넓은 평등과 사회정의는 모든 노동자들을 대신해 대표하는 강력한 노동운동을 필요로 한다.

기사 등록일: 2019-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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