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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문턱을 넘으며_ 오충근의 기자수첩
 
올해도 벌써 ¼ 지났다. 연말 연초에 태평양 너머에서 이상한 전염병이 번지다는 소식에 떠나온 모국이 전염병의 피해를 많이 받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누구에게나 있었겠지만 정체불명의 괴질은 어느새 태평양을 넘어와 캐나다 사는 우리에게 발등의 불이 되었다.
‘어, 어’ 하는 사이에 전염병은 전 세계로 번져 나가 1백20만명 이상의 환자가 발생하고 거의 65,000명이 정체불명의 괴질에 목숨을 잃었다. 그러더니 4월이 되었다.
어떤 작가가 4월을 思月이라고 써 무디어진 감성을 일깨워 주기도 했지만 4월이 그렇게 낭만적이거나 감성적인 달이 아니다.
엘리어트는 장편 서사시 ‘황무지’에서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썼다. 황무지는 1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유럽을 상징하지만 더 나아가 인류가 추구해온 산업혁명 이후의 현대문명을 가리킨다. 황무지 주민들은 약간의 생명을 누리며 따뜻한 눈 속에 갇힌 채 망각 속에서 살고자 하나 봄비가 내리는 4월은 생명의 소생을 일깨워 주기 때문에 잔인하다고 시인은 썼다.
물질, 돈, 편안함에 빠져 자연 파괴를 일삼는 황무지의 주민, 즉 현대인에게 시인은 ‘생명의 봄비’를 기다린다면 ‘나누고, 공감하고 절제하라’고 외치고 있다.
현대문명에 대한 경고로서 잔인한 4월과 또다른 의미로 4월은 잔인하다. 4월에는 임시정부수립일, 4월11일처럼 기쁘고 의미 있는 날도 있지만 4.19혁명도 있다. 불의와 독재에 항거한 젊음이 뜨거운 피를 뿌리고 산화한 그 자리에서 민주주의가 자랐다.
우리가 기억하고 싶지 않고 잊어버리고 싶은 진실이 4월에 묻혀 있어 해마다 이때가 되면 덧난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아픔을 느끼게 한다. 바로 ‘제주 4.3 사건’이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기억해야 하는 우리 현대사의 아픔이다.

제주 4.3 사건

4.3 사건은 아직 공식적 명칭도 없다. 4.3 폭동부터 4.3 민주항쟁까지 여러 명칭이 없지만 공식적 명칭은 아니다. 4.19 혁명이 ‘불의에 항거한 민주이념’으로 헌법 전문에 규정되고 광주 사태가 ‘5.18 민주화 운동’으로 법적 지위를 받았으나 4.3은 공식적 명칭조차 없이 4.3 사건(이하 4.3 사건)으로 불린다.
4.3사건이란 제주도 일대에서 1947년3월1일 시작하여 1948년4월3일 남로당이 주도하여 발생한 대규모 소요사태를 말한다. 이 소요사태는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9월21일까지 진행되었다.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확인된 민간인 사망자가 10,715명이다. 그중 약 80%가 국군, 경찰, 극우폭력단체인 서북청년단, 대동단에 의해 사망했고 나머지는 20%는 남로당 무장대에 의해 사망했다.
그러나 미 확인된 민간인 사망자는 6만명-8만명으로 지금도 시신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미 확인 민간인 사망자의 대부분은 군, 경찰 등 공권력과 미군정과 이승만이 묵인한 서북청년단에 의해 희생되었다
반면 토벌대(군, 경, 우익단체)는 약 220명이 죽었고 남로당 무장대는 약 1,500명이 죽었다.
나는 중 고등학교에서 4.3폭동이 남로당 빨갱이들이 제주도에서 일으킨 폭동반란이라고 배웠다. 나 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다.
학교에서 배운 게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동기는 김익렬 장군의 유고록을 읽은 후였다. 중장으로 전역한 김익렬 장군은 4.3 사건 당시 9연대 연대장으로 제주도민의 생사여탈권을 쥔 제주도 국군 최고 지휘관으로서 4.3사건을 몸으로 겪은 당사자다.
역사기록은 정직해야 한다고 생각한 김익렬 장군은 4.3사건의 기록 서두에서 “역사와 국가에 대한 사명감과 충성심”으로 기록을 남긴다고 썼다. 그는 기록을 모두 정리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는데 유언으로 “내가 죽은 후에 세상에 내놓고 회고록에 가필이나 수정을 하지 않아도 될 때 내놓으라.”고 했다.
70년대 군사독재시절 4.3 사건에 대해 정부에서 미군정과 경찰의 잘못을 은폐되고 본질을 왜곡 시키는 분위기에서 김익렬의 기록이 나왔으면 빛을 못보고 없어졌을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사소한데서

1947년 3월1일 삼일절 행사가 있었다. 행사가 끝나고 제주도민들은 가두시위를 했다. 군중들이 길가에 늘어서 가두시위를 구경하고 질서유지를 위해 기마경찰이 출동했다. 실수로 말굽에 어린아이가 채였다. 기마경찰은 모르고 지나갔고 군중들이 항의를 하려고 경찰서로 몰려갔다.
경찰에서는 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러 온다고 오판하고 사격을 했다.
총 소리에 놀라 군중들이 도망갔으나 경찰은 사격을 계속했다. 이날 6명이 죽었는데 5명이 등에 총을 맞고 죽었다. 이는 명백한 과잉진압인데 경찰은 과잉진압이 아니라 정당방위라고 주장했다.
이에 민심이 크게 동요되었다. 그러자 경찰은 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한다는 미확인정보를 퍼뜨리고 육지에서 수백명의 지원 경찰이 도착했다.
남로당은 이 기회를 이용해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도민들이 이에 호응했다. 발포사건의 진상이 알려지자 당국에서도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 경찰을 규탄하던 집회는 군정의 사과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민관합동 파업이 일어났다. 이들은 발포사건에 대한 사과 및 책임자 처벌, 유가족 지원을 요구했다.
그때는 정부수립 전으로 미군정이 정부역할을 했는데 군정은 도민들의 요구사항을 무시했다. 오히려 서북청년단을 불러들여 경찰과 함께 파업을 탄압했다. 발포사건에 대한 군중들의 분노와 이를 이용한 남로당 개입이 있었지만 군정당국은 제주도민의 대다수를 좌익이나 좌익의 동조자로 간주해 무자비한 탄압을 했다.
계속되는 탄압으로 파업은 조용해졌으나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만행은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파업 참가자들은 연행해 고문해서 죽이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경찰과 군정을 향해 쌓이는 군중들의 분노, 남로당의 개입, 무자비한 탄압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제주도를 폭풍전야로 이끌었다.
일년 이상 지속되던 긴장상태는 남로당의 무장투쟁으로 클라이막스에 다다랐다.

운명의 4월3일

4월3일을 기해 남로당원 350명이 무장을 하고 경찰, 서북청년단, 경찰 가족을 습격했다. 무장이라고 해야 99식 소총, 권총, 대검, 죽창, 몽둥이였다. 그러나 총기는 태부족이었고 대부분이 몽둥이, 죽창으로 무장을 했다.
군정은 이를 무장폭동으로 규정해 대대적으로 병력을 증강해 본격적 토벌에 나섰다. 당시 미군은 제주도민의 70%를 폭동 동조자라고 보았다. 습격을 당해 피해를 입자 경찰과 우익단체는 적개심에 불타 몇 십 배의 보복을 해 6년동안 6만명-8만명의 죄 없는 민간인들이 이유도 모르고 죽었다.
산간마을에 사는 주민들을 통비분자로 몰아 빨갱이 취급해 감옥에 가두고 고문하고 폭행을 했다.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횡포를 피해 산으로 들어가 무장대에 합류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5.10 총선이 끝나 정부가 수립되자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 사건을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해 좀 더 강경 진압으로 선회했다. 우익단체 횡포를 피해 산으로 들어갔다 자수한 도민들도 감옥에 갇혔다 6.25가 나자 이승만 정권이 모두 총살시켰다.
남로당은 왜 무장폭등을 일으켰을까? 미군은 남한에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유엔 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했다. 5.10 총선거다. 그러나 남로당은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통일정부 세울 것을 주장해 총선거를 무산시키기 위해 중앙당 허락도 받지 않고 무장폭동을 일으켰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렇다. 그 때가 좌우 이념대립이 극심했던 시절이니 4.3 사건의 희생자들은 이념 대립의 희생자다.

김익렬 장군의 기록

김익렬 장군(이하 김익렬)은 서울에서 근무했는데 명동으로 외출 나갔다 송호성 조선경비대 총 사령관(지금 육군참모총장) 부인을 지나치면서 인사를 안 했다고 괘씸죄에 걸려 제주도로 좌천되었다. “너 제주도로 귀양이다.” 당시 군인이나 경찰들에게 제주도 발령은 귀양살이였다고 전해진다.
귀양 온 김익렬에게 제주도는 평화스러웠다. 연대에 실탄이 한발도 없었다고 한다. 빈 총만 들고 있어도 불안하지 않았고 해수욕이나 하고 천렵이나 하면서 지냈는데 쓰고 있다.
제주도 인구는 약 30만명이었는데 서류상으로는 남자 14만, 여자16만으로 여자가 약간 많으나 근로가능 인구 18세-40세에서는 남자 1명, 여자 25명으로 여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웬만한 남자들은 육지에서 생활해 고향으로 돈을 부쳤고 경제활동은 여자들 담당이었다.
제주도는 일제시대부터, 아니 그 전 조선시대부터 육지와는 동 떨어져 육지와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한 열등감 때문에 배타적이었고 육지에서는 제주도를 깔보고 경원했다.
해방이 되어도 별 다른 감흥도 감격도 없었다. 일본에서 미군으로 통치가 바뀌었을 뿐이지 다른 변화는 도민들이 실감하지 못했다.
제주도민들은 누구나 할 것없이 다 같이 가난했다. 빈부의 차이가 있고 자본주-노동자, 지주-소작농의 착취계급 피 착취계급이 있어야 계급투쟁이 있고 공산주의가 스며들 틈이 있는데 착취-피 착취 관계가 없으니 좌익사상이 파고 들 여지가 없었다.
김익렬은 4.3사건을 두가지로 분류해 47년 3.1절 사건부터 4.3까지는 폭정을 견디다 못해 일어난 순수한 민중폭동, 4.3 이후는 공산폭동으로 분류했다. 공산폭동의 골수분자는 350명 정도로 파악했다.
그래서 김익렬은 불필요한 민간인 인명피해를 막으려고 강경진압을 반대했다. 선무공작, 귀순공작을 통해 부화뇌동한 민간인과 골수분자를 분리하려 했다. 김익렬은 4.3사건의 주도자 김달삼을 만나 평화적으로 해결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경찰과 우익단체는 방화사건을 조작해 평화적 노력을 무산시키고 강경진압을 고집했다.
군정장관 딘 소장, 민정장관 안재홍, 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경무부장(현 경찰청장) 조병옥, 연대장 김익렬이 모인 회의에서 초토화작전을 고집하는 조병옥에 맞서 언쟁을 하던 김익렬은 조병옥의 모욕적 언사를 참지 못하고 격투를 벌였다.
주먹이 오고가는 싸움판이 벌어지자 안재홍 민정장관은 “이게 무슨 꼴이냐”고 통곡을 했고 송호성 총 사령관은 말릴 생각이 없다는 듯 “연대장 이놈아”만 연발했다. 다음 날 김익렬은 9연대장에서 해임되어 14연대장으로 부임했다.

비극의 종말

후임 9연대장으로 박진경이 부임했다. 박진경은 “제주도민 몰살 시켜서라도 폭동을 진압해야 한다”면서 민간인 학살을 자행하며 진압작전을 폈다.
전쟁 중에도 민간인 학살은 전범으로 처벌 받는데 폭동진압 한다면서 평화시에 자국민을 폭도 취급하며 학살한 행위는 명백한 범죄이자 국가폭력이다. 군, 경찰, 서북청년단, 대동단의 민간인 학살을 군정은 못본체 했다.
4.3사건이 일어날 당시는 좌우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절이었다. 어수선하고 열띤 분위기에서 좌익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이 이뤄졌다. 빨갱이, 공비라는 누명 쓰고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공산폭동이지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 누명을 벗겨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 다음해 국회에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고 2000년 초 정부차원의 진상조사가 시작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뤄졌음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를 하였다.
2014년 박근혜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통해 4월 3일을 제주 4.3 기념(희생자 추념)일로 입법 예고 해 그후 4월3일을 기념일로 지키고 있다.
세상이 다양화 되고 다원화 되어 좌우는 없어져야 할 낡은 시대 개념으로 운전할 때나 필요한 단어로 남아야 한다. 이념 대결에 억울하게 희생당한 제주도민의 영혼이 위로받기 바란다.


기사 등록일: 2020-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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