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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앙 - 갑자기 총성이 들렸지요."
작성자 박병철     게시물번호 -272 작성일 2004-01-24 22:22 조회수 1657

"빠앙-갑자기 총성이 들렸지요"
2004년 1월 24일 늦은밤
[ 도올 김용옥, 심수봉 대담에서]

“빠앙∼ 갑자기 총성이 들렸지요.
총성이 들리기 전에 언성을 높여 싸웠다구요?
그런 건 다 거짓말예요.
그분앞에서 김씨하고 차씨가 투닥거리는 그런 장면은 감히 생각치 못할 일이죠.
사전 알력은 있었겠지만, 총성은 그냥 갑자기 난 것이었어요.
차지철의 오른쪽 손목에 구멍이 뻥 뚫렸어요.
난 손목에 그렇게 구멍이 뻥 뚫린 건 처음 봤어요.
순간 차지철은 화장실로 도망갔어요.
총이 없어서도 그러했겠지만 아마도 다음 총알이 각하에게 날아가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겠죠.
하여튼 경호를 맡은 사람의 행동은 아니었어요.
저는 그 순간 이런 장면을 각하는 어떻게 생각하실까?
바로 옆을 쳐다봤지요.
각하는 총소리에도 조금의 동요도 없이 눈을 지긋이 감고 앉아계셨어요.
이 녀석들이 또 철없이 난동을 부리는구나 하는 식의 태연한 모습이었어요.
이때 운명의 총알이 튀었지요.
오른쪽 가슴으로부터 비스듬히 복부를 관통해서 왼쪽 아래 옆구리로 피가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그런데도 박대통령은 아무런 흐트러짐이 없는 그 자세로 그대로 위엄을 지키며 끝까지 앉아계셨습니다.”
지금 생각만 해도 어제 일처럼 몸서리쳐지고 가슴이 메어진다는 그녀는 담담하게 그때 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목소리는 변함없이 옛정취를 전해주건만 그녀의 얼굴에는 기나긴 고뇌의 연륜이 쌓여있었다.
그것은 가냘픈 한 여인의 한이라기보다는 우리 최근세사의 굴곡진 이랑들이었다.
나는 아무 이유없이 그냥 심수봉의 노래를 좋아한다.
그녀의 가락의 굽이마다 이는 화사한 산들바람을, 갑사와 다이아몬드로 휘감은 페르시아공주의 하느적거리는 율동보다 더 매혹적인 선율을 나는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14일 저녁 동대문 남녘 서울 옛 성터가 남아있는 곳에서 그녀를 만났다.
―병풍 뒤에서 노래를 부르게 했다는 게 사실이오?
“그런 엉터리 얘기가 어딨어요?
 아무리 권력사회라지만 그런 식으로 사람을 대접하지는 않았어요. 내가 아무리 얼굴이 못생겼다지만….”
그누구가 심수봉이 못생겼다 말했던가?
그녀는 아직도 젊고 신선했고 고일(高逸)한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꾸밈없이 아름다운 자태였다.
'밀실의 참극'서 榮華의 덧없음 배워"
“제가 박대통령 왼편에 기타들고 앉아있었고,
오른편엔 신재순, 코너엔 차지철이 앉아있었지요.
그 맞은편엔 김계원, 김재규가 앉아있었죠.
대통령께서 저에게
‘심양, 그때 그 사람 한번 불러보게’하고 청했어요.
그 노래를 부르고 나니깐 다른 노래 하나 더 하라고 해서
재순이가 ‘사랑해 당신을’ 불렀어요. 그런데 걔는 음치였어요. 너무 못부르니까 박대통령께서 재순이 노래부르는 것을 도와주시느라고 흥얼거리셨죠.
그리고 제가 기타반주를 해드렸구요.
그때 빠앙∼ 총소리가 난 거예요.”
“그리곤 곧이어 화장실에서 나온 차지철과 김재규 사이에서 격투가 벌어졌죠.
그리곤 불이 꺼졌고 김재규가 나갔어요.
그리곤 잠시 정적의 순간이 계속되었죠.
이땐 이미 박대통령은 쓰러져 있었어요.
그때 정적 속에서 심하게 가래가 끓는 소리가 들렸어요.
나는 본능적으로 대통령을 부축하면서 ‘괜찮으세요’하고 물었지요.
그때 ‘괜찮아’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대통령 뒷켠으로 시커먼 방석 같은 게 있었어요.
그때 그것을 짚었는데 물컹, 끔찍한 느낌이 들었어요.
피가 시커먼 묵이 되어있었던 거예요.
나는 도망치고도 싶었지만 어찌할 수 없이 대통령을 부둥켜안고 있었죠.
그때 김재규가 다시 들어와서 대통령머리에 총을 대고 확인사살을 하는 것이었어요.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며 애원하는 눈빛으로 김재규를 바라봤지요.
그런데 찰칵∼ 불발이었죠.
나는 그때 이젠 살았구나 했어요.
그런데 김재규가 나가자마자 누가 총을 건네 주었어요.
김재규는 새 총을 들고 들어와 가혹하게 대통령 머리에 겨누었지요.
박대통령은 제 품에서 그렇게 마지막 숨을 거두셨지요.
그 이후로는 제 정신이 아니었고 제대로 생각이 나질 않아요.”

다시 상기할 필요조차 없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1979년 10월 26일 밤, 그 때 그 사람!
主와 客이 하나된 '나'를 찾아 유랑
―그대의 인생에서 10·26은 큰 사건이었죠?
“물론이지요. 제 인생의 모든 것을 뒤흔든 너무도 큰 사건이었지요.”
―그럼 그 사건으로부터 무엇을 배웠습니까?
“인생의 영화가 너무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배웠습니다. 저는 정치가남편을 얻는 것이 어려서부터의 꿈이었어요.
그 꿈이 산산조각 났고 권력이 보잘것없다는 것을 체득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부른 ‘무궁화’에 이런 가사를 집어넣었지요.
‘날지도 못하는 새야. 무엇을 보았니. 인생의 영화가 덧없다. 머물지말고 날아라!’ 결국 제 신세를 노래한 것이죠.”
―그 사건이 1979년 10월, 심수봉 아니 심민경(沈玟卿)이 MBC대학가요제에서 ‘그때 그 사람’으로 세인의 주목을 끈 것은 1978년, 그렇다면 궁정동 그 사건 당시도 대학생이셨겠네요?
“그렇습니다. 명지대학교 경영학과 4학년이었습니다.
대학가요제에서 수상은 못했지만 지구레코드사에서 저의 재능을 알아봤고 79년 1월에 제 판을 냈습니다.
그것이 5월에는 이미 공전의 힛트를 쳤고, 궁정동사건으로 제 인생에 암운이 드리우기까지 6개월간 세 방송사에서 경쟁적으로 저를 출연시켰고, 화려한 데뷔인생을 살았습니다.
가수로서의 제 공적인 인생은 이 6개월이 전부라 말할 수 있죠. 그 후로 8년 동안 저는 일체 활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왜요?
“전두환씨가 날 아주 싫어했어요. 내가 박대통령을 국민에게 연상시킨다고 공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적극 막은 것이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하늘에 산화한 넋이여! 몸은 비록 묻혔으나 나라를 위해 눈을 못감고 무궁화꽃으로 피었네.’
이런 가사의 ‘무궁화’노래가 돌아다니자, 전두환씨가 직접 왜 이따위 노래가 돌아다니냐구 지목해서 금지시켰다고 들었어요.
무궁화는 피면서 지고, 지면서 피고 그래요.
끈질긴 생명력이 있지요. 이 땅에서 죽어간 피끓는 젊은 넋들을 위로하고 싶었는데…
노래 못하는 저의 청춘은 죽음이나 마찬가지였죠.”
음악은 호흡·공감, 내 삶의 버팀목!
―심수봉씨의 모든 노래는 자신이 가사를 짓고 또 작곡까지 한 것인데, 도대체 그 독특한 창법과 음악적 재능을 어떻게 기른 것입니까?
“저는 원래 우리나라 국악사에 일획을 긋는 유명한 악인(樂人)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서편제도 아니고 동편제도 아닌 서산(瑞山)중심의 중고제, 이 중고제의 대가인 심정순이 저의 조부이고, 가야금산조의 한 유파를 이룬 명인 심상건(沈相健, 1889∼1965)이 저의 큰아버지입니다. 저의 아버지 심재덕은 국악의 이론가로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하는데, 아마도 평양에 갔다가 우리 엄마하고 눈이 맞아 말년에 나를 낳은 모양입니다. 허나 부친은 3살 때 돌아가셨고, 난 엄마와 단 둘이 살았어요. 우리 엄마는 평양부근 진남포여자였는데 역시 가무에 능했고 생활력이 강했죠.
나의 음악적 재능이 워낙 특출나니까 안가르치면 후일 크게 원망받을까 두려워 날 데리고 눈보라치는 기나긴 논두렁길을 지나 일본사람이 놓고 간 피아노가 있는 교감선생님댁을 매일 다녔죠. 서너살 때부터… 아득한 서산의 추억입니다.
7살 때 엄마는 날 데리고 서울에 와 살었는데, 내가 중학교 지나 사춘기때 엄마는 그만 요상한 사교에 빠져 가산과 이성, 그 모든 것을 잃고 말았어요. 나는 13살 때부터 이미 피아노, 드럼, 기타 등 많은 악기를 잘 다루었는데 고등학교땐 가발쓰고 미8군에 들어가서 그룹활동을 하면서 소녀가장노릇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대의 인생에는 영적 체험이 많다고 들었는데….
“저는 홀엄마 슬하에서 홀로 자라서 그런지 기억이 들고부터 외로움을 극심하게 탔습니다. 몸과 영으로 모두 이방인이라는 생각에서 살았죠. 어릴 때, 아주 어릴 때 방안에 스산하게 눈부시는 전등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을 쳐다보고 그토록 구슬피 오래 울었습니다. 왜 저것은 저토록 외롭게 빛을 발하고 있을까?
사람들은 왜 나와 다를까? 나는 슬픈데 왜 저들은 기쁠까?
나는 왜 이렇게 외로운 객체가 되었을까?
사춘기 어느날 손에 든 것이 김일엽스님의 ‘청춘을 불사르고’였습니다.
‘이광수를 사랑했던 것이 불가에 귀의하고 보니 결국 나를 사랑했던 것이다’ 이 구절에 눈길이 닿았을 때 환희의 눈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나와 너가 하나된 세계, 객체와 주체의 구분이 사라진 각(覺)의 경지를 일엽스님은 말씀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 뒤로 난 그 나, 하나된 나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절을 유랑했습니다.
그런데 스님들은 마야부인의 코끼리꿈 따위만 얘기하면서 날 무시했어요. 어느날 꿈을 꾸었지요. 어떤 놈이 날 덮쳤는데 그 놈을 한주먹에 물리치고 날 구해준 사람이 말하는 거예요.
‘법주사로 오라!’ 난 법주사라는 이름도 몰랐어요. 꿈깨어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법주사라는 절이 실제로 있다는군요.
버스를 갈아타고 갈아타고 13시간이나 걸려 밤늦게 법주사에 당도했는데, 새벽 예불때 돌계단에서 떨어져 갈비뼈가 부러졌어요. 두번 갈때마다 그런 불상사가 있어 스님들은 귀찮은 내가 다시 안오리라 생각했는데, 세번째 또 간 것이죠.
친절한 총무스님이 한 20분 산길을 올라가면 토굴에 25년이나 생식으로 연명하시는 큰스님이 계시니 거길 가보라고 하는 거예요. 밤을 꼴딱 새우고 동트자마자 토굴에 올라갔는데
아! 이럴 수가! 바로 꿈에 본 그 사람이 쬐그만 단칸방에 앉아계신거예요. 그분은 동경에서 대학을 나왔다 했는데, 첫 말씀이 경전을 가까이 하면 도와 멀어질 터이니 각을 해라!
게으르지 말고 참선을 해라! 하시면서, 제게 새이름을 지어주셨어요.
도(봉우리)를 지키라는 뜻으로 수봉(守峰)이라 했지요.
난 신을 발견했어요. 여러번 그분을 시봉하러 다녔지요.”
―그 뒤로 그분과는 어떻게 됐나요?
“어느날이었죠. 그분이 날 껴안았어요.
나의 신이! 지족선사가 황진이를 안아 도가 깨졌다는 것은 거짓이다, 그것은 보살심일 뿐이라 하시면서. 나의 신은 범인에 불과했어요. 이렇게 나의 구도행은 일그러지기 시작했죠.”
―실망이 컸겠군요. 그것이 종말이었나요?
“그 스님의 예언대로 나는 수봉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가수가 되었어요. 그리곤 생각했어요. 황진이에 대한 일시적 보살심도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다.
법주사를 찾아가보니 전두환정권법난으로 토굴이 다 철거되어 버렸고 스님의 자취도 없더군요. 어렵게 수소문하여 여기저기 족적을 헤맨 끝에 대전의 어느 토굴에서 쓸쓸한 그를 발견했어요. 스님께 큰절하고 서있는데 또 날 껴안으시는 거예요.
난 그길로 하산하면서 어찌나 울었는지, 지는 낙엽과 더불어 어찌나 눈물이 펑펑 쏟아졌는지, 내가 만든 신이었지만 나의 생애에 있어서 신이 사라지는 비극적 순간이었지요.”
지금은 맨하튼에서 드럼공부 열중
불행하게도 우리의 붓은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다.
天長地久有時盡
(하늘이 드넓고 땅이 오래간다 하지만 언젠가 끝날 날이 있으나),
此恨綿綿無絶期
(이 한만은 이어지고 또 이어져 끝날 줄을 모르네).
백낙천 ‘장한가’의 마지막 구절이다.
 
심수봉의 장한(長恨)은 심령도사 한씨를 만나 정신병원에까지 강제수용되었다가 결국 그와 아들 하나 낳고 보름만에 업고나온 이야기, 그리고 진해업소의 무시무시한 사장님에게 코꿰어 딸 하나 낳고 8년이나 시달린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 애절한 사연을 어찌 다 여기 옮길 수 있으리오마는,
굽이굽이 그녀의 운명을 지배한 것은 결국 그녀의 고독과의 투쟁이었다.
그녀의 열정이 만드는 비운이 그녀의 음악을 탄생시켰고, 그것은 어김없이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유체이탈을 자유자재로 하고 투시에 능하고
‘노자도덕경’을 탐독한다는 한도사와는 왜 헤어졌나요?

“폭력이었어요. 날 주먹으로 구타하기만 해도 참아주겠는데 꼭 칼로 휘둘렀지요.
그자의 칼에 몸이 갈라진 적도 있었지요.
결국 사랑이 빠져있었던 것이죠.
이적과 초능력에 미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상적인 사랑이 결여된 인간들이죠. 불쌍할 뿐예요.”
―지금은 카톨릭신자이시라면서 이젠 뭔가 큰 깨달음을 얻으셨겠군요?
“저는 본시 운명론자입니다. 사주팔자를 잘 믿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을 믿으면 나의 괴로운 사주팔자가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면서 크리스챤이 되었지요.”
―한도사 같은 만신을 만났다가 이제는 예수라는 더 큰 만신을 만나신 셈이군요?
“선생님은 어떻게 저의 신앙을 그토록 비하하십니까?
도대체 인간으로부터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을 초월한 절대적 힘의 도움이 없이 깨달음을 얻으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중략..)
―당신과 나의 가장 큰 차이가 뭔 줄 아십니까?
“뭔데요?”
―당신은 꿈을 너무 많이 꾸는데 나는 꿈안꾸고 잠을 잘 잡니다.
―당신은 욕심이 많습니다. 너무 완벽한 깨달음을 추구하려고 발버둥치지 마세요. 외롭다는 생각 때문에 계속 외로와지는 인간이 되지 마세요. 잠을 잘자고 건강히 살려면 자기를 버려야죠. 우주와 합일이 되려는 자기를 버리세요. 일엽스님도 이기적 자기를 말했을지 몰라요. 이제 너무 구원받으려고 노력치 마시고 그냥 밥먹고 똥싸구 생각없이 사세요.
그녀는 뭔가 내 말에서 깨달음을 얻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그대에게 음악은?
“음악은 호흡입니다. 그것으로 호흡했기에 오늘까지 살 수 있었습니다. 노래라는 게 결국 가사쓰고 멜로디붙여 사람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죠. 자기얘기하고 위로받는 거예요.”
나는 그녀의 노래가 바로 그녀의 각(覺)이 되기를 빌었다. (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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