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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네이디언
 
진주만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올라서서 1941년의 어느 날 아침을 머리 속에 그리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은 내가 태어난 그 해의 일이니까 꽤 오래 전이 됩니다. 내게 다가온 한 일본인은 나보다 한참이나 연상인 것으로 보아 전쟁 당시 이미 군복무도 했을 성년이었을 것입니다. 나를 자기처럼 옛 적국에 와서 거주하는 일본사람쯤으로 짐작했던 것일까 아니면 하고 많은 재미있는 관광을 마다하고 하필이면 이 언덕일까? 그는 내가 캐나다 시민권 소지자라는 법적 국적이전의 나의 뿌리를 들쳐 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 후에도 나는 북미주에 살면서 여러 번이나 같은 질문을 받고는 했는데, 그럴 때면 나는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나는 누구인지 하는 자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캐나다 거주인의 16퍼센트나 되는 인구가 캐나다 밖에서 태어난 유색 소수민이므로, 서유럽인과 외모가 다른 캐나다 거주 인종은 전체 인구에서 상당한 수를 차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제 2차 대전 이전에도 이미 캐나다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한 사람들의 새로운 삶터가 되기 시작하였지만, 아무나 다 동등하게 환영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서유럽인 이외의 인종에게는 '외국인' 취급을 한 것을 보더라도 어느 정도 따돌림이 있었던 것이 짐작됩니다. 그 이유는 당시 유럽이나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하여 인종우열의 근거를 과학으로 증명해보려는 차별적 사회 분위기가 있던 시기였던 데다가 대전 후 이민의 수가 급증하면서 '외국인' 의 노동을 선착자의 밥뺏기 경쟁쯤으로 여긴 일반인들의 태도에서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조그만 가방 두개에 사전 몇 권과, 추운 객지에 온다고 억지로 싸 넣어준 겨울 내의 몇 벌만 가지고 고국을 떠날 때, 나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의 나의 정체에 대해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어느 나라에 속하는가, 캐나다 시민권 소지자라고는 할지언정 '커네이디언' 이라고 할 때는 나나 듣는이나 다 같은 무언가 흔쾌하지 못하고 뒷 맛이 남아 도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나의 한국국적은 말소되었고 스스로 택한 캐나다의 시민 임은 공식화 되었음에도, 서유럽계 주류와 다른 나의 외모와 피부색깔이나, 당시의 내 고국의 형편에서 도망치 듯한 나의 과거가 나를 떳떳치 못하게 하고 '그들' 속에 끼지 못하게 하는 것인가? 나의 정체를 놓고 운운하는 이 캐나다란 나와 같은 소수인종에게 어떤 정책을 쓰고 있는가? 복합문화는 지금의 캐나다 생활의 현실입니다. 자유와 다양성과 평등을 지향하는 이 정책은 각기 다른 배경이나 인종, 전통, 문화 유산 등의 상호이해와 인정에서부터 시작합니다. 1960년대에 영국과 불란서계의 캐나다의 두개 전통 주류가 잠시 충돌하면서, 1970년대에 와서 각계 캐나다 사회에 새로운 태도를 일깨우게 되었고, 1988년에 와서야 처음으로 이것을 입법화하게 됩니다. 제 2차 대전 이전만해도 캐나다를 양부국으로 하여 입국관 소수민족은 대개가 농장, 산림이나 광산 등지의 노동 인구였지만, 그 후의 새로운 이민의 물결은 높은 교육 수준과 그 만치 빠른 캐나다 내에서의 자리 잡음으로 그들의 위치도 다져져, 정치적으로 분명한 태도를 천명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오던 때만해도 나의 용모가, 이름이 이들에게 호기심을 일으키었는데, 지금은 언제나 어디서나 각가지 복색과 다양한 말이나 축제 등이 아주 생소하지가 않습니다. 미국은 인종 용해 정책으로 잡다한 인종을 가마 솥에서 녹여내 미국인으로 찍혀 나올 수 있다고 믿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또 식민기간 중 일본의 한국인에 대한 정책이 어떠하였는가를 우린 잘 알고 있습니다. 상투를 자르게 하고 복식을 바꾸게 하려던 것은 물론 신사참배나 일본 교육으로 우리들의 의식구조까지를 속속들이 뜯어 다시 만들어내려고 들었습니다. 지금 미국이 주물을 부어 찍어내듯이 미국인을 찍어 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 것은 참 다행한 일이며 캐나다가 복합문화 정책을 지향하고 있는 것은 더더욱 다행한 일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구미에 맞아 즐기는 음식에서, 푹 달여 끓인 국이나 찌개를 각개 식품이나 양념에서 녹아 나와 어울린 새로운 맛이 있습니다. 우리의 음식 기호처럼 성벽에도 특징이 있어서, 무슨 모임이나 단체에 들면 나를 버리고 그들과 휩쓸리기를 종용 받습니다. 단일 민족으로 구성된 나라는 독선적이 되어서 나 이외의 민족이나 문화가치에 대한 포용력이 적을 수도 있습니다. 폐쇄된 민족주의도 사실 대규모 전쟁이란 특별 상황에서는 일시적이고 산벌적이긴 하지만 전통이 흐려질 수도 있겠고, 더구나 지금의 국제적 생활 속에서는 많은 통신량과 통용되는 상품의 홍수로 집중적이고 지속적인 흠집을 내고 있습니다. 그만치 단일민족, '우리' 만을 고집하기 어렵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나는 북미주에 오기까지는 다른 민족, 문화에 대한 참 이해가 거의 없이 세계사나 지리에서 배운 한갖 지식으로만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직접적이고 일차적 접촉에서 일어난 이해와 포용이 얼마나 값 있는 것인가를 알게 된 것은 이 캐나다에서 였습니다. 캐나다의 이민 정책이 이 방대한 지리적 조건과 치열해가는 국제 경제 경쟁에서 불가결한 인력 조달의 일환에서 비롯한 것인지 어떤지.. 하여튼 영국이나 불란서라는 두개의 주류를 이루는 전통이란 배색(背色)에 또 다른 많은 색깔을 섞어 넣어 서로 어우러지며 하나로 조화하는 데에 캐나다의 현재가 있고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한국계 캐나다인은 전체의 일역을 맡아 놓은 긍지를 가질 시민들입니다. 이번, 함께한 음악회는 다양한 문화를 지향하는 캐나다의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우리들의 색깔을, 소리를 알려 이해를 증진하고 건전한 관계를 이루는데 그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누리어야 할 미래가 불협화음이 되지 않도록 하는데 그 소임이 있었을 것입니다. 법적인 제도나 정책 이전에 있어야 할 솔직한 감정의 상호교류야 말로 캐나다와 캐나다 속의 한국인이 나누어야 할 일차적 작전이 되어야 합니다. 각기 악기의 소리는 시작일 뿐입니다. 소리들이 교향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지휘 속에서 이어야 합니다. 만약, 지휘자가 한번만 하고 마는 객원이라 해서 또는 소수민의 지휘자라 해서 단원들이 일사불란하게 반응해주지 않는다면 함께하면서 하나의 소리를 조화해 내지 못합니다. 한국이란 뿌리 없이 나는 있을 수 없는 것만큼이나 나의 성장은 "지금-여기"라는 캐나다의 한 시민으로서 입니다. 편집자 주) 본 글은 CN드림 2003년 9/19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Copyright 2000-2004 CNDream. All rights Reserved

기사 등록일: 2004-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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