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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돼서는 안될 사람 _글 : 오충근 (에드몬톤 교민)
조선 15대 왕 광해군은 반정(혁명)으로 쫓겨난 왕이다. 쫓겨난 이유 중 첫 번 째는 서모인 인목대비를 폐출 시킨 것이다. 주자학을 이념으로 하는 사회에서 친 어머니는 아니지만 족보상으로 어머니인 대비를 폐출 시킨 것은 패륜에 해당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친명정책을 포기하고 중립정책을 쓴 것이다. 당시 중국에는 명나라가 쇠퇴해 가고 청이 새로운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었는데 조선시대 지배계급은 이상하게도 명에 집착해 국왕보다도 부모보다도 명나라가 우선이었다. 그런 사대부 계층은 광해군의 중립정책을 받아 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반정군에 의해 왕으로 옹립된 인조는 조선 역대 왕 중에서 가장 못나고 무능한 왕이었다. 그는 중립정책을 포기하고 친명정책으로 돌아서 청을 불필요하게 자극해 두 번의 전쟁(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을 자초해 국토를 유린 당하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려 현대시대였다면 내우외환의 죄로 형무소에 들어갔을 것이다.
병자호란의 결과 인조는 항복을 하고 소현세자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인질로 끌려갔다. 기록에는 192명으로 나와있는데 그 외 수많은 백성들이 전쟁포로로 잡혀가 이력만리 타향에서 노예생활 하다 죽어갔으니 모두 못난 왕 인조 탓이다.
당시 청의 수도는 심양이었는데 세자 일행이 머물던 곳을 심양관이라 한다. 심양관에는 세자와 세자빈 이외 192명이 머물렀는데 이들이 먹는 것만도 큰 문제였는데 세자와 함께 온 세자빈 강씨는 대식구가 먹고 사는 문제는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현세자 일행이 머물던 심양관은 요즘 말로 하면 대사관 역할을 했다. 세자는 같이 인질로 잡혀온 친명반청 인사들의 재판에서 이들은 보호하고 청과 직접 상대하기 꺼려하는 아버지 인조를 대신해 청 과 정치적 교섭을 도맡아 했다. 세자가 청과의 정치적 문제를 다루고 세자빈 강씨는 살림을 도맡아 했다.
세자 시강원(세자의 교육을 맡은 기관 겸 비서실)에서 작성해 승정원(국왕 비서실)에 올린 심양장계에 자세한 기록이 있지만 그 기록에 의하면 강씨는 청의 황족 팔왕과 손잡고 청-조선 간의 무역에 손을 대었다. 만주에서 수렵생활을 하다 건국해 명을 멸망 시킨 청은 물자부족에 시달렸다.
포로로 잡혀와 노예생활을 하는 조선백성들이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조선으로 돌아가려면 속전을 내야 하는데 강씨는 돈이 있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마침 청은 세자에게 농사 지을 것을 권유했다. 세자를 따라 온 신하들은 농사를 지을 경우 영원히 조선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반대 했으나 강씨의 생각은 달랐다. 무역으로 번 돈을 농사에 투자했다.
청에서 제공한 농토는 모두 600갈이 인데 하루 갈이는 장정 한 명이 하루 동안 경작할 수 있는 농토이다. 세자빈 강씨는 처음에 한족 노예(여진족이 지배층이 되고 본토 한족이 피지배층으로 되었다)와 소를 사서 농사를 지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한족 노예 한 명 사는데 은자 25냥-30냥, 소 한 마리가 15-18량이었다니 사람 값이 소 값보다 약간 비싼 셈이다.
그래서 첫 해에 수확한 것이 3,319석이었다. 세자빈 강씨는 한족노예를 포로로 잡혀온 조선사람으로 바꾸었는데 강빈 덕에 속전된 이들은 더욱 열심히 일해 수확은 해마다 늘어 갔다.인조실록 23년 6월 기록에는 ‘포로로 잡혀간 조선사람들을 모아 둔전을 경작해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바꾸는 무역을 하느라 관소 앞이 저자 거리처럼 붐볐다’ 라고 했다.
세자와 일행이 심양에 도착한 게 1637년 2월, 조선으로 돌아온 게 1645년 2월, 8년간의 인질생활이었다. 세자 일행이 돌아올 때 관소에 남아 있던 곡식이 4700석이었다니 세자빈 강씨의 수완을 알 수 있다.
소현세자는 인질생활을 하면서 세계정세에 눈을 떴다. 주자학만 있는 것이 아니고 천주학도 있었고 대국으로 섬기던 명, 청이 세계의 전부라 아니란 걸 알았다. 북경이 함락되고 명이 멸망하는 것을 두 눈으로 본 세자는 친명정책이 허깨비에 불과 하다는 것을 알았다. 세자는 자명종, 망원경, 신종 무기 등 유럽에서 건너온 문명의 이기들을 사용했고 독일인 신부 아담 샬을 통해 천주교 교리와 서양학문을 배웠다. 세자가 가져온 여지구(지구본)을 통해 지구 반대편에서는 과학기술로 새로운 세상을 여는 나라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세자는 귀국해서 조선을 새로운 국가로 만들 생각을 했다.
세자는 귀국할 때 천주교 신부를 데리고 오려 했으나 중국도 신부가 부족해 데려오지 못했다.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으면 조선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못난 왕 인조는 아들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인질생활 하는 동안 청 황실과 교류 한 세자가 자신을 밀어내고 왕이 될 것을 두려워했다.
귀국한지 두 달 만에 세자는 죽었다. 독살 당한 것이었고 세자의 죽음 뒤에는 인조가 있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9년을 꿋꿋하게 버티어 온 34세의 장년이 귀국한지 두 달 만에 학질에 걸려 3일만에 죽다니.
“온몸이 모두 검은색이었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으로 얼굴 반쪽을 가려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 되 죽은 사람 같았다.” –염습에 참여했던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의 구술 기록-
조선시대 왕통이 이어지는 순서는 세자-세손의 순서로 왕통을 이어지는데 소현세자가 죽고 왕위는 세자의 동생 봉림대군에게 돌아갔다. 인조는 큰아들 세자를 죽이고 손자들 3명을 제주도로 귀양 보내 두 명을 죽였다. 그뿐 아니라 며느리 강빈을 세자빈 자리에서 내 몰고 그날로 사약을 내려 죽이고 며느리의 친정, 즉 사돈 댁까지 멸문을 시켰다.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에는 우유부단하기 짝이 없었던 인조가 아들, 며느리, 손자 죽이는 데는 용감하고 결단력이 있었던 것이다. 역사는 반복되기 마련이라 인조 같은 사람이 또 생기게 되어 있다.
외국에 대해서는 우유부단하고 집안 일에는 용감했던 인조처럼 남의 나라 지진으로 희생 된 아이들 불쌍하다고 눈물 난다던 사람이 자기 나라 젊은이들이 촛불 시위 하는데 군화발로 짓밟고 방패로 내려 찍고 무지막지하게 진압을 하다니 그 눈물은 악어의 눈물일까?
(본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는 다를 수도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_ 편집부)

기사 등록일: 2008-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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