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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골육상쟁 _오충근의 역사기행
 


언젠가 전두환이 “정치 때문에 40년 우정이 망가졌다.”고 개탄한 적이 있다. 10대 후반부터 친구로 지내며 육사 시절 하나회의 전신 북극성회를 같이 조직했던 노태우, 김복동과 우정이 정치 때문에 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이란 친구는 물론이고 부모 형제 친척끼리 죽고 죽이고 한다. 대표적 인물이 수양대군 손에 죽은 단종이다.
유배지에서 편안하게 살 게 해주고 싶어도 주변에서 가만 놔두지 않는다. 뜻 있는 사람들이 모여 복위운동을 하면 골치 아파지니 살려둘 수가 없는 것이다. 교동도로 유배 된 연산군은 역질을 앓다 죽었다는데 독살 당했을 수도 있다. 증거는 없지만 유배 초기 독살 시도가 몇 번 있었다. 그러나 그 미치광이 임금에게는 정치적 동조자가 없어 복위운동 명분이나 가능성이 없었으니 그냥 살려둬도 별 일은 없었다.
광해군은 어명으로 사약을 받지 않고 유배지 제주에서 천수를 누렸다. 주위 상황이 인조가 광해군을 그냥 놔둘 수 밖에 없었다. 인조가 반정을 일으킨 명분이 광해군이 영창대군 죽이고 인목대비 폐모한 ‘패륜’이었는데 삼촌 뻘인 광해군을 죽인다면 똑 같은 ‘패륜’이 되는거라 반정을 일으킨 명분이 사라지는 것이다. 인조 아버지 정원군은 광해군의 배다른 동생이다.
또한 광해군은 명나라에서도 그런대로 인정을 받는 인물이었고 청나라(후금)과는 등거리 외교로 화친을 추구했던 친청파에 속하는 인물이라 죽이기에는 외교적으로 부담이 되는 존재였다.
그러나 수양대군 세조는 단종을 죽일 수 밖에 없었다. 복위운동으로 사육신이라는 홍역을 한 차례 겪었고 그냥 놔두면 또 다른 복위운동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중종이나 인조처럼 세조는 왕위를 차지한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양대군 측에서 내세운 명분이란 게 황보인 김종서 같은 권신들의 전횡, 황표정치인데 실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장된 부분이 많아 쿠데타 명분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명분도 약하고 당시 여론도 단종에 동정적이라 단종이 살아 있는 한 세조의 취약한 정통성은 언제 무너져도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단종과 세조, 조카와 삼촌 사이에 일어났던 일과 아주 똑 같은 일이 고려시대에도 있었다. 헌종과 숙종이 그 경우인데 판에 박은 듯이 똑같아 “역사는 반복한다”라는 말이 헛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삼촌과 조카의 운명
조선은 세종 때 태평성대를 누렸다지만 고려는 문종 이후 태평성대를 누려 이때를 고려의 황금기라고 말한다. 세종의 태평성대는 국내용이었지만 문종의 태평성대는 국제적으로 멀리 서역에서도 낙타나 말에 의지해 고려를 찾아왔다.
문종에게는 아들이 13명이나 있었는데 엑스트라들은 빼고 주연급 아들이 4명으로 그 중에 3명이 왕이 되었고 한 명은 승려로 유명한 대각국사 의천이다. 문종이 죽자 장남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순종이다. 37세에 왕위에 오른 순종은 왕위에 오른 지 3개월만에 세상을 떠났다.
순종이 후사 없이 죽자 동생 왕운(국원후)가 왕위에 올랐으니 선종이다. 이때도 둘째 국원후 왕운과 셋째 계림공 왕희 사이에 왕권다툼이 있었으나 순종의 유조가 있어 국원후가 왕이 되었으니 그가 선종이다. 고려시대에는 왕위를 아들뿐 아니라 동생에게도 물려 주었는데 선종은 자질 있고 뛰어난 동생들이 줄줄이 있는데도 어린 아들을 태자로 세워 공식 후계자로 지명했다.
비극은 선종이 47세에 세상을 떠났을 때 태자가 겨우 11살이란 사실이다. 11살짜리 소년 왕과 야심만만한 장년의 삼촌들, 계림공 왕희, 금관후 왕배, 조선공 왕도 등등 모두 왕위를 노리는 인물들이었다. 의천은 중이 되었으니 속세에 관심이 없었겠지만.
왕이 나이가 어려 모후 사숙태후가 섭정을 했다. 사숙태후는 인주 이씨로 현종 때 원평왕후 김씨가 이허겸의 외손녀로 그때부터 왕실과 혼인이 시작되었는데 이자연의 딸이 모두 문종과 결혼했다. 2비 인예왕후 이씨, 3비 인경현비, 4비 인절현비가 모두 이자연이 딸이다. 인예왕후는 문종에 아들 13명 중 10명을 낳았다.
사숙태후의 아버지 이석은 이자연의 아들로 고려 중엽 인주 이씨는 왕비자리를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이석은 생몰에 관한 기록이 없는데 딸을 도와 외손자 소년 왕의 왕위 보존에는 역할을 한 것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인주 이씨는 왕비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둘렀으나 이때는 세력이 많이 약화되었다. 고작 사촌 이자의와 원신궁주가 사수태후의 오른팔이 되었을 뿐 계림공에 비해 세력이 미약했다. 권력에 야심이 있는 계림공은 선종 때부터 자기 사람을 조정에 심어 놓아 권력장악 의지를 구체화 했다.

계림공의 야심과 의천
선종 떼부터 계림공은 자파세력인 소태보를 이부상서에 올려 관리 인사권을 장악했고 상장군 왕국모가 군사권을 쥐었다. 계림공의 장인 유홍은 판병부사로 군령과 군 인사권을 쥐었다. 조정은 모두 계림공 인물로 채워졌고 이자의 편에 선 친왕파는 드물어 이자의 세력붕괴는 시간문제였다.
거기에 더해 의천은 천태종 개종을 서둘렀다. 불교계 통합이라는 명분으로 시작된 천태종은 의천이 불교계를 장악해 계림공을 고려 왕으로 추대하는 것이었다. 왕실 사찰 흥왕사 주지로서 왕에게 충성하기보다는 계림군편에 선 것이다. 그러나 불교 통합을 통해 형을 왕으로 추대하려던 계획은 형수 사숙태후의 미움을 사 해인사로 쫓겨났다. 그는 해인사에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세상을 원망하는 시를 지으며 울분을 달랬다.
조카보다는 형제를 택한 의천을 보면 양녕대군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의천이 문종-순종-선종-헌종으로 이어지는 왕통을 인정하지 않고 계림군 편에 섰듯 양녕대군도 세종-문종-단종으로 이어지는 왕통을 인정하지 않고 수양대군의 찬탈을 응원했다.
양녕대군은 수양대군(세조)이 단종을 죽이라는 신하들의 건의를 받고 고민하자 단종을 수레바퀴 굴러 가는데 있는 벌레에 비유하며 “빨리 죽이라”고 재촉했다. 온갖 못된 짓은 다 하면서도 동생 세종의 배려로 죄를 받기는커녕 일생 편안하게 산 것을 그렇게 갚은 것이었다. 동생 때문에 왕이 되지 못했다는 피해의식 때문이겠으나 양녕대군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은 자기 자신의 허물 때문이었지 세종 때문은 아니다.

계림군의 거사
계림군은 조카 소년 왕과 형수 사숙태수가 알아서 물러나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유일한 왕당파 이자의는 세불리를 알면서도 얼마 안 되는 지지자를 모아 황궁을 경비하고 조정에서 계림군 일파와 힘의 균형을 이루도록 안간 힘을 썼다.
그러자 인내심에 한계에 도달한 계림공은 마침내 그 해 7월 거병을 했다. 조카 소년 왕이 왕위에 오른 지 겨우 두 달만이었다. 계림공이 반란을 일으켜 이자의 일파를 제거한 것을 역사에서는 ‘이자의 난’이라고 한다. 적반하장이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 패자는 유구무언일수 밖에.
계림공은 이자의가 소년 왕을 폐립하고 조카 한산후를 왕위에 올리려 했기 때문에 이를 진압해야 했다고 주장하지만 억지다. 불시에 기습을 당한 이자의는 왕국모의 심복 고의화 손에 죽었다. 한 줌도 안 되는 이자의 파는 모두 죽거나 유배를 갔다.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이자의 난, 계유정난, 12.12 모두 반란을 먼저 일으키는 쪽이 유리하게 되어있다. 사전에 모의를 단단히 하고 있다 불의에 기습을 하니 방어하는 쪽은 처음에 당할 수 밖에 없다. 불리한 전세를 역전 시켜야 반란을 진압하는 것인데 단 기간에 전세를 역전 시킨다는 것은 천운이 따라야 한다.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 계림공은 중서령이 되어 백관을 통솔하는 지위에 올랐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 성공 후에 영의정 된 것과 똑같다. 조정을 장악한 계림공은 대궐에 들어가 소년 왕을 압박하기 일수였다.
3개월을 삼촌에게 시달리던 소년 왕은 모후 사숙태후와 상의한 후 삼촌 계림공에게 양위한다는 교서를 발표했다. 이때 계림공은 세 번 사양하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하면서 양위를 허락했다. 이자의 난과 계유정난을 비교해보면 수양대군이 계유정난 일으킬 무렵 왕실 도서관에서 고려사 빌려다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열심히 했는지 알 수 있다.

소년 왕의 죽음
왕위에서 물러난 소년 왕은 부왕이 태자시절 거처하던 홍성궁에서 살다 이듬해 2월 14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송나라 요나라에는 병으로 죽었다고 알렸으나 살해 당했을 것이다. 의천은 소년 왕을 폐주(廢主)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평화적으로 왕위를 넘긴 선위, 양위가 아니라 강제로 폐위 되었다는 뜻이다.
소년 왕의 능은 은릉이라 한다. 소년이 은거를 했다는 뜻이다. 계림공은 왕위에 올라 숙종이 된다. 그는 소년 왕의 정통성을 인정하기 싫어 묘호도 정하지 않았다. 소년 왕의 묘호 헌종은 예종 때 올리는데 헌종이란 왕위를 바쳤다는 뜻이니 좋은 묘호는 아니다.
고려 숙종과 조선 세조는 조카에게서 왕위를 빼앗은 과정이 판박이로 똑같을 뿐 아니라 두 사람 모두 잘 다스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문종과 세종의 음덕이 그때까지 미친 것이지 그들의 능력이 뛰어나서는 아닐 것이다.

기사 등록일: 2016-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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