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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컬럼 4부) 수행관(2) -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1부에서 불교의 인생관, 2부에서 불교의 수행관의 무아론적 배경, 3부에서 불교의 실천관을 살펴보았다. 4, 5부를 통해서 불교의 수행관에 대해서 다루고자 하는데, 특히 이번 4부에서는 불교의 관법(觀法)에 대해서 말씀 드리고자 한다. 먼저 불교의 수행론과 진리론의 관계에 대해서 간략히 언급하겠다.

불교의 수행론과 윤리관

사실 불교에서는 수행관과 진리관이 별개가 아니다. 왜냐하면 불교에서는 여타의 신(神) 중심의 종교에서처럼 주어진 진리를 그대로 믿고, 개별 종교인들은 그 진리를 알 수 없으며, 오직 주어진 진리를 믿고 따르라고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는 바로 우리 앞에 주어져 있으며, 자신의 노력으로, 즉 수행으로 깨달을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즉,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는 것’이 그 수행방법의 모든 시작과 끝이라고 할 수 있어서, 불교의 수행은 그 윤리적 근원이 절대적인 가치나 계율을 따르지 않음을 질책하는 것에 의해 기인되었다기 보다는, 주어진 진리를 도외시하고 그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것, 즉 ‘무명(無明)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상태를 죄악시하는 것에 그 근본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율적 수행론과 윤리관은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불교를 가장 인간적인 종교로 규정한 것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는 것’으로부터 불교의 관법(觀法)의 수행은 시작되는 것이다.

관법(觀法)의 방법 - “단지 바라보기만 하라”

‘단지 바라보기만 하라’(고엔카, 인경역, 경서원)라는 책을 보면 10일간의 위빠싸나 수행법을 중심으로 불교의 관법을 설명하고 있다. ‘위빠사나’라는 말은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등지의 남방불교의 모어(母語)인 빨리어의 한글 표기로서, 그 뜻은 ‘보다’, ‘관하다’이다.
이 남방불교의 위빠사나라고 하는 수행법은 석가모니 붓다에서부터 전해 져오는 불교 수행의 핵심 원리이자 내용인 것이다. 책 ‘단지 바라보기만 하라’에 따르면, 초기 불교에서 전해져 온 관법이 남방불교에서 어떻게 자리잡고 실천되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10일에 걸쳐서 자신의 탐구의 시작, 그 출발점,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을 보는 일, 문제의 뿌리를 보는 것, 도덕성의 훈련, 집중의 훈련, 지혜의 훈련, 깨어있음과 마음의 평정, 수행의 궁극적 목표라는 단계로 관법을 시행하게 되는데, 결국 이러한 관법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면 마음의 평정을 찾고 고통으로부터 완전하게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한없이 복잡하고 불편하기만 했던 마음이 수행의 과정을 통해서 관찰되고 치유되어 지혜로 변환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일상적인 번뇌로부터 깨달음의 마음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유식학(唯識學)에서는 전식득지(轉識得智)라고 하여, 불교 수행의 근원적 메카니즘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인연에 대한 이해와 고통의 치료

그렇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관법은 어떤 근본적인 측면에서 사람의 고통이 치유된다고 설명하는 것일까? 남방에서는 보통 몸-느낌-마음-현상(身受心法)으로 그 고통에서 해방의 치유에 이르는 과정을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보다 근원적으로 보면, 이러한 관법의 수행은 우리의 인연관계를 들여다 보는 것으로 시작된다고 보면 된다. 불교에서 인연법을 체계화한 가장 대표적인 교의로는 십이연기(十二緣起)관을 들 수가 있다. 십이연기란 우리의 중생들의 모습을 그 원인에서 현상에 이르는 열두가지의 고리 [무명 - 행동 - 앎 - 이름 /물질 - 감각기관 - 촉감 - 감수작용 - 사랑 - 집착 - 있음 - 태어남 - 늙고 죽음] 로서 설명하는 것이다.
그 열 두 개의 인연 사슬의 근본은 ‘바로 알지 못함’, 즉 무명(無明)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십이연기관의 핵심은 무명 혹은 무지가 인간의 행동을 유발시키고, 그로 인해서 앎이 생겨나고, 결과적으로 인생의 모든 생노병사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 자신들의 모든 삶의 내용과 결과는 결코 타인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의 판단과 앎에서 시작되었고, 그 해결도 자신의 힘과 지혜에 의해서 가능할 수 밖에 없음이 십이연기관에서 대표되고 있는 불교 관법수행의 핵심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은 누가 시켜서 실행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양심이 명령해서도 아니다. 절대자나 절대도덕에 의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단지 자신 스스로가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와 필요에 의해서 시작되고, 또한 자신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무명을 타파하고 지혜를 얻게 되는 과정이 가능해 짐을 역설하는 것이다.
불교 관법수행은 단지 자신을 둘러싼 고통을 제대로 보고, 그 원인인 무지의 근본을 스스로 찾아 처방하고 해결해 나가는 가장 자율적인 실천-수행법인 것이다.


기사 등록일: 2007-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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